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조행기
· 균형있는 게시판 사용을 위해 1일 1회로 게시물 건수를 제한합니다.
피터 옆에 쪼그리고 앉아 누룽지를 먹었다.
잔잔한 물가에서 우리는 조용히, 최대한 품위 있게 아침 식사를 했다.
아침 햇살이 수면에 놀고 나뭇잎 사이로 봄바람이 돌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피터가 다시 턱을 괴고 엎드렸다.
ㅡ 올라와라. 한숨 자자.
돗자리 한켠을 툭툭 치자 피터가 어슬렁 올라왔다.
피터의 등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피터의 맥박과 온기가 자장가처럼 나를 토닥이기 시작했다.
ㅡ 평화롭네. 오랜만에 깊게 잠들 것 같아...
꿈을 꾸었다.
골목길 어디쯤 서서 나는, 길 위에 주저앉아 있는 나를 보고 있었다.
희망을 잃고 절망을 만난 듯 나는 허망해 보였다.
그런 내 앞에 누군가 소리 없이 다가섰다.
검은 구두와 감색 양복.
어느 날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던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냉정한 듯 깊은 눈매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름을 발라 올백으로 넘긴 머리칼에 아침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다.
ㅡ 야! 고개를 들고 위를 봐! 누가 와있는지 보라고!
나는 주저앉아있는 나를 재촉했다.
허망한 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내 눈동자가 점점 커지고, 눈물이 그렁 맺히고,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ㅡ 안 돼! 약한 모습을 보이면 절대 안 돼!
나는, 아버지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울먹이는 내게 냉정함을 요구했다.
ㅡ 그의 방식대로, 감정의 과잉을 경계해!
울먹이던 내가 꿀꺽, 울음을 삼키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ㅡ 아버지, 이제 어째야 해요? 다 잃었거든요.
ㅡ 사람들이, 세상이, 야만이에요. 너무 천박해서 싫어졌어요.
ㅡ 꿈꾸었던 게 유치해졌고, 그만 허망해졌어요.
ㅡ 아내와 딸에게 돌아가기가 겁이 나요.
아아, 저 바보 같은 녀석!
그토록 연습했던, 아버지를 만나면 해줄 말을 잊어버린 멍청한 녀석!
ㅡ 왜 사라졌어요? 조금만 더 기다려줬으면 보여줄 수 있었는데.
ㅡ 부족했던 아들이 개간한 지평을 자랑하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손을 아들의 머리 위에 올렸다.
아들이 말을 멈추고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손이 아들의 머리에서 어깨로 내려왔다.
아들은 뚫어질 듯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들이 스물네 살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안아 주지 않았던 아버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그래참잘했다, 따위의 격려를 해주지도 않았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주저앉아 허망해 하는 아들을 쓰다듬고 있었다.
골목 어귀에 서서 그 모습을 보던 나는 녀석이 부러워 질투가 났다.
어디서 바람이 불어와 골목길을 쓸기 시작했다.
티끌이 박혔는지 눈이 아려왔다.
ㅡ 형! 일어나봐요.
후배 정필이 왔다.
정필의 머리 위로 나무 이파리 사이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다.
ㅡ 어, 왔냐?
ㅡ 무슨 잠을 그리 곤하게 자요?
ㅡ 어, 피터랑 같이 잤지.
피터는 옆에 없었다. 나는 무너미를 바라보았다.
ㅡ 피터가 누군데요?
ㅡ 저기, 내 친구가 가네.
피터가 무너미를 걷고 있었다.
나는 찌가 서 있는 수면을 보며 정필에게 말했다.
ㅡ 기다려 봐. 잉어군단이 지나갈 때가 됐으니.
ㅡ 형, 형수가요. 아니, 정화가요.
ㅡ 그래. 뭐라던데?
ㅡ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요.
그 말을 듣고는 목이 아파왔다.
ㅡ 형수 몸은 좀 어떻디?
ㅡ 괜찮다고는 하던데...
ㅡ 잉어 한 마리 잡았다. 아니, 잡혀 주더라.
ㅡ 형수 약 하게요?
ㅡ 그래, 내일 집에 갈란다.
ㅡ 그래요. 내일 갑시다.
ㅡ 형수가, 형 물에 들어갈지 모른다고 지키라던데...
아내와 정화의 눈동자를 떠올리는데 정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ㅡ 세상에! 형, 저거 봐요!
그래, 놀라울 거다. 피터를 위해 니가 해줄 일이 있다.
계속...
둠벙조사 15-05-17 19:18
피터 팬입니다. 지금 저도 지독한 감기몸살에 누워 님의 글을 읽고 있습니다. ^^
물향 15-05-19 11:01
형 물에 들어갈지 모른다고 지키라던데 ........
밤하늘엔별 15-05-19 22:19
기다리다 목 빠집니다~ㅎ
건강 잘 챙기십시오~^^
retaxi 15-05-27 14:59
삶이 팍팍하고 힘들때 우리는 늘 마음의 고향을 찾아 위로받고 하지요`~
내 아버지 ...
그리고 어린시절 ...
죽음의 사선을 생각하게 되면 가슴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격하고 뜻뜻한 알지못할 그 무엇이 목구멍 아프도록 꽉 차여
목이 메지요`~
그것은 "사랑"
제가 피터님 글을 읽고 소설을 씁니다.~~ㅎ~!
기다리시는 분도 없겠지만, 글이 늦어 송구한 마음을 전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