퇴근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좀체 손님이 들지 않습니다
농사를 준비하는 시기이니 곧 농번기에 들면 좀더 한가해지겠죠
무료한 시간 월척 게시글 보다 권형선배님 글을 봤습니다
권형선배님께서 시골을 경험하셨다면 이런글도 나오지 않을까 싶어
별책으로 권형님 그때 그시절을 모방해 봅니다
제목은 "칫간의 추억 '으로 해 두겠습니다
경험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저 어릴적 시골의 변소는 지금처럼 집안에 있는게 아니라 안채와는 좀 떨어진
헛간쯤에 있는게 대부분 이었을겁니다
소를 키우는 외양간과 같이 있기도 하고 별채로 따로 만들어 사용하던 변소도 있었죠
소를 맡겨 대신 키우게 하고 어미소가 송아지를 낳으면 키우는 삯으로 송아지를 받던 시절이었습니다
소를 키워주던 영식이네 처럼 가난한 집의 변소는 대부분 외양간과 겸해 사용했고
어미소를 대리 사육케 했던 승연이네 처럼 부잣집의 변소는 그럴듯 하게 지은 별채이기도 했습니다
그당시의 변소 ..
소가 누워 되새김질 하고 있는 외양간 한쪽엔 큰 항아리를 묻고 그위에
넓은 판지를 양쪽으로 댄 예전의 "칫간"이 있었습니다
칫간은 이곳 전라도의 방언이죠
먹을거리 넘치지 않던 그시절
작은 방 한구석 고구마 뒤주엔 배고픈 아이들 겨우내 간식거리인 고구마가 가득했었죠
꽁보리 밥에 고구마 그리고 굵은 무우를 그대로 염장한 싱건지
배가 불룩 하도록 먹고나면 깜깜한 겨울밤 칫간을 몇번은 드나들어야 합니다
전기가 귀한 시절이니 양초나 화랑성냥을 들고 칫간을 가야 하지만
그 칫간이란게 혼자 가기는 좀 무섭습니다
컴컴한 발판아래 큰 항아리 속엔 파랗고 빨간 칫간 귀신이 손을 나풀거릴것도 같고
바지 내리고 앉아서 힘을 쓰다 오금이 저릴쯤엔 뒤쪽에서 누군가 꼭 노려보고 있는것도 같습니다
그러니 형을 졸라야죠
성아야 칫간가자 응 ...
조르고 졸라도 콧방귀도 안뀌는 성
결국 손등 낫에 베어가며 열심히 깍은 팽이를 내주고서야 성은 같이 화장실을 가줍니다
바지를 내리고 발판에 발을 딛고 손을 위로 치켜들면
천장에 달려있는 새끼줄이 딱 알맞게 손에 잡힙니다
새끼줄의 용도는 "도움닫기"견인줄 입니다
무슨말이냐 하면 지금처럼 무른 은식만 많이 먹는 아이들이 아니던 시절이었습니다
떫은 땡감도 따먹고 생고구마도 심심하면 이빨로 껍질만 까 먹던
건강한 시절이라 무른 음식이 없으니 "경질성 배변" 보통이었죠
때론 배변구(?)가 찢어질정도로 고통을 겪기도 했고 어느 지집아는 아버지가 숟가락으로
해결(?) 해주기도 했답니다
진짜냐구요
네 .. 진짜로 실지로
암튼 칫간에 따라온 성아는 얼른 싸라고 성홥니다
날씨는 춥고 군불땐 방바닥이 설설 끓는 이불속도 얼른가보고 싶고
아궁이에 넣어둔 고구마도 다 탈것 같고 ...
그런데 동생이 힘쓰는걸 보고있자니 성아도 소식이 옵니다
야 저 앞으로 쪼끄만 가봐 ..
동생이 엉기적 거리며 발판 앞쪽으로 조금 움직이자
성아가 그 뒤에 동생의 궁둥이를 보고 바지를 내리고 앉습니다
그래도 성 인지라 동생을 걱정해준다는 말이 야 .. 너 동 지금 막 나온다
더 더 ..죄끔만 힘 더 써라 자슥아
두형제가 볼일을 마치고 뒤를 닦는건 요즘처럼 질좋은 화장지가 아니었습니다
아주 어릴땐 지푸라기를 썻죠
그래도 상처나지 않고 튼튼했습니다
그때의 연마가 지금도 효력을 발하고 있죠
그다음엔 공책 .신문들을 썻구요
혼자 칫간갈때 무서우면 화랑성냥 한개비씩을 켜고 .다타면 또 켜고
가끔 공책 찢어 불장난 하다 칫간 태우기도 하고
잘못하면 한쪽발이 빠지기도 했습니다
흙벽이 한쪽이라도 헐어 무너지면 길가는 사람에게 궁둥이 구경도 시켰드랬죠
얼마 지나지 않은 기억인양 아직도 생생한데 그 세월이 벌써 저만큼입니다
담너머로 주렁주렁하던 땡감 따먹고 체하면 된장먹던 그시절
텃밭에 익지도 않은 참외 씨만 발라내고 퍼런 과육이라도 마다않던 그때
성아랑 칫간가서 둘이서 열심히 힘썻던 그때
모든게 풍족한 요즘이지만 뭐든 부족하고 없던 가난한 그시절
그 성아가 그립고 질컥하던 마당이 그립고 담장밑에 모래찜질하던 암탉이
집앞으로 흐르던 개울에 비만오면 올라오던 피라미가 그립습니다
저녁 식사 시간이실텐데 죄송합니다
짜슥아 힘서라 지금 막 나온다 .더 더 더 ..
권형님의 그때 그시절 (시골버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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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 구신들은 그리 많은지..........애구 무시라!
우리집 송아지 떵간에 빠져 그거 건지느라
형제들 온몸에 떵칠갑했는디........에~구려!
쥐도 찍직거리고 옆에 쌓인 잿간에는
정지(부엌)아궁이에서 재치운 잔불이 벌겋게 속불되고
위에 걸어놓은 대나무 위에는 닭들이 구구구구!!!
골목에 고양이는 야옹!
어릴 때 무서웠지요.
앞으로는 1탄 2 탄 이렇게 번호 붙여서 올리주셔요.
화장실... 변소라 하는 게 더 어울리는 그곳. 뒤에 무지 큰 거미가 매달려 있어서 그게 갑자기 볼일 보는데 확 머리 위로 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죠.
신문지를 볼일 보면서 잘 부비면 보드러운 화장지가 되었고 앏은 종이로 된 한장씩 뜯어 내는 달력(작은싸이즈 말고 큰거루..) 은 좋은 화장지 였지요.
이 지경을 면한 것이 몇해나 된 것인지... 전 아직도 양변기에 앉는 것이 불편 합니다.
학교 화장실은 어두워지면 빨간손 파란손이 함부로 올라오는 무시무시한 곳이었고.
소금장수가 야산에 큰 볼일을 보고 옆에 있던 뼈로 뒷일을 보고 냅다 휙 던지고 내뺐는데. "구리다 구리다" 하고 쫓아와서 소금을 집어 던졌더니 "짜다 구리다 짜다 구리다" 하면서 따라 왔다느니... 지금들으면 유치한 이야기 그땐 왜 그리 무서웠는지.
공용버스 대합실의 화장실도 사정은 형편없었지요. 수세식이라고 있는 곳은 고장이 잦고 잘 관리가 안되 끔찍한 지경이 십상이었고. 영화관 극장의 화장실은 극장 근처에만 가도 오줌 지린내가 나는 식이었고요.
그래서 저는 영화관 하면 그 오줌 냄새가 먼저 생각 납니다.
군대가서도 뻬치카 때는 막사 옆으로 한참을 돌아 화장실이 연병장 옆에 있었던 구식 막사.
무서워 밤에 혼자 변소 못가는 고참이 있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촌 아니라도 화장실 문화는 우리나라에서는 88올림픽이 많이 바꿔 놓았다고 하지요. 그 이전 가지는 우리나라 화장실 문화도 좀 그랬다는 거구요.
지금은 화장실이 너무 좋지요?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곳은 진짜 좋더라구요.
지금은, 중국이 아마 무섭게 바뀌고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통시 ,정랑
밤에 가려면~~~~~~~~~~~~~~~어 추버
요즘 화장실 우리집 안방보다 좋아요 ㅎㅎ
단어들이 좀체....ㅋㅋ
참 아련한 기억의 불씨들입니다
이젠 타다 남은 재 처럼...
풍족하지도 않은 그때가 그래도 정납니다...
이젠 그라지도 못하고....
은둔자님..엉아님..소밤님..파트린느님...
참 소중한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요 그려....ㅎㅎㅎ
뭐라 쓸 글이 없습니다 ㅎ
"정랑"은 뭐며 "통시"는 또 뭔지요?
시골버전 잘 보았습니다.ㅠ
워낚 도시에서만 살다 보니 시골 말은
완전 말뚝입니다
ㅋㅋㅋㅋㅋ
짚으로 닦 던 그시절 그 추억!
ㄳ합니다
다른 생명체와 달리 우리 인간만이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
안빠져 봤으면 말을 마시고~
요강보다 조금 더큰 푸세식 항아리에
주저 앉아 버려서 통아저씨 되버렸는데
입구에 팔 걸쳐있고 다리는 오금 아래쪽 걸쳐 있는데
구겨져서 어덩이쪽 오금에서 겨드랑이까지
꽉 껴가지고 혼자는 빼지도 못하고
흐~으 지금 같음 119감이죠~
짚은 지본이며
어쩌다 준비한 '돌가리포대"(시멘트포대)는 비비면 부드러워집니다.
아래 통에 물이 많으면 한덩어리 떨어지는 동시에 엉등이 좌로 우로대피.....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리운건 왜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