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새벽을 틈타 권박사는 원룸을 나섰다.만반의 준비를 마쳤지만 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면서 계룡산 신원사를 향하는 새벽 첫 버스에 몸을 실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는 등산객으로 보였다.
등산용 배낭에는 손전등과 나침반, 비상식량과 노트북, 자켓을 비롯한 옷가지 몇 벌을 넣고 그밖의 자질구레한 용품들, 구급약품과 밴드, 로프, 시계, 세면도구, 침낭과, 매트리스등을 어젯 밤 차곡차곡 개어 넣었다. 밤이 짧고 낮이 긴 한 여름의 무더위는 후끈하게 버스 실내를 달궜고 먼동이 정류장 표지판 위에 눈부신 햇살 한 가닥을 반사시켜 타오르는 동안 버스는 타고 내리는 승객들로 차츰 분볐다.
삼삼오오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과 이른 새벽 부터 삶의 현장으로 달려가는 바쁘게 살아가는 소시민들, 그리고 학생들의 무리 속에서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여자가 있었다. 주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쪽진 머리와 파스텔톤 저고리와 감빛 치마의 개량한복은 드레스를 연상 시켰고 머리에는 큰 비녀를 꽂고 있었다.
반달 눈썹과 스모키화장의 눈매, 서클렌즈를
낀 흑갈색의 눈동자, 레드와인색의 붉은 입술이
화려한 용모 속에 깃든 설명할 수 없는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
나이는 짐작이 되지 않았는데 이십대 후반이 거나 많아야 서른 중반은 아직 안되어 보였다.
아무래도 일반처자는 아니고 깊은 눈매나 화장을 통해서도 영매나 무녀의 느낌이 강했고 권박사와 잠깐 마주친 눈길에서 다른 사물은 뿌연 물감을 칠해 놓은듯 흐릿해지고 오직 한 장면만 또렷하게 클로즈업 되는 것처럼 아찔한 기운이 감돌았다.
버스 내의 주변과는 다른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권박사는 자신과 잠시 눈빛교환을 한 여자가 짧은 순간 각인되어 신기해 하고 있었다.
여자는 신원사를 불과 몇 정거장 앞두고 버스를 내렸고 버스 찻장을 스치고 지나는 여자의 옆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권박사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끝까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신원사 사천왕문을 지나 권박사는 먼저 명성왕후의 영정이 놓여 있는 중악단(中嶽壇) 에 들려 잠시 예를 올렸다. 그리고 대웅전 앞으로 내려와 5층 석탑을 바라보며 수석 연구원 지석이 숨겨둔 펜을 찾기 위해 그가 전해준 편지를 읽는 사이에 주지스님이 합장을 하며 권박사에게 다가왔다.
속세에서 벌어진 일의 유무를 떠나서 주지스님은 어떤 말도 하지 않은채 안부인사로 목례를 짧게 하고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는 대웅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권박사가 이곳을 드나든지도 꽤 오래되었지만 특별하게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이 유별나거나 하지 않고 언제나 물흐르듯이 유하게 흘러갔고 그런 주지스님의 접대방식은 절의 처마 끝에 달린 풍경처럼 세상의 고단함과 번잡함을 잊게 만드는 평온과 같았다.
끈끈함이 질기게 맺혀 속박의 관계로 어긋나고 마는 질시와 투구의 세상과는 달리 바람처럼 왔다가 만나고 또 기약없이 떠나도 언제나 어제 본 것처럼 별 말이 없더라도 반가운 인연,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자연과 동화된 그런
인연이었기에 권박사는 사색이 필요할 때면 늘 신원사를 찾았고 마음은 한결같이 평화롭고 아늑함을 얻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문제 해결을 위해 신원사에 왔기 때문에 수석 연구원 지석이 남겨 놓은 수수께끼를 풀 열쇠를 찾아야 했다.
권박사는 수석연구원 지석의 편지를 꺼내 다시금 읽었고 600년이나 된 배롱나무의 흐드러진 붉은 꽃 앞으로 다가섰다.
꽃봉우리를 한껏 터뜨린 꽃을 잠깐 감상하면서
고목이 되어 세월을 버틴 나뭇가지의 흔적, 삭아서 빈 구멍과 빠진 옹이 속을 더듬었다.
그 속에서 포장지에 쌓인 물건이 나왔고 그것은 수석연구원 지석이 연구소를 탈출할 때 연구소의 자료를 복사한 USB였다.
드디어 비밀의 문을 열어제칠 열쇠를 찾았던 것이다. 권박사는 USB를 자켓 호주머니에 넣고 잠시나마 숨을 돌리기 위해 5층 석탑을 따라 돌았다.
"그렇게 해서 부처님의 공덕을 어디 받을 수 있겠어요".
뜻밖의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뒷편에서
들렸기에 권박사는 흠짓 놀라고 있었다.
새벽 버스에서 설명할 수 없는 아우라를 느꼈던
여자가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와는 달리 비구니가 입는 두루마기와
동방,적삼과 고의(바지)를 갖춰 입은 승복
차림이었다.
"보아하니 이곳에 뭔가를 찾으려 오셨군요
얼굴에 쓰여 있는 수심이 한가득,
나쁜 기운이 운명을 사로잡아
육신의 고난이 시작되었는데 그 길은
보이지 않는군요. 아니 알 수가 ...알 수가 없어요".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한 말을 하는 여자가 행여 라도 그들이 사주한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권박사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찔러대는 가슴엔 의심병만 돋아 있네요
문 앞 가까이 와 있는 암흑은 오래고 오랜
전생의 죄를 씻지 않으면 쫓기는 현생을
끝낼 수 없답니다".
버스에서 한참 전에 내린 여자가 언제 이곳까지 왔으며 차림새가 변했고 뜬금없는 이상한 말을 했기에 권박사는 더욱 조심스러웠다.
"아가씨는 누구고 저를 알기라도 하는 거요? 도대체가 뭔 이야긴지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혹시 누가 여기로 보내서 왔소?
그냥 처자는 아닌 것 같고 무녀라면 절에도 어울리지 않는데 .....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하고 있으니... 원!!!
"놀라신거라면 죄송합니다. 단지 제가 모시는
분이 이곳까지 절 인도했지요. 살(殺)의 기운이
강해서 차마 외면할 수 없었네요. 실례가 된
거라면 용서하세요".
여자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지만 권박사는 그래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악한 기운이라니? 아가씨가 보기엔
귀신이라도 얼굴에 씌워 있단 소리요
난 미신따위는 믿지 않소!!
이거야 원!! 선문답같은 얘기로구만, 날 놀리는게 아니라면 아가씨 정체는 뭐요?".
"곧 제 말을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그러니 노여움을 거둬 주세요.
곧 이루어 질 일은 선생님을 운명의 끈으로 묶을 겁니다. 제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신의 뜻이니까요".
여자는 권박사의 물음에도 궁금증만 더하며 이해할 수 없는 대답만 했다.
"신의 뜻, 신의 소리, 신의 인도....이상한 소리만
자꾸 하는데 아가씨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알고나 지금 이런 소리를 하는
거요!! 아가씨와 이렇게 잡담이나 할만큼
난 한가한 사람이 아니니까 이만 관 두겠소!!'
그렇게 권박사는 여자에게 일침을 가하고 막 돌아서고 있었다.
먼발치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조용한 절의 경내를 점점 울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무리의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 절에 있는 다른 이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며 헤집고 다녔다.
그들은 분명 권박사를 쫓아온 별장안내자 명진이 보낸 사냥개였다. 반나절이 체 걸리지 않아서 벌써 권박사를 쫓아 왔던 것이다.
그 순간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권박사의
소매를 끌어 당기며 '빨리 이 쪽으로, 어서요'
라고 여자가 말했기에 얼떨결에 그들 무리가 들어오는 방향을 피해 여자를 따라가고 있었다.
여자는 신내림을 받은 무녀였고 그녀는
초유라고 나중에 자신을 소개했다.
작두여신 초유와의 만남은 권박사에게 전혀 다른 세상과의 소통을, 그리고 안개에 가려 종잡을 수 없었던 실마리를 푸는 방편이 되었다.
과학자와 무녀의 만남이 어떤 시너지 효과를 불러 일으킬지는 아직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D프로젝트를 둘러싼 좌충우돌의 결과조차 그 베일은 풀리지 않았으므로 또한 그러한 상승효과가 표본R인 나에게 미칠 영향 역시도 현재로서는 알수 없는 것이었다.
D프로젝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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