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엔 아직 추위가 가시진 않았지만
낮엔 따사로운 햇살이 퍼져
한없이 아늑하고 편안했다.
도심속 천변 억새풀밭이라 차량들 소음이
시끄럽게 들려왔지만
머리속엔 한소절의 멜로디가
끊임없이 반복되어 차량들의 소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띠리리리 띠리리
이브와 함께 보았던 올드보이 ost, 더 라스트 왈츠의
한 소절이 고장난 녹음기처럼 머리속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도심속에 구축된 섬.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는 천변 가까이 우거진 키큰 억새풀 속에 억새를 밟아 눕힌 두어평 공간에서
세상과 완전히 고립된채 나는 더 라스트 왈츠의
한소절을 끊임없이 되네이고 있었다.
그곳은 열린 억새풀 위로 보이는 파란하늘과
물가쪽 듬성한 얽새 사이로 보이는 강물,
그리고 멀리 성채처럼 자리잡은 타워팰리스의
웅장한 모습이 억새 넘어로 보일 뿐이었다.
서울이라는 도심속에 이렇게 철저히 고립된채
네번의 밤과 다섯번의 낮을 보냈다.
번화한 도심속. 고층건물이 빼곡히 밀집되고
끊임없이 차와 사람들이 오가는 문명의 한 복판에
이렇게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한발한발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렸다.
한동안 괴롭히던 배고픔이라는 감각도 느껴
지지 않았다. 오일동안 물한모금 마시지 않고
보낸 다섯번의 낮과 네번의 밤.
긴 시간이었지만 생각이란 것도 별로 없었다.
세상과 분리된 듯
스크린 넘어로 세상을 보듯
그냥 지나쳐 가는 어둠과 빛을 스쳐볼 뿐이었다.
살아왔던 과거와 현재, 그 속에 얽혀 있는
모든 책임과 의무, 지켜줘야할 존재들,
그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들
한때 머리속을 무질서한 소음처럼 머리속을
가득 채우던 그 생각이라는 것이 사라져 버리고
그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봤다.
바람에 억새가 흔들리고, 하늘엔 구름이 흘러가고,
억새 사이로 보이는 강물엔 햇살이 반짝이고
해가지면 강변을 따라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멀리 타워팰리스엔 하나둘 불이 켜지고
또 하나둘 불이 꺼지고....
보여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뿐
그것에 연관된 생각이나 파생되어
확장되는 생각 따위도 없었다.
그저 세상엔 비어버린 나와 나와는 아무런 연결고리를 갖지 못하는 주변이 있었다.
올드보이를 보며 이브는 리모컨을 갖고 싶다고 했다
버튼을 누르면 심장이 멎어 버리는 리모컨을...
이브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말에 놀라 쳐다보니
눈이 촉촉히 젖어 있었다.
"할머니가 너무 아파하며 죽어서...."
이브는 죽음이라는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을까?
그저 죽음이란 리모컨을 누르면
브라운관 화면이 꺼지듯 그렇게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죽음이 두려웠을까?
아니면 두려움이 없었을까?
어차피 죽음의 고통은 피할수 없는 일이다.
궁금한건 죽음을 선택할때 두려움이 있었는지
숨이 막혀오는 고통속에서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는지 이것이 궁금할 뿐이다.
그러지 않았길 간절히 빌 뿐이다.
이브여! 지금 그 리모컨을 갖고 싶다.
ㅡ 오랫만에 쓰려니 어렵네요.
어렵게 다시 시작해 봅니다.
인지의 열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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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어요~^^
오지는 필력이십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