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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불떼기] 나의 어릴적 이야기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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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때 나보다 어머님께서 더 학교에 많이 다니셨다. 내가 사고치고 튀어 도망가면 나대신 학교에 가셔서 손이야 발이야 빌고..또 빌어서 제발 졸업이라도 할 수 있도록..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한번은 기말고사를 치지 않으면 낙제를 하게된다고 해서 어찌어찌 시험보러 학교에 갔다가 백차가 와서 잡혔간 적도 있었다. 잠을 자다 어쩌다 새벽에 일어나면 차디찬 마룻바닥에 엎디어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하시는 어머님의 기도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죽을때는 너를 데리고 죽어야겠다..'라는 말씀도 많이 들었다. '지금은 에미,에비가 있으니 어떻게든 살지만 우리가 죽고나면 너때문에 형제들도 못살테니..내가 데리고 죽어야겠다..'라는 말씀을.. 초등학교 때부터 엄청 많이 들으며 자랐다. 우린 가난했다. 부모님께서는 열심히 일을 하셨지만 두 분 다 이북이 고향인 피난민으로 뿌리도 없었고, 당시 거의 대부분의 어른들이 그랬듯이 별로 큰 배움이 없었던 부모님들로써는 어쩜 당연한건지도 모르겠다. 인천 부평 신촌.. 지명사전을 찾아보면 그냥 "우범지대" 라고 나와 있었다. 당시엔 동두천이나 파주보다 미군들이 더 많았고 특히 신촌엔 미군중에서도 하나밖에 없는 흑인들로만 구성된 부대까지 있었다. 조그만 다리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양색시촌이었고 한쪽은 창녀촌이었다. 우리집은 양색시촌 안에 있었는데 다른곳으로 이사갈 형편도 못되었었다. 나의 유년시절은 그곳에서 흑인과 백인과..양색시들과..그렇게, 그렇게 알록달록한 색깔로 입혀져, 흘러갔다. 지금도 부모님께 감사하는, 참으로 또 감사드리는 부분이 있다면, 우리집에선 양색시 장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양색시 장사를 하고 부모님이 포주였다면..우린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랬던 내 친구들은 아뭏든 돈도 많았으니까.. 입에 풀칠도 못하는 주제에 딸을 공부시킨다고 욕하던 동네 아줌마(포주)들이 누나가 대학에 들어가니 동네에 플랭카드를 다 걸어주었다. 동네의 자랑이라고.. 신촌은.. 자기딸을 양색시 시켜 미군이랑 결혼해 미국가서 사는게 꿈인..그런..희망없는 동네였었다. 바로 옆동네엔 포항공대 부총장이었고 지금은 공대 방사광가속기 연구소 소장인 백성기교수의 집이 있었다. 그집과는 부모님끼리 고향이 같고 가족 모두가 같은 교회에 다녔고 제일 맏이였던 백교수만 빼고는 밑에 동생들이 모두 우리집 형제들과 동기이었기에 각별하게 지냈다. 내 위에 한 살 차이나는 형이 갑자기 육군사관학교에 간다고 시험을 쳤다. 서울대를 가라고 학교에서 그랬지만 만약 서울대를 떨어진다면 자기는 재수도 못하고 어쩜 동생이 대학에도 못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거다. 당시 난 소년원에서 나와 갑자기 공부를 하겠다고..그핑게로 집에 있었다. 그 공부 잘하고..부평바닥에선 떠르르~~하던 형의 발목을 내가 잡은것이다. 형의 인생을 바뀌게 한 단초를....동생이란 이유로 내가 제공한 것이다. 그후로 세월이 흘렀다. 형은 미국 육군사관학교 교수가 되는 시험에 합격하여 재작년 미국으로 가족과 함께 출국해 살고 있다. 난 차남이지만 부모님을 모시고 있다. 아버님께서는 4년전에 내품에서 돌아가셨다. 날..데리고 가시지도 못하고.. 모시고 있다고 했는데 정확히는..아직도 어머님께서 날 데리고 사시는거다. 한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나와 너무나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형에게.. 난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동생이란 이유로 그의 인생을 바뀌게 했으니까.. 집안에 일은 모두 내가 할테니까 넌 군대일에나 충실해라..라고 말하곤 한다. 아직도 멀었지만 언제 내가 철이 조금이나마 들게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군대가서였지 싶다. 군대가서 이유없이 맞아보니 아팠다. 나한테 예전에 맞고 돈뺐긴 친구들도 이렇게 아팠을까? 차디찬 바람부는 겨울 새벽 보초를 서면서 지금쯤 어머님도 새벽기도를 하시겠지...라며 눈물짓곤 했다. 제대를 하고 다시 공부를 하려했는데 여의치 않았다. 과감하게 때려치우고 2년여간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해서 이곳 포항에 둥지를 틀었다. 서발짜리 막대를 휘둘러도 누구하나 스쳐질 이 없던 이곳에 청바지에 런닝없는 티셔츠 한 장 달랑 입고, 주머니엔 19,000원이 남았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났다. 결혼을 했고 아이를 셋 낳고..이제 40대를 경영하는 중년이 되었다. 지금도 인천에 올라가서 어릴적 친구들집에,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러 가면 그 어른들께는 내말이면 "팥으로 메주를 삶는다" 해도 옳은말로 통한다. 아직도 친구들은 결혼 못한놈이 태반이고 정상적으로 가정을 꾸리며 사는놈이 없으니까.. 여자가 아이를 낳고 병원에서 아이를 놔두고 도망친 그런놈도 있으며 도데체 여자들이 쌀 세말이 떨어지기 전에 도망치곤 한다. 공통점은 재주도 좋지.. 여자 갈아치우길 무슨 내의 갈아입듯 하니.. 배불떼기

어뱅이는 사람이 운명대로 살아간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배불떼기님은 님대로 살아갈 운명이었던 겁니다.
어쩌면 부모님을 가장 가슴아프게 했지만
가장 가까이서 임종을 하신 효자이기도 합니다.

형님의 운명도 어쩌면 님 때문에 더 좋아졌는지
알수 없는 일입니다.

미국 웨스트포인터 교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요.

다만 지금 내가 열심히 살아간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요.

님의 글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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