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많은 만남과 많은 이야기와 다시오지 않겠다고 다짐이 있었던 그 소류지에
나는 또 앉아 있었다.
내 감정을 껴맞출 공간이 없다는 걸 알면서
그곳에 내가 머물러선 않된다는 걸 알면서 몽유병자처럼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곳에 향해 가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그녀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두 번의 만남뿐인 그녀가 내 마음속에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 버린 것인지,
내가 얼마나 그녀에게 깊이 빠져버렸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서,
여기 사연 많은 소류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한 순간부터
내가 그녀를 얼마나 절실히 원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너무 깊이 각인되어버린 그녀의 얼굴이 한순간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그녀의 얼굴과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던 그녀의 체취와
그 뜨거웠던 입맟춤이 생생하게 떠오르곤 했다.
이래선 안된다고, 이건 나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고
내 자신을 수도 없이 질타했지만 열병을 앓는 아이처럼 가슴 깊은 곳에서 품어져 나오는 열기에
잠드는 것도 숨쉬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나는 수시로
감미로운 환상에 젖어들곤 했다.
회사 일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몽롱한 환상에 사로잡혀
넋을 놓아버리기 일수였다.
갑자기 변해버린 내 자신에 대해 덜컥 겁이 났다.
그녀에 대한 환상에서 빠져나오려 내 자신에게 끊임없이 현실을 인식시키고,
끊임없이 내 자신을 설득하고, 내 자신과 끊임없는 약속들을 해 댔지만
그 모든 것들은 의식의 문제였고, 무의식의 영역속에선 끈임없이 그녀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가슴에 두 개의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일주일 내내 내게 던지 화두는 하나였다.
‘하나의 가슴에 두 개의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끊임없이 내 자신에게 되묻고 있었다.
이건 욕정일 뿐이라고 내 자신을 합리화 하려했다.
이건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닌 한여인을 통해 내 욕정을 풀고자 하는
남자의 본능일 뿐이라고 내 자신을 설득했다.
나는 구체적인 현실속의 존재가 아닌 내 가슴에 만들어진
그녀의 허상을 쫒고 있는 것이라고,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알지 못함으로 인해 만들어진 그녀의 신비감에
도취 되어 버린 것 뿐이라고 끊임없이 호소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내가 그녀를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점점 더 깊에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식지 않은 감정을 그대로 가진 채 그녀와의 이야기가 끝나버린다면
결국 미화된 기억과 우상화된 그녀의 영상이 영원히 나를 괴롭힐 것 같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됐을 때
나는 그녀를 부정하는 걸 포기했다.
만약, 후회만이 남게 되더라도 갈수 있는 곳까지는 가보고 끝을 내야겠다는 결정을 했다.
후회와 실망만이 남게 되더라도 일부러 가슴에 이는 감정을 억누르지 않는 편이
오히려 그녀에게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녀에게서 온전히 벗어나는 방법은 그녀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고
실망스런 현실적 모습을 발견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살아오는 동안 맺어진 숫한 인연들
동성이던 이성이던 상대에 대한 환상으로 시작되었던 만남은
환상의 붕괴와 실망, 익숙해짐과 상대에 대한 이해로 지속되어지는 것이다.
나는 환상이 붕괴되지 않은 시점에서의 갑작스러운 이별이
얼마나 오랫동안 가슴속에 남아 자신을 괴롭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잊혀지기 보다 미화되어지고 더 간절해지는 환상들....
나는 그녀가 이런 환상으로 존재하게 된다면 감당하기 힘든 크기로 존재하게 될 것이 두려웠다.
‘깨어지지 않는 환상이 있던가?
아직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폐쇄적 신비감과 내 스스로의 과대망상으로
만들었던 환상이 깨어지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그녀 또한 아직 깨어지지 않은 환상일 뿐이다.
많이 보게 되면 깨어질....,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깨어질....,
시간이 지속돼면 깨어질 환상일 뿐이다.‘
나는 내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두근 거리는 가슴은
내 마음속에 또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번만은 영원히 깨어지질 않을 환상을 내가 꿈꾸고 있다는 걸.....
소류지의 밤은 쓸쓸히 찾아 왔다.
왠지 모를 서글픔과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언제나 소류지에 도착하면 환한 미소로 반겨주던 강노인은 그녀의 등장
이후 한번도 보질 못했다.
강노인과 김노인과 함께 몇잔의 술을 들이키며 맞이하던
어둠이 갑자기 떠올려졌다.
그 소란스러움과 활기참이 먼 이야기처럼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예전 같은 그런 날이 다시는 와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무도 찾아주는 않는 밤을 홀로 지세울 일이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여전히 자리엔 보조의자를 펼쳐 놓았다.
낚시대 세팅을 끝내자 마자 사가지고 온 술과 마련해온 안주와 잔을
보조의자와 낚시텐트 사이에 펼쳐 놓았지만 아무도 와주질 않았다.
웬지 그녀도 오늘밤에 오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소류지가 어둠에 완전히 잠길 때까지 기다리던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처럼 불안한 감정들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때 오토바이 엔지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얼마나 반갑던지 나는 벌떡 일어나 그를 반겼다.
그는 스쿠터를 내차 옆에 나란히 세우고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김노인의 얼굴은 밝았다.
지난주 일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예전 같이 밝은 미소를 띄우며
내게 다가왔다.
“혼자 적적할까봐 왔네.”
김노인이 평소의 밝은 어투로 말을 던졌다.
“잘 오셨어요. 근데 술생각이 나서 오신건 아니구요.”
나도 지난주의 일이 대수롭지 않은 듯 밝은 목소리로 그를 반겼다.
“내가 말했쟎어, 자네 한테 얻어 묵는 공짜술이 젤 맛있다구.”
“언제는 기집이 따라주는 술이 젤 맛있다며요.”
“그건 그라제. 허허허.”
그는 내가 따라주는 술을 받으며 호탕한 웃음을 웃었다.
그의 웃음은 연륜에서 묻어나오는 깊이가 느껴졌다.
슬픔을 가슴에 묻고 살아온 사람,
김노인이 평소에 내가 쉽게 알아오던 사람이 아닌 큰 사람처럼 느껴졌다.
몇잔의 술이 비워지고 주고받던 가벼운 이야기들이 시들해질 무렵
나는 김노인에게 이야기 꺼냈다.
“근데, 어르신.....”‘
그에게 더 들어야 할 말이 있었지만,
더 이상 그에게 그때 일을 떠올리게 해선 않된다는 생각이 들어 물음을 중단했다.
“뭔디, 말을 하다 말어....”
그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픽하고 웃었다.
“궁금하제? 처음부터 안들었으면 몰라도 듣다가 말었응께 궁금하기도
할 것이여.“
김노인의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말이란게 참 묘한 것이여. 가슴속에 담아 놓기가 힘들지 한번 내어 놓으면
그렇게 쉬울 수가 없거든.... 내 다 이야기 해줄텐께. 술이나 가득 따라봐.“
그는 장난스럽기까지 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술잔을 내밀었다.
그는 가득 채워준 술잔에 입도 대지 않은채 가만히 수면을 주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큰 감정이 실지지 않은 애잔한 그리움이 흘렀다.
과거란 아무리 아픈 기억도 돌이켜보면 잔잔한 그리움 뿐이라는 듯이...
“내가 미영한테 죄를 지었어....,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
하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그게 잘못됐는지 잘 모르것어.“
그는 비우지 않은 술잔을 바닦에 내려 놓고는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내가 왜 이야기 해주는지 모르지?
아직도 나는 뭐가 잘못 된건지 모르것어.
자네가 좀 말좀해 줘.
당췌 내가 구식이라 그런가.
어찌 보면 잘못한 거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그게 맞았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묵묵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혹시 지난번처럼 감정이 폭발할까 싶은 우려를 했지만
의외로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서울서 내려온 미영이 엄니하고 나하고 영한이 아부지하고 셋이 만났어.
그 자리서 강영감이 미영이 엄니한테 말했어.
‘어차피 둘이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같이 어릴때부터 커온 사인디 뭔 흉이 있것소.
둘이 짝을 지어줍시다. 둘이 짝을 짖지 못하믄 동네챙피해서
미영이네든 우리든 여그서 살수가 없을건께....
내 아들이지만 영한이... 어릴때부터 봐왔응께.
미영이 엄니도 영한이 다 알쟎아요.‘
미영이 엄니도 영한이를 미영이 짝으로 생각하고 있던터라 그러자고 했어.
그래서 서로 혼인날짜까지 그 자리서 받아 브렀제.....
길게 끌믄 동네에 말난다구 한달 뒨가로 날짜를 잡았어.
그땐 모든게 다 해결될줄 알았어.
......
나는 속으로 둘이 짝을 지으믄 잘된일이다 하고 기쁘기까지 하더구만
마치 내자식들 시집장가 보내는 것처럼 좋았어.“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속으로 그렇게 일이 마무리되는 것이 최선인 것 처럼 보였다.
아무리 사랑이 감정의 문제이긴 해도 똑같은 경험을 해본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녀가 사랑하던 남자가 있더라도 영한이와 결혼하는 것이 최선인 것 처럼 보였다.
“미영이가 거부했나요?”
그는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술을 단숨에 들이키더니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뭔 얼어죽을 사랑이여. 사람들 가심을 이리 갈갈리 찢어 놓고....
얼매나 좋아, 둘이 맺어져서 오순도순 살믄 얼마나 좋아....
다 알고 있는 처지에 시집살이를 시키것어. 구박을 하것어.
그냥 어른들이 시키는데로 그렇게 혼례를 치르믄 얼마나 좋아?
.......
근디 죽어도 싫테,...
삼일을 미영이 엄니하고 나하고 달래고 설득해도 죽어도 싫테....
미영이 엄니가 죽어버린다구 해도 싫테....“
나는 갑자기 그녀가 고등학교때부터 사귀었다는 그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미영씨가 서울 그 사람을 많이 사랑했나 보죠.”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 몸을 해갔고 그 사람하고 결혼 할거냐고,
그게 니 소원이냐고 엄니가 물었어.
근께 미영이가 그사람 한테도 갈수 없다고,
근디 절대 영한이 오빠하고는 결혼 할 수 없다고
세상 다른 사람 다하고는 결혼해도 영환이하고 결혼할수 없다고 했댜.
도대체 뭔 속인 줄을 모르것어.“
나는 답답한 마음에 술을 한잔 들이켰다.
그녀가 느꼈을 감정들이 알듯말듯 머릿속을 헤집고 다녓지만,
명쾌히 표현되질 못했다.
친오빠로 인식되어진 오랜 시간에 따른 관념?
동물적 본성으로 자신을 덮쳐 들던 영한에 대한 상실감?
사랑이 아닌 강압으로 맺어지는 관계의 회의감?
여러 가지 것들이 머릿속을 떠돌지만,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이와는 별개의 다른 것이라는 느낌이 나를 괴롭혔다.
잡힐듯 잡힐듯 잡히지 않는 느낌을 찾아내려 애쓰고 있을때
갑자기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마치 막 잡으려던 해답을 놓쳐버린듯한 짜증이 일었다.
핸드폰에는 낯선 번호가 찍혀 있었다.
무심코 메시지를 열어보는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그가 있나요?’
짤막한 메시지는 그녀가 보낸 문자였다.
그녀의 번호를 일부러 저장해 놓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짧게 ‘아니오.’라고 회신했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오늘밤 이렇게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는 희열이 가슴속에 밀려들었다.
p.s 진작 제풀에 지쳐 3부쯤 쓰다 포기했을 글을
휀님들의 관심과 댓글독려에 힘을 얻어 13부까지 왔네요.
감사드립니다. 쭈욱 가보겠습니다.
저수지의 그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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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47
잘 보고 갑니다...다음편 기대 합니다.
이제는 정독하며 붕어우리님 글을 찬찬히 음미하며 읽어내려 갈렵니다.
항상 잘보고 갑니다. ^^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잘보고 있습니다 화이팅요
아~~ 일도 안되고 미쳐부러~~^^
담편 기대만땅 입니다~~
무지 기다려집니다 ㅎㅎ
천만 다행이네요.
한동안은 종편 걱정하지않고 열심히
보겠습니다...
붕어우리님 싸랑 함미데이~~~~~~~~~~
좋은 글에 감사드리며 응원합니다 ㅋㅋ
이러다가 붕어우리님 팬클럽 생길거같아요~~
비판도 아니고 비평도 아니고 붕어우리님의 글에 깊이 빠져서 한번 되세겨 봤어요,,,,
기다리는 1인 입니다. 내일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생각납니다^^
좋습니다
마른침 넘어갑니다^^
담편 기대 기대^^*
시청료를 내야 헙니다
흠흠 ..
김작가님에게 부탁해서 얼름 벗기라고 압력 널수 있슴다
솔찮은 얘기로 쭉~ 가봅시다..ㅎㅎ
고맙습니다
또 궁금 궁금이네염!
자꾸만 빠져 들게 합니다.
의지하고 있습니다 마의 종영 얼마
안남았는데 저수지 그녀 장편으로
가신다니 행복합니다 ^^ 수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우
재미만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