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이나 방송은 온통 추위와 호남지방의 폭설소식이다.
대구도 오전에 눈발이 날리다가 오후에 개이더니 빗방울을 뿌렸다.
퇴근길은 영하로 기온이 내려가 인도는 온통 빙판길이다.
신천의 차가운 겨울 칼바람이 코트 깃을 훑고 지나간다.
머플러를 여미며 걸음을 재촉했다.
추위를 피하고자 하는 마음은 급하지만 빙판길로 인해 귀가 시간이 지연되었다.
오늘은 집까지의 거리가 평소보다 더 먼 것 같은 느낌이다.
게을러 서랍 속에 도착순으로 방치해둔 올해의 우표를 꺼내, 새해가 도래하기 전에 마운트에 넣어 정리를 해야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선뜻 시작하기가 어려웠다.
오늘은 작심을 하고 귀가를 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아내가 나와 문을 열어 주며
“많이 춥지요.”
“응, 애들은?”
경상도 남자가 습관적으로 한다며 웃던 말을, 나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트를 받아 든 아내는 아이들의 행선지와 귀가 예정시간을 이야기했다.
책상위에 몇 개의 우편물이 놓여 있었다.
한통의 봉함엽서를 먼저 들었다.
친구 K의 내외 이름이 동시에 적혀 있는 결혼식 청첩장이었다.
개봉을 하니 사위를 본다는 내용이었다.
다음 주에는 예식장 볼일이 같은 시간에 두 개가 겹쳐진다.
저녁 밥상을 차리던 아내가 말을 붙였다.
“○○○씨는 버섯 보내주시는 친구분 아니에요?”
“응, 맞아. 다음 주 일요일에 딸을 시집보낸다고 하네.”
“그럼, 작은 고모 댁 손자며느리 보는 시간하고 겹쳐지는 것 아니에요?”
“응, 겹쳐지네. 당신은 친정잔치 가고 나는 친구 잔치 가야겠다 .”
친구 K의 얼굴과 작년에 농장의 옹당이 못에서 낚시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친구는 몇 십 년 전의 코흘리개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이 가정환경 조사하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잔잔하게 이야기를 했다.
“너는 참 어른스러웠어. 지금도 가끔 그때 일이 떠올라. 내 생애에 있어서 가방 끈은 짧지만 참 교육은 그것이었고, 그로 인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추구해온 내 삶의 목표가 굳어졌던 것 같아.”
한참을 지난 옛날의 그 상황들이 친구의 가슴에는 아물지 않은 상처로, 아직도 아픈 화살로 꽂혀 있다는 생각을 했다.
둘이서 오랜만에 나눈 한잔 술의 취기와 찌의 몸통을 끝까지 밀어 올리는 황금색 토종붕어 입질의 재미에 빠져 동심으로 돌아가 있었다.
올해는 한번 만나지도 못하고 몇 차례 전화 통화만 했던 기억이 난다.
택배로 보내온 버섯만 얻어먹고 답례도 없이 전화통만 잡고 나눈 서로 간의 안부전화가 고작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내가 무심했던 것 같았다.
나이를 먹고 세파에 시달려도 변치 않고 우직한 바위 같은 사내이다.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세상에도 땀의 소중함을 알고 앞만 보고 걸어가는 친구의 모습이 새삼 떠올랐다.
시골집 디딜방아 곁에 달린 스피크를 통해 혁명공약이 방송되던 시절이었다.
비포장 신작로에는 하루에 몇 차례 뽀얀 먼지를 날리며 읍내로 나가는 버스가 지나갔다.
그게 산골마을의 유일한 교통수단이고, 몇 십리는 보통 걸어다녔다.
당시 한 학년이 3개 반으로 편성되었고 시골의 가정 형편은 모두가 대동소이 했다.
친구들의 집안 형편은 손바닥 보듯이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신학기가 시작되면 반 편성을 새로 하고, 담임선생님은 반 아이들의 가정환경조사서를 작성했었다.
지금 생각하니 교육에 있어서 그게 뭐 그리 중요한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학생들 개개인의
학습 환경조건 파악이 집에 있는 가재도구나 부모님의 직업 등을 조사한 것 같았다.
아버지가 면서기, 우체국 직원, 제재소 운영, 문방구 운영 등을 하실 경우 아이들이 친구들에게 으시대던 기억이 났다.
그 다음은 농촌이라 대다수가 농업이었다.
K의 아버지는 동네에서 사과 밭을 하던 5학년 선배 집에 머슴살이를 했고, 어머니는 동네 초상이 나거나 잔치 등을 할 때 부엌일을 도맡아 하거나 남의 농사일을 돕곤 했다.
타지에서 이사를 와서 마을에 개인의 토지와 친척이 없는 유일한 집이었다.
부모님 직업이 농업인 사람이 손을 들 차례였는데 K도 손을 들었다.
옆자리 짝이었던 친구가 K의 손을 당겨 내리며
“야, 이 자식아 너네 아버지는 직업이 농업이 아니고 머슴이잖아.”
K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때 내가 손을 당겨 내리는 그 친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너 끝나고 죽을래. 농사일 하면 모두 농업 아니가?”
옆구리를 찔린 친구는 움찔하고는 내 성난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부모님의 직업조사가 끝난 후 다음에는 소유 물건들의 목록을 선생님께서 호명하고 있었다.
“라디오 집에 있는 사람?”
손을 드는 아이들은 주위를 살피며 당당해 하는 분위기였다.
친구 K가 손을 들지 않기에 앞에 앉은 녀석의 옆구리를 내가 찌르며 무조건 손을 들길 강요했다.
친구 K도 눈을 내리깔고 손을 엉거주춤 들고 있었다.
스피커, 시계, 자전거, 재봉틀이 끝나고 다음은 전화기였다.
아버지가 우체국 직원인 명권이가 자랑스럽게 손을 들었고, 이 녀석은 주눅이 들어 선별을 하지 않고 마구 들다가 이번에도 손을 들고 말았다.
반 아이들의 눈초리가 이 친구에게 집중되었다.
그 순간 명권이가 큰소리로 말을 했다.
“선생님요! 전화기는 우리 반에는 우리 집하고, 3반에 원식이 집밖에 없어요.”
선생님은 교탁에서 얼굴을 숙여 조사내용을 적으며 답변은 그냥 간단했다.
“응, 알았어.”
명권이는 무엇이 분한지 뒤돌아보며 식식거리는 걸 내가 인상을 쓰며 눈길을 맞추었다.
흰머리에 나이가 들은 지금까지 K는 가정환경조사를 하던 코흘리개 시절의 잔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요즘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하면 통하지 않겠지만, 당시 고구마나 감자는 산골마을의 주식과 간식이었다.
할아버지를 뵙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이 간혹 들고 오는 사탕이 내게는 대단했던 특식이었다.
당시 농촌은 보릿고개가 있었지만 그게 보릿고개였다는 걸 안 건 머리가 굵어진 뒤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동창생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K는 가정형편상 진학을 하지 못했다.
중학교 진학 후 첫 여름 방학 때 그의 가족들이 이사를 간 소식을 들었다.
그 후 친구의 소식은 두절되었다.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모두들 살아가기 바쁜 현실의 핑계 아닌 핑계로 동창회를 통해 나오는 친구들의 얼굴은 보고, 못 나오는 친구들의 소식은 입소문을 통해 듣고 있었다.
하지만 K의 소식은 묘연했고, 유소년 시절에 만난 아릿한 추억 속에 시골 소년의 모습으로 정지된 채 나의 기억 속에 맴돌고 있었다.
그해 겨울도 무척 추운 날씨였던 것 같았다.
연말 모임에 갔다가 늦게 귀가를 했었다.
아내가 뜬금없이 잊고 지내던 그 친구의 이름을 거론했다.
소포박스가 도착해 있었다.
박스의 내용물은 건조된 표고버섯이었고, 발신자의 이름이 “○○농산” 대표 그 친구의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놀라움에 박스의 발신자 이름과 전화번호를 확인한 후, 기억 저 너머에 정지된 친구의 얼굴을 연상하며 늦은 시간임에도 전화를 걸었다.
취기가 한풀 꺾인 상태에서 살아온 이야기와 가정사 이야기를 나누었다.
초등학교 동창회 모임에 난생 처음 참석을 했는데 나를 못 만나 섭섭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곰곰이 생각하니 그해 여름은 출장으로 해외에 머문 시간이었다.
매년 광복절에 하는 동창회이지만 개인 사정으로 서로의 만남이 비켜간 걸 알았다.
동창회 명부의 주소를 보고 마음이 가서 버섯을 보냈다고 했다.
그 후 지금까지 주위의 친인척이나 지인들에게 그 친구의 버섯을 소개했다.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유년으로 떠난 옹당이 못의 추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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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을 넣어 드립니다.... ^^
점심 식사 후 담배 한 대를 물고 듣는 음악이 좋습니다.
압독님 고맙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