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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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다이 4

/ 먼저 독고다이3의 과분한 댓글에 답글 못단 점 사과 드립니다. 딴 뜻이야 있겠습니까. 그런 경우엔 답글 달기가 참 난감합니다. 업데이트의 부담 없이, 쓰고 싶을 때 쓰는 가벼움을 즐기고 있었는데, 이런... / 01:00 고양이를 닮은 사내가 캐미불빛을 던지고 있다. 유성처럼 수면에 떨어지는 캐미불빛에 초승달이 조각조각 갈라진다. 이쪽을 잠깐 보는 듯하던 사내가 다시 바위 뒤로 숨는다. 사내의 은밀함 덕분일까. 놈에게 겁탈당해 조각났던 평상심이 서서히 합체되고 있다. 놈을 기필코 잡기 원하는가, 하고 내게 물어본다. 글쎄, 꼭 그렇지는 않다. 결국, 실패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기다리는가, 하고 내게 재차 물어본다. 그것은 바로 송곳 같은 자극이다. 놈이 남긴 찰나의 전율은 굳어가던 내 뇌막 어디쯤을 날카롭게 찔렀다. 잠복했던 내 욕망이 우후죽순처럼 삐죽, 고개를 내밀고있다. 가히 새롭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녹슬어가고 있었다. 아이폰 메모장엔 이렇게 적혀있다. / 이 물렁한 해파리가 나노입자까지 감지하던 내 더듬이인가. 이 노회한 구렁이가 한때 좆같은 세상에 고개 빳빳이 쳐들던 독사 새끼인가? 나는 오늘도 노회를 초연인 척 위장했고 퇴행을 유치찬란으로 조작했다. 극좌? 무정부주의자? 이젠 존재가 의식을 결정하는지,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지도 헷갈린다. 아아, 나는 마침내 죽은 좆이 된 것일까. 음습한 골방에서 추억의 젖가슴이나 희롱하며 발기를 꿈꾸는 나는야 비루한 에고이스트! - 피터 / 나는 하루하루 살아내는 게 아니라 살아가고 있었다. 달팽이의 속도로. 느릿느릿.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놈에게 겁탈당한 후, 내 뇌막 어디쯤 욕망의 주름살 계곡에 바람이 지나갔다. 죽었던 좆이 발기하고 있다(비유법인 거, 알지?). 나는 가슴을 갈라 '작은 칼' 하나를 꺼낸 후, 두껍게 녹슨 칼날을 만져본다. / 작은 칼의 유래입니다. 스무 살 때의 글입니다. <칼> 칼을 하나 가지고 싶다 호주머니나 마음속에 은밀히 숨는 키가 한 뼘 정도로 작은놈이면 좋겠다 결심한 발도(發刀)의 순간에 미끌림 없는 오래되어 편안한 양가죽 손잡이면 더 좋겠다 사슬과 그물과 얽힌 관계를 일도양단할 시퍼런 독기가 흐르는 칼날이면 참 좋겠다 나는 지금 전설의 파천지공이 적힌 비급과 저주받은 마도 한 자루를 사러 늦은 오후 청계천 도깨비시장에 간다 - 피터 / 나는 녹슨 칼을 손에 들고 회심의 비기를 시전한다. 열일곱 살에 창안한 일명 '타자의 눈'이다(자세한 설명은 추후 자게방에 공개하겠다.). 나는 내 의식을 허공에 띄우고, 나와 내 주변을 본다. 내 의식은 조금 더 상승하여 나와 내 주변을 본다. 내 의식은 점차적으로 상승하며 나와 내 주변을 본다. 내 의식은 우주에 앉아 나를 객관화한다. 내 의식은 타자의 눈으로 모호했던 것들의 실체와 내가 있어야 할 좌표를 재설정한다. 내 의식은 우주에 앉아, 모든 비극이 결국 희극으로 흡수되는 걸 본다. 내 의식은 땅으로 내려와 내 몸과 어깨동무를 한다. 내 절망과 희망이 정전협정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21세기를 함께할 동반자관계를 설정한다. 어때? 은둔을 접고 다시 서림(書林)으로 나가볼까? 건너편 고양이에게 전화가 온듯하다. 낮은 목소리가 꽤 조심스럽다. 캔 커피 두 개를 들고 고양이에게 간다. 바위 뒤 의자에 앉은 고양이가 눈짓으로 인사한다. 고양이의 통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몸을 돌린다. 그가 만든 삼성 뒤에 내가 만든 북두칠성이 보인다. - 어, 그래. 그 양반, 지금 옆에 있다. - 어. 어, 잠깐만. - 자칭 공명이유? 핸드폰 불빛이 그의 얼굴에 스친다. 고양이가 아니다. 옅은 쌍커플에 똥개처럼 달관한 얼굴이다(자게방 소풍, 보고 있나?). - 네, 공명입니다. 혹시... 유비십니까? 그의 얼굴이 찌그러진다. 소리 없이, 하회탈처럼 웃고 있는 것이다. - 술 좋아하우? - 잘은 못해도 즐깁니다. - 어, 들었제? 그래, 천천히 온나. 유비가 전화를 끊고 악수를 청한다. 곰처럼 두꺼운 손이다. 사춘기 때, 스스로 위로할 때 꽤나 힘들었겠다(미리내, 보고 있나?). - 처음 뵙습니다. - 반갑소. 그런데, 아까 졸았수? 찌가 솟아도 챔질을 않더만. - 아, 공중부양 좀 했습니다. - 클클, 졸았구마~ - 아, 네. 타자의 눈이라고... - 됐고, 아까 놈에게 털렸다던데, 어땠수? 이씨, 졸은 게 아니고 타자의 눈이었는데... - 복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은 못 봤구요, 끌려갈 뻔했습니다. - 허허, 그 느낌 내가 잘 알지. - 그런데 말입니다... - 뜸 들이지 말고, 말씀하시우. - 제 찌는 왜 안 주십니까? - 본인 꺼라는 증거 있수? - 찌에 '피터'라고 적혀있습니다만. - 본인이 피터라는 증거 있수? - 유비답지 않게 엄청 쩨쩨하십니다. - 내가 유비라는 증거 있수? - 끙... 졌습니다. 그 찌, 일타두수님 작품이라서... - 엉? 그 유명한 일타두수님 꺼라고? - 아 진짜, 제 꺼라니까요~ 달빛 아래, 도란단란 흥겨운 중에 나는 속으로 글 한 편을 쓰고 있다. 면도날처럼 예리하고 위험한 내 더듬이가 기지개를 하고 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내 욕망이 꿈틀거린다. 참으로 오랜만에 웃고 있다. 실없이 헤헤... / 독고다이 5편에 장비와 관우, 그리고 놈을 부르겠습니다. 아, 업데이트의 부담은 정말 싫은데, 차 안에서 후다닥 한 편 썼네요. 우째, 갈수록 재미가 없는 것 같아요. 밑글은 제가 단편적으로 뱉었던 단어들의 조합입니다. 벌써 10년이 넘은 글이네요. / <시간의 손바닥> 그것은 계획되거나 실험되지 않은 듯하다. 그것의 존재는 모호해서 나는 그것의 실체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것은 나를 간섭하지는 않는 듯한데, 나는 나의 행위나 인식, 내 개인의 역사까지 모두를 그것에게 저당 잡힌 기분이다. 내가 그것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의 가차 없음과 나의 무력함을 고백한다면, 내가 우주의 고아이며 우연의 산물이며 태어나는 순간 소멸하고 있다는, 그런 나의 절망적인 주절거림이 '이유 있음'이 될까? 실패하고 말겠지만 나는 그것의 막막함과 비정함을 말하고 싶다. 나타나는 순간 사라지는 것, 현재인 순간 과거인 것, 모든 것의 놀이 자체(le jeu meme), 실존적 불가사의(mystere), 냉정함과 무심함의 난폭자... 나는 시간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과학에 의해 측정할 수 있는 양화 된 순수시간(temps pur)을 '객관적 시간'이라 정의한다... 사물이 펼치는 동질적 장소로서의 역할을 한다.] 인터넷에서 찾아낸 말인데, 나는 이런 사회적인 해석은 관심 없다. 나는 나와 시간과의 관계, 즉 '주관적 시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질적이면서도 이질적인 그것은 나의 '지속의 내재적 감정'이기 때문에. 나는, 내가 아무리 순환성(윤회)과 영원을 다짐한들 시간의 비가역성(되돌릴 수 없음)과 죽음의 내재성이나 나의 유한성, 내 존재의 우발성(accident)을 부정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따라서 나는 종교의 '영원에로의 회귀'를 빌려서까지 죽음에 대해(저 절대적 난폭자인 시간에 대해) 저항해보길 포기한다. [과거는 치료할 수 없는 영역이고 미래는 죽음의 전망일 뿐이며, 현재는 다른 순간들의 연속에서 체험된 한 순간이다.] 누군가가 했던 이 말에 동의하는가? 그런 게 아니라고 나에게 말하고 싶은가? 종교의 추종적 믿음(폄하하는 게 아님.) 말고, 그대의 치열한 사유의 결과로 나를 가르쳐 달라. 지금 태어난 아기와 지금 생산된 이기는, 지금 피어난 꽃들과 지금 약속한 영원의 사랑은 저 가차 없는 시간의 손바닥, 그 주름살 계곡 속에서 늙어가고 녹슬고 시들고 희미해지다 사라질 뿐이다. 이것이 '망각'이란 시간의 속성이다. 영원을 약속하고 영원을 갈망하는 그대, 부정하고 싶겠지만, 영원은 없다. 이것은 우리가 사용할 단어가 아니다. 오직 저 시간의 신, 크로노스만의 언어인 것이다. 시간은 언제나 내게 망각을 주사하고 나는 무력해지지만, 나는 완전하게 시간 앞에 무릎을 꿇지는 않는다. 내 육신의 썩어감은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언제나 추억함으로써 시간의 맹점인 망각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시간의 맹점인 망각은 일정 부분 과거의 고통에서 나를 해방시키지만 그것은 완전한 해방이 아니라 회피이므로.) 그래서 추억은 내게 있어서 잊지 않기 위한 슬픈 행위이며 시간에 대한 치열한 반항인 것이다. 나는, 시간은 '흐른다.'라는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데,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게 아니라 나타나는 순간 소멸하는 것이다. 즉, 낙엽처럼, 떨어져 쌓이는 것뿐이다. 내 삶의 뜨락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의 이파리 한 장이 떨어져 쌓이고 있다. 어제의 낙엽들은 벌써 썩고 있지만, 35년 전의 꼬마가 본 파란 하늘이랑 17살의 첫사랑, 25살에 떠난 아버지랑 누구누구에 대한 그리움 몇 개는 썩지 않고 굳어져 시간의 화석이 된다. 나는 때때로 외로울 때면 그 시간의 화석들을 캐내곤 하는데, 뽀얗게 쌓인 세월의 먼지를 불어내다 콜록콜록 기침도 하고, 그러다 가끔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날의 풍경으로 인해 눈물도 지어보곤 한다. 추억이 나를 토닥이는 것이다. '시간을 의식한다는 것은 정신이 시간성을 초월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반성과 이성의 차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합리론자들의 관점인데, 나는 이 말에서 '과거로부터는 현재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교훈을, 시간의 가차 없음과 그것에 대한 내 무력감으로부터는 자유를 발견할 수도 있다.'라는 희망을 조작한다. 이 모든 것이 비록 시간의 손바닥 위에서 일지라도 말이다. ㅡ 2000. 피터.

편한 마음으로 천천히 음미 했습니다.
앞으로도 멋진글 기대하며 8일날이 기다려지는 1인 입니다.
그리움속에 한세월 잘 살았어요,,ㅎㅎ
ㅋㅋㅋㅋ
추천..쾅

너무 감사합니다
5편은 8일날 쇠주한잔하믄서 듣겠읍니다
몇번을 읽었는데도
정확한 느낌을 잡지 못해 댓글 달기가 망설여졌습니다.

시간만 화석이 되는게 아니라 제 가슴팍도 굳어져 가는 모양 입니다.
아니 머리인가?

1편 부터 다시 보면서 피터님 여행을
헐떡이며 쫓아 가 보겠습니다.

유비,장비 그놈의 5편도 기다립니다.
사람들이 가진 시간의 시작과 끝을 계산해가면서 살아간다면

삶이 너무 허무하지 않을까요?

영원은 처음 태어나서부터 삶이 다하는날까지 항상 사람의 마음속에 간직되어있는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기도합니다.

피터삼님의 더듬이를 조금만 둔화 시키면 좀더 행복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손댄김에 오늘 댓글을 여기에 또 달게 됩니다.
피터님!
너무 어렵사옵니다.

세상과 단절된 사랑을 하시려니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아닌가??
시간이 되면 다시 정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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