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는 운명
나는 평상심을 찾기 위해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케미컬 라이트를 꺾었다. 케미컬 라이트를 찌에 꽃아
첫 번째 낚싯대를 투척했다. 케미컬 라이트가 밝은 빛으로 빛나며 서서히 수면으로 침강해 갔다. 그
때 또다시 이유를 알 수 없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멀리서 환청처럼 자동차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의 박동은 그 강도를
더해 갔다. 금방이라도 저 둔덕을 넘어 그녀의 폭스바겐 자동차가 나타날 것만 같은 조바심이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그 심장의 두근거림은 내가 앞으로 겪게 될 이별의 고통이 어떠한 것이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에 그녀가 내게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에 이렇게 가슴이 요동치는
삶을 앞으로도 살아가야 한다는 걸 말해주었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제방 길을 택시가 넘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폭스바겐이 아닌 것을 확인하고 나니 마음속에 상실감이 일며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그 택시는 제방을 올라오더니 잠시 소류지의 트인 곳에 멈춰 섰다. 택시기사가 쉬는 날 낚시를 온
것인 모양이었다. 그는 지금 저수지 제방 길에 차를 세우고 하룻밤 밤낚시를 하게 될 저수지의
포인트와 풍광을 살펴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동치는 심장은 그게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 택시 안에는 그녀의 향기로 가득 차
있을 거라고, 뜻밖의 나를 발견하고 당황스러움에 잠시 망설이는 그녀가 타고 있을 거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고 근거도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그 차 안에
타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너무나 심한 심장의 박동에 현기증이 느껴졌다.
한참을 그대로 서 있던 택시가 서서히 미루나무 쪽을 향해 움직였다. 미루나무 아래 주차 공간
가까이 다가오던 택시가 그곳에 멈춰 섰다.
‘낚시를 하러 온 차일 것이다. 조금 있으면 나이 지긋한 기사분이 낚시 복 차림으로 차에서 내릴
것이다. ‘
나는 요동치는 심장을 안정시키려 현실에서 벌어질 일들을 마음속으로 이야기 했다.
하지만 심장의 요동은 조금도 잦아들지 않았다. 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며 현기증이
느껴졌다. 차마 자리에서 일어서 차로 다가가거나 내부에 타고 있는 사람을 살펴보려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혹시 그녀와 눈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내 심장은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수면에 시선을 고정한 체 차문 여닫는 소리가 들려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차문은 열리지 않았고, 차가 다시 위를 향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그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를 강하게 끌어당기던 그 힘이 예기치 못한 순간, 이곳으로 우리를
이끌었던 것이었다.
처음으로 시선을 돌려 뒤쪽의 아주머니 댁을 바라보았다. 택시가 집 앞을 가려 누구인지 정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집으로 누군가가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택시가 차를 돌려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는 제방에 택시가 올라설 때 그곳에 낚싯대를 펼치고 있는 나를 보고 많이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고 집으로 바로 올라간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뛰어 올라가 그녀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녀가 어떤 이유로 내게 인사도 건네지 않고
집으로 바로 갔는지 몰라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그녀는 내게 오지 않았다.
짐을 내려놓고 내게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어둠에 사위의 사물들이 흐려질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밝혀진 전등의 불빛만이 아주머니 댁에 누군가가 와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위에 계시죠?’
나는 핸드폰을 열어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설레는 마음으로 한참동안 그녀의 답신을 기다렸다.
‘네’
그녀에게서 답신이 왔지만, 나는 더 이상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조금 전 꺾어 놓았던 케미컬 라이트를
찌마다 꽃아 투척을 마무리 하고 의자 그대로 않아서 어둠이 깊어지고 케미컬 라이트 불빛이 파란 빛을
더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맡겨 두었다. 그녀가 날 다시 보길 원한다면 볼 것이고, 그녀가 나를 만나지
못한 것처럼 스치길 바란다면 그렇게 해줄 것이다. 그녀가 나를 부르던, 나를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내려오건 모든 건 온전히 그녀의 선택에 맡겨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애초부터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불청객 이었다. 그녀는 내가 오랫동안 이곳에 다시 오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고, 내일 영한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내가 오늘 이곳을 찾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연히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발견하고 그녀도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녀와 나는 우리에게 아픔을 가져다 줄 운명을 피해 멀리 도망쳐 왔지만,
같은 곳을 향해 줄달음을 치고 있었다.
어둠이 깊어지고 소쩍새 울음소리가 밤의 대기를 뚫고 들려왔다. 청명한 가을의 밤하늘엔 별이 쏟아
져 내릴 듯이 가득 차 있었다. 외로움과 적막함이 가득했을 소류지의 밤이 왠지 포근하기만 했다.
그 숫한 별들의 지붕아래 그녀와 나는 그렇게 함께 있었다. 그녀와 끝내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다 해도,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게 서로의 설렘을 느끼며 이 적막한 산골 소류지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긴 이별을 준비하기엔 충분했다.
나는 마음이 너무나 차분했다. 마치 긴 여정을 떠나는 이가 내 품에 안겨, 온전한 내 보호 속에
하룻밤을 쉬고 있는 느낌이 가득했다.
가을의 서늘한 밤바람이 가벼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고 서쪽 새는 그 청아한 음색을 끊임없이 대기
속으로 품어냈다. 하늘의 별들은 낮게 내려 앉아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 주는 듯 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부엉새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을 때 나는 나를 감싸고 있는 가을밤의 몰입에서 빠져
나왔다. 점심을 부실하게 먹은 탓인지 허기가 느껴졌다. 문득 그녀가 저녁 식사거리도 준비하지 못한
체 그렇게 이곳에 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안 먹었죠. 같이 먹을까요?’
나는 문자를 다 찍어 놓고 전송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그녀에게 먼저 문자를 보낼
핑계로 나는 저녁밥을 생각해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자를 보내야 하는지 잠시 망설임이
일었지만 나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서 답신이 도착했다.
‘그래요. 올라오실래요?’
‘준비해서 올라갈게요. 좀 기다리세요?’
답신을 다시 보내는 내 손이 자꾸만 떨려왔다.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심장이 다시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될 그녀에 대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저녁거리가 든 보조가방을 챙겨들고 차로 가는 발걸음이 허둥거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당황스럽고 급하기만 했다. 차에 시동을 걸고 그녀의 집까지 올라가는 짧은 시간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떤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보아야 할지? 그녀는 나를 어떤 표정으로 바라볼지?
어떤 인사를 나누고 어떤 말들을 해야 할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차를 그녀의 집 앞에 세웠다. 그녀가 차를 세우는 소리를 들은 건지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왔다.
나는 짐들을 챙기는 척 시간을 끌며 그녀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차분한
표정이었다. 아니 차분한 표정이라기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체념이 느껴지는 표정 같았다.
피하고 싶었지만, 거부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결국 거부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체념 같은 것이었다.
나는 짐을 들고 마당으로 들어서며 마루위에 서있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눈을 마주치자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루위에 짐들을 내려놓는 나를 보며 그녀가 책망하듯 먼저 말을 꺼냈다.
“낼 결혼식 가려면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나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미영 씬 태평양 한가운데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우리는 서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쿡쿡거렸다. 우리가 너무 닮아 있다는 사실이 웃음을 자아냈다.
조금 어색할 것 같은 재회였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망설여지는 만남이었지
만, 우리는 만남 그 자체만으로도 서로에게 밝은 미소를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방안에 들어서 그녀와 같이 미리 펴 놓은 상위에 음식들을 꺼내 놓았다. 그녀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가져온 음식들을 가지런히 펼쳐 놓았다. 부족함이 없는 음식이었지만 국물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
“국물이 필요할 것 같은데, 라면이라도 끓일까요?”
“아니요. 이걸로도 충분해요.”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식사를 했다. 오랜만의 출조라 아내가 신경을 많이 쓴 건지 평소보다 먹음직
스러운 음식들이 많았다. 그녀도 허기가 졌던지 음식들을 맛있게 먹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허기를
면한 후, 나는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녀도 내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조금 질책이 섞인 어투로 그녀에게 말을 꺼냈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오빠 결혼식 하루전날 미국으로 가요?”
“진우 씨는 왜 낼 결혼식 안가고 여기 있는데요? 진우 씨가 결혼식 안 가는 이유하고 같은 거겠죠?”
그녀는 가볍게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글믄 미국으로 가지. 이곳엔 왜 왔어요.”
“우리 집에 제가 오고 시프면 오는 거 아닌가요? 진우 씨는 남의 동네에 왜 온 거여요. 결혼식도
않가구…….”
그녀는 마치 어린애들이 우리 동네에 왜 왔냐고 우기는 듯 한 어투를 흉내 내며 내게 말을 했다.
그녀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장난기 어린 그녀에 말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왜 이렇게 유쾌해 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잠시 웃던 그녀가 조금 진지해 지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공항에서 탑승을 기다리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곳에 돌아 온지 꽤 됐지만 하룻밤도
차분히 이곳에서 자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그리고 다시는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낼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그래도 어린 시절을 모두 보낸 곳인데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을 하며 방안을 둘러보던 그녀의 눈에 설핏 눈물이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어머니 생각이 떠오른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너무 깊이 슬픔에 빠져들지 않게 일부러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나는 제가 여기서 쏜 텔레파시가 통해서 온줄 알았어요.”
그녀는 내 농담에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진지하게 내 눈을 바라보더니 갑작스레 질문을 던졌다.
“진짜 제게 텔레파시를 쐈어요? 뭐라고 쐈는데요?”
“뭐라고 보냈기 바라는데요?”
그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깔깔대며 웃더니 장난스럽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미투 라고 보냈죠? 무드 없게 미투가 뭐예요? 미투! 그거 보고 얼마나 웃음이 나던지. 너무 진우 씨
답다고나 할까.”
그녀의 웃음소리가 청아하게 방안에 울려 퍼졌다. 언제 보아도 그녀는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갑자기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건 그녀에 대한 내 감정의
복합체였을 것이다. 이제 이 밤이 지나고 나면 영원히 그녀를 다시 볼 수 없을 거라는 슬픔과 아쉬움이
깊게 배인 감정이었다. 만나면 이렇게 행복하고 한없이 사랑스러운 그녀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과
너무 큰 그리움이 날 괴롭힐 것이라는 생각이 동시에 일었다. 내 감정을 읽은 것인지 그녀도 잠시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침울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이렇게 인사도 없이 훌쩍 가 버리려고 했어요?”
그녀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숨을 깊이 들이키던 그녀가 시선을 돌리며 들릴 듯 말듯 웅얼거렸다.
“그래야 된다는 걸 알잖아요.”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는 한숨처럼 긴 숨을 뱉어냈다.
“함께 있으면 이렇게 행복한데……. 아프네요.”
내 말을 듣고 그녀가 나를 바라보더니 씽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만날 수 없다고 아파하진 말아요. 그냥 그렇게 가슴에 묻은 불씨처럼 그렇게 남겨둬요. 그래도 늘
따뜻할 거예요.”
나는 그녀의 어께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작별 키스는 해 줄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느리게 좌우로 흔들었다.
“이곳에선…….”
그녀에게 그곳은 아픈 기억이 살아있는 곳이라는 것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가벼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다른 곳이라면 해 줬을까요?”
그녀는 날 지긋이 바라보더니 느리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하지만 약간 홍조 띤 그녀의 얼굴과
촉촉이 젖은 그녀의 눈빛에서 다른 곳이었다면 그녀도 나를 원했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어께에 가져다 댄 손을 통해 그녀의 체온과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고 있었다.
“그래도 떠나기 전에 이렇게 만날 수 있었다 는 게 다행이네요.”
나는 그녀의 어께에서 손을 내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와 의미를 정확히 알 수없는 교감들만으로
했던 이별들이 얼마나 큰 아쉬움을 가져다주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도 나와 동감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눈망울이 촉촉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 눈물이 보이게 될 것 같았다.
나는 침울해지는 감정에서 벗어나려 상체를 곧게 세웠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별주는 한잔 할 거죠?”
그녀도 자신을 감싸는 침울한 감정에서 벗어나려 밝게 대답했다.
“굿.”
나는 술을 꺼내 상위에 올려놓았다. 작은 페트병 소주 두병밖에 없었다. 혼자 마시게 될 것 같아 술을
조금밖에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그녀와 나는 일부러 유쾌한 대화들을 주고받으며 술을 마셨다. 한번 침울한 이야기와 분위기에 빠져
들면 너무 깊이 빠지게 될 것 같아 일부러 가벼운 농담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술이 떨어져 마지막 잔을 채우며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앞으론 무얼 하며 살 계획 이예요?”
“제가 애를 갖지 못하지만 애를 늘 갖고 싶었어요. 불쌍한 애들 돌보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그래요. 뭔가 삶의 목적이 있어야 될 것 같아요.”
그녀가 취기가 오르는지 침울한 표정으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방안을 쭉 둘러보았다.
“이곳은 나에게서 너무나 많은 것을 앗아 갔어요. 그날 일로 영한오빠 애를 가졌어요. “
나는 그녀의 말에 놀라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그 이야기는 듣질 못했었다. 그녀의
과거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영한의 아이를 가졌었다는 건 너무나 놀라운
이야기였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고 너무 독한 약물들을 써서…….”
그녀의 볼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임신을 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어요. 하지만 난 그 애를 낳겠다고 버티면서 엄마하고……. 엄마는
죽어도 안 된다고……. 6개월이 다된 아이를 그렇게 죽였어요. 하루 전까지 뱃속에서 움직이던
아이가 잠들었다 깨어보니 뱃속에 없는 거예요. “
그녀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때 수술이 잘못돼서……. 나는 나쁜 엄마죠. 제 자신도 지키지 못하고 제 아이도 지켜주지
못하고……. “
그녀는 상에 엎드린 채 복받쳐 오르는 감정에서 벗어나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녀의 들썩이던 어께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소주잔을 들이켰다. 쓰디쓴 소주가 목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싸’하게 느껴졌다. 이 잔을 비우고 나면 이젠 이곳을 떠나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더 머무를 수
있는 명분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곁을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런 육체적 접촉이
없더라도 그녀 곁에서 그녀를 느끼며 그렇게 함께 있고 싶었다.
나는 그녀에게 안정을 찾을 시간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왔다.
마루에 앉아서 바라보는 가을하늘이 유난히도 청명하게 느껴졌다. 하늘에 가득한 별들이 무척이나
가까이 있는 듯이 느껴졌다. 그때 갑자기 낚싯짐을 실으며 보았던 영한이 선물했던 양주가 떠올려 졌다.
그 술은 언젠가 강 영감님과 술자리가 있다면 대접할 생각으로 그렇게 트렁크에 싣고 다녔던 것이다.
나는 술을 가지러 일어섰다. 갑자기 취기에 머리가 핑하고 도는 것이 느껴졌다. 주량에 크게 넘어서는
술은 아니었지만, 이야기를 나누며 급히 먹어서 인지 취기 확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쇼핑백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감정을 수습한 건지 자세를 바로잡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술을 들어 보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생각해보니 차에 좋은 술이 있었네요.”
쇼핑백엔 든 박스를 열어보니 코냑 한 병과 잔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코냑을 보고 그녀가 내게 물었다.
“일부러 저 줄려고 준비한 건가요.”
나는 그녀의 말이 쉽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런 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보던 그녀가 말했다.
“지난번에 저하고 마셨던 코냑이 그거였어요.”
나는 광주에서 그녀와 함께 마셨던 코냑이 떠올랐다. 우연의 일치였지만 영한과 그녀는 많은 면에서
비슷한 부분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부러 그것이 영한이 선물해준 술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코냑 병을 들어 올리더니 나를 보고 말했다.
“이거 꽤 독한데, 이거 다 비울 때까지 버틸 자신 있어요?”
“미영 씨 자신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술은 제가 더 쎌 걸요. 특히 양주는.”
“자 그럼 시작해 봅시다.”
나는 호기 있게 코냑을 따서 잔을 채웠다. 건배를 하고 얼음도 넣지 않은 코냑을 한 목음 들이키니
목이 타는 듯한, 뜨거움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 느낌이 아무렇지 않는지 부드럽게 코냑을 목으로
넘겼다.
내 찌푸린 얼굴을 보고 그녀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너무 독하면 물을 조금 타서 마셔요.”
“아니요 딱 좋은데요.”
나는 호기 있게 대답하고는 한 목음을 더 들이켰다. 독하기는 했지만 익숙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녀가 술병을 들어 내 술잔에 술을 부었다.
“과거에서 어는 정도 벗어난 건가요?”
나는 그녀가 영한과 의형제를 맺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한동안 아무
대답도 없이 잔을 어루만지더니 남은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내가 그녀의 빈 잔에 술을 따를 때
그녀가 대답했다.
“잊혀 지거나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게 정답이겠죠. 그저 그렇게 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어요. 한번
경험해버린 일이 온전히 지워지겠어요? “
그녀의 말이 맞았다. 한번 경험해버린 것은 경험하지 않은 상태로 절대로 돌아 갈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로 인해 하게 된 경험들로부터 오랫동안 큰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채워진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뜨거운 기운이 목에 타는 듯이 느껴졌다.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오랫동안 이렇게 뜨겁게 내 안에서 타오르게 될 것이다. 나는 그녀를 목마름에 가득 찬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많이 보고 싶어질 것 같아요. 미영 씨 모습이 지워지지가 않을 것 같아요. “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내 빈 잔에 술을 채웠다. 나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계속 뚫어지게 바라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한 체 대답이 없었다.
“미영 씨는 어쩔 것 같아요?”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코냑을 음미하듯 목으로 넘기고 있었다. 그녀의 대답을 계속 기다렸지만
그녀는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채워진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너무 급히 마시지 말아요. 그러다 취해요”
그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말렸다. 나는 술잔에 술을 따르는 그녀에게 다시 말했다.
“너무 많이 그리울 것 같아요. 이 독한 술처럼 목이 타들어 갈 거예요. “
나는 다시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술잔을 쥔 내 팔을 잡았다. 그녀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날 흔들리게 하지 말아줘요. 이게 최선이란 건 진우씨도 알잖아요.”
나는 그녀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가지 말고 이렇게 있어달라는 말이 목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차마 그 말을 뱉어내진 못했다. 차라리 취해버렸으면 좋을 텐데 아직도 내 이성은 취하지
않고 살아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다시 술을 들이켰다. 그녀도 더 이상
나를 말리지 않았다.
거기까지가 기억의 전부였다. 그 후 그녀와 어떤 이야기들을 나눴는지 얼마나 많은 술을 더 마셨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갑작스레 올라온 술기운에 나도 모른 사이 잠이 들었던 것 같다.
p.s 괜히 올려서 저수지의 그녀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흐려질까 겁나네요.
저수지의 그녀 39. (피할수 없는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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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19
힘내세요 우리님^^
역사는 밤에이루어지는겁니다 ㅎㅎ
다음편이 벌써 기다려지네요 화이팅~~~~~
끝난줄 알았던 저수지의 그녀.........
무지무지 즐겁습니다~~~^^
감사 합니다..~~^^
항상 감사하게 잘 읽고 있습니다.힘내세요.
언제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잘 보고 있습니다. 감정에 솔직한 맺음을 기대합니다 만,
우리님의 도덕성이 그걸 허용할지는 미지수라고 생각합니다.
좀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네요. 끊을 수 없는것이 사람의 정이란 말이 맞아요....
아련하게 좋았던 기억의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기분좋은 감정에 취하게 되네요
기분좋게 즐감합니다
또빠져 드네여~~~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