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자 친구의 결혼식
2002년의 말미에 사무실에 앉아 중요한 프로젝트의 기획안을 살피던 나는
친구로서 꽤 오래 관계를 이어온 곽양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녀는 당시까지만도 알고지낸 지 7년이나 되는 내 오랜 여자친구였는데
우린 "시작은 미약하지만 그 끝은 창대하리라"던 글귀와 시작은 미약하다는 점에서는 비슷했지만
그 끝은 창대하지 못해 소개팅 상대자에서 그대로 친구가 되어버린 ...
그래서 담담하고 또 담담한 그런 사이였다.
무릇 연인이란 불꽃같은 모양새로 만나 태울만한 땔감을 잔뜩 준비해 불꽃을 계속해서 피워올리고
또 그 불꽃이 한때 잠잠해진 후에 꺼질라치면 또 다른 땔감을 잔뜩 준비해 불꽃을 계속해서 살리고
이런저런 과정을 겪으며 사랑이 돈독해지는 법이지만
우린 모닥불은 커녕 불쏘시개만큼의 사랑조차 키워보지 못하고 그저 숯이 되어버린 그런 사이였다고
난 그녀와의 첫 만남과 그 이후의 시간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 결혼해."
중요한 일을 겸하며 건성으로 통화하던 나를 단 한마디로 집중하게 한 곽양은
부탁을 한가지 하였는데 그 부탁이란 다름 아닌 "결혼식 사회"였다.
한국 사회에서 여자측의 지인이... 그것도 남자친구가 사회를 본다는 다소 엉뚱한 상황설정은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한때나마 곽양과 소개팅을 했던 연인 고려 대상자였고
당시에는 비록 잠깐이지만 서로 호감과 이성으로서의 관심이 있었던
어쩐지 그 결혼식 사회라는 자리에 서는 것이 부도덕하다 여길만한 사람이 아닐까 싶었는데
그녀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기쁜 목소리로 내게 부탁을 해왔다.
내 오랜 여자친구의 신랑 될 사람이 미국에 오래 살아서 한국에 친구가 없다는 이유
그것 하나를 듣고서 나는 두말할 것 없이 그대로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망설임 하나 없는 맑고 기쁜 목소리 하나에 거절할 아무런 명분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과중한 업무에 묻혀 있던 나는 또한 같은 무게만큼의 큰 상념에도 빠져버렸다.
상처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는 평온함도 아닌 것이 뭔가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가슴이 꽤 저릿했다.
그녀는 코엑스 빌딩 앞 나무 밑에서 나누었던 가슴 따뜻한 포옹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실야구장 앞에서 풋풋하게 나눈 우리의 유치했던 입맞춤까지도 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우리가 잠깐 연인일까 그냥 친구일까로 고민하던 시기에
그녀가 선물했던 Giorgio Armani 향수는 아직도 절반이나 남아 있는데 말이다.
비록 친구로 통화하고 친구로 만나 유쾌한 모양새로 지내지만
아직까지는 그때의 여운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내게
"아무런 망설임 없이 기쁜 목소리로" 결혼식 사회를 부탁하는 그녀에게 섭섭함을 느꼈고
솔직한 마음으로 그녀가 결혼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주 조금은 싫기도 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저 늘 하던대로 가끔 연락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더불어 나누는 가벼운 맥주와
편한 친구로서 함께 하는 저녁식사 자리가 나는 언제까지나 지속될 줄 알았던 것 같다.
이러한 마음을 들키기가 싫어 나는 흔쾌히 허락해주었던 건가..
아무튼 이렇게 하여 남자친구도 아닌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에
나는 사회자로 참석할 날을 두 달 남겨두었었다.
시간이 흘러, 결혼식을 일주일 즈음 남겨둔 겨울의 어느 날에
나는 그녀와 삼성동 근처의 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만나 식사를 함께 했다.
평상시와 전혀 다름없이 우리는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고 분위기 역시 평상시와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그저 내 기분이 말없이 탁자 밑으로 가라앉았다는 것 그것 하나를 제외하곤 말이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거리를 걸었다.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네게 부탁하기까지 정말 많은 고민을 했지만 네게 부탁하고 싶었어.
넌 내 인생에서 어떤 여자친구보다도 더 여자친구스러운 사람이었어"
아마 난 이 말 한마디로 그녀에 대한 섭섭함이랄까...
그런 표현해내기 힘든 마음을 모두 떨쳐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날 그녀에게 정식으로 청첩장을 받아든 나는 그녀의 모습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걷고 난 후 그녀가 손수 건네준 청첩장을 펼쳐보았을 때
손수 까만 펜으로 쓴 초대의 글에 써있는 내 이름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마 난 그때서야 그녀를 진정한 친구란 이름하에
내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해 준 것 같다.
결혼식 날 아침. 정장 차림에 코트를 걸치고 결혼식장에 도착한 나는
준비된 꽃을 가슴에 꽂아 고정시키고 흰 장갑을 착용한 뒤 그녀가 대기하고 있는 대기실 앞에 섰다.
그리고 우스꽝스럽게도 신부대기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녀는 잔잔한 미소와 함께 나를 바라보았는데
나는 그때 깨달았다.
그녀의 미소가 내가 그때까지 본 그녀의 모습중에 제일 아름답다는 걸 말이다.
그때 나는 그 모습 앞에
한때 내가 가졌던 생각들을 떠올리곤 부끄러워했던 것 같다.
그녀는 미국에서 산다.
신랑과 함께 결혼식 직후 출국해서 지금까지 몇번의 귀국 이외에는 쭉 미국생활을 하고 있다.
그녀가 귀국했을 땐 시간이 맞으면 함께 술도 한 잔 하기도 하고
그녀가 미국에 있을 땐 전화로 가끔씩 안부를 묻기도 한다.
소개팅으로 만나 1살 많은 곽양과 연인과 친구 언저리 즈음의 애매한 관계로 지내다가
7년을 그렇게 보내고 결국 그 녀석의 결혼 사회를 맡아준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어쩌면 정말 삶이란 게 이런 운명이란 걸로 가득 짜여져 있는 게 아닐까...하고 말이다.
또 그녀는 내게 "남녀 사이를 넘어서는 우정"이란 경험을 하게 만들기 위해
하늘이건 신이건 그 누군가가 내게 보내준 그런 아리따운 선물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지금도 가끔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곽양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친구들은 말한다.
"아마 소개팅 했던 여자의 결혼식 사회까지 봐준 놈은 대한민국에 너 하나일꺼야."
p.s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1년 전에 있었던 일을 3년쯤 지나고 썼던 글이었는데요
이 친구가 지난 번에 썼던 이야기 속의 친구이야기에 등장하는 곽양입니다.하하하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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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치 않은 곽양이 제 추억 속에도 있답니다.
언제 만나게 되면 서로의 곽양을 씹어봅시다. ^^*
글이 참 맜있네요, 냠냠...
근데요 금요일에 일때문에 수원 못오시죠?
진짜로요 ㅡㅡ,.ㅡ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아니었군요.
저 같았으면 그냥 친구로도 아니었겠지만 사회는 생각도 못할일 이네요
잘읽고 갑니다 ㅎㅎ
우정 영원허세요
암튼 매번 술도 사가지고 들어오고
꼭 친누나 같아요, 매번 걱정해주고...안부 궁금해하고...
인간미 넘치는 친구라서 고맙죠 매번...
만나본적이 없네..
이참에 확?!
이참에....-_-;;;;
전 못 봤읍니다.
호...혹시 보셨나요.
꽤 야했습내다 하하하.
혹시 아내가 나중에 가입해서 읽을 수 있기에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쿨럭쿨럭 ;;;;
에헴...저두 쏜글라스가...ㅎ
본듯 안본듯..기억이 아물아물, 아사무사..
기억나면
글로 잘 표현해서 자계방에 꼭 올리겠읍니다.
우히히히
선배님 저는 광고쪽에서 12년 있다가
아버지께서 하시던 건축설비업 물려받은지 얼마 안됐습니다.
건축 쪽에 계시군요....
우왕!!!!!!!!! 반갑습니다.
제가 야간에 알바하겠슴다!!
혹,담넘고..머시기..
아녀,하지마세요.
차라리 제가 삥뜯겠습니다^^
이런글 불편 합니다..
왜!?
전 아직 쏠로기에..
그렇다고 머 요자 해달란건 아니지만..
궂이 제 기준은!!!
이쁘고,착하고,어리믄 됍니다!!!
피에스는!!!돈 많고..ㅜ
알싸한 겨울 바람이 코끝을 스치듯
글 한편 가슴한켠 아릿한 추억을 회상하게 하시는군요
좋은 하루 되세요^^
문장이 매력있습니다
황금빛잉어님 글쏨씨가 맛깔납니다.
저도 여자친구들이 몇명있는데 이성의 감정은 안느껴지고 참 편한 친구로 지내고 있습니다.
결혼식 사회는 아니더라도 피로연 가면 항상 신부측에 앉습니다...ㅎㅎㅎ
쉬운게 아닌데....
글 적는 솜씨가 대단하십니다 ㅎ
여자부터 만드심이...
낚시장비는 제게 맡겨두시고요 하하
깨달음님 실제 있었던 이야기입니당^^
영준아빠님 사나이의 우정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ㅋㅋㅋ 제가 이 글을 쓴 것은 무덤까지...
어수선님 덧글 감사드립니다.
그저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전 그게 행복입니다
찍사님 칭찬 감사합니다.
한 분이라도 즐겁게 읽어주심 저는 뿌듯하지요
곽대장님 저랑 비슷하시군요 하하
저도 신부측에 엄청 많이 앉아봤습니당.
박라울님 항상 읽어주시고 덧글 주시고
그게 더 어려운 일인데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소요님 대단은요...
그냥 있었던 일 적어놓은 일기 수준인데요
^~^ 감기조심하셔요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였군요 저의 상상이 부끄럽습니다^^;식장에서 반전이 있었을리는 없겠죠ㅎㅎ공감하는 이유는 제 주위에 친구부부들이 동갑내기가 많아 서로 미팅시켜주던 사이가 어느새
한아이에 부모가 되어버렸습니다ㅎㅎ
저또한 친구랍시고 내년에 남편이 되어버리지만요ㅋ
물론 님처럼 정말 친구일수도 있는군요^^
사랑하는법을 몰랐었네
사랑이란걸 알았을땐
그게 우정이엇었다는걸 몰랐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