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 자유게시판

    주간 최대 조회, 댓글...

    아부지와함께 / 2012-08-22 09:43 / Hit : 2015 본문+댓글추천 : 0

    주간 최대 조회, 댓글...은 바라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해서요.*^^*


    어느 젊은이의 삶

    92(?)년 어느 주간지에서 읽은 기사입니다.
    감동적이며 저를 한없이 부끄럽게 한 어느 젊은이의 삶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짧은 생애 20년 동안 보통사람들이 누리는 즐거움이라곤 조금도 맛 보지 못했던 젊은이,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불평보다는 주변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헌신으로 일관했던 젊은이,
    결국 짧은 생애를 마감했지만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에게 기억될 젊은이.
    지난해 7월 4일 휴가를 나왔다가 부대 복귀중 물에 빠진 버스에서
    승객 7명을 구하고 탈진해 자신은 숨진 육군 이등병 윤병진 군은 당시 만 20세였다.
    병진 군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물론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이다.

    …중략……

    병진 군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를 설명하는 데 빼놓지 않는 두가지 이야기가 있다.
    병진군의 어머니 김○○씨(51)는 89년 척추협착증으로 부산 보훈병원에서
    6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병진 군이 부산공고 2학년에 재학중이던 때였다.
    이 수술 후 김씨는 한동안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병수발을 들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 김○○씨(55)와 병진군 뿐이었다.
    누나들은 출가한 상태였고 형은 군복무 중이었다.
    중소규모의 철강회사에서 야간경비일을 하던 아버지가 낮에 간호를 했고
    병진 군은 학교를 마치고 밤에 어머니 곁을 지켰다.

    병진 군은 그 추운 겨울 어머니의 속옷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손빨래를 했다.
    세탁기도 사용치 않았다. 주변에선
    「더럽지도 않느냐」「왜 세탁기를 사용하지 않느냐」고 감탄어린 책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병진 군의 대답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제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는데 뭐가 더럽겠습니까.
    아직 제가 어리니 이렇게 해서라도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병진 군은 잠을 잘 때도 어머니 손과 자신의 몸을 고무줄로 잇고
    「어머니 많이 아프시면 고무줄을 당기세요」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또 하나 병진 군이 군에 입대해 신병훈련을 받던 때 이야기다.
    신병훈련은 전과정이 힘들지만 가장 힘든 것은 마지막 일정인 50km 장거리행군이다.
    행군 전날 당시 육군 병장으로 병진 군과 같은 부대에서 복무중이던 형이 면회를 왔다.
    형은 여성용 스타킹 한켤레를 병진 군에게 내밀었다.
    스타킹이 비누를 칠해 신으면 행군시 발에 충격이 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병진 군의 대답은 형을 무색하게 했다.
    「나만 이런 걸 신을 수 없습니다.
    스타킹보다 여럿이 나눠 피울 수 있는 담배 한곽으로 바꿔주십시오.」
    병진 군은 형이 사온 콜라 몇 병마저 동료들에게 미안하다며 받지 않았다.

    병진 군의 생활은 매사에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 「꽉 막혔다」「주변이 없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런 생활방식이 몸에 배었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병진 군은 71년 부산시 부산진구 당감동에서 아버지 윤○○씨와
    어머니 김○○씨 사이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주욱 그의 집안은 뼈저린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국민학교 때 소풍을 가도 도시락조차 준비하지 못했으며,
    고등학교 학창시절 내내 버스 토큰 외에 용돈이라곤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병진 군의 아버지 고향은 경남 거제군. 아버지는 먹고 살길을 찾아 65년 부산으로 왔다.
    부산 모부대의 병기창 군속생활 7년, 노점상 생활 8여년
    그리고 그 이후 조그만 철강회사의 경비원 일을 하고 있지만 생활이 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노점상을 할 때가 가장 나았지만 69년 이래 계속된 아내의 투병생활로 약값
    대기에도 바빴고 노점상도 단속이 심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69년 허리디스크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수술받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부산시 용호동 나환자촌에서 약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병원이 요구하던 수술비는 50만원, 아버지 월급이 5천원도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현재 윤 씨가 월급은 36만원, 여기에 부정기적인 상여금 2백% 뿐이다.
    병진 군이 숨지기 직전인 91년 6월의 월급은 29만여원이었다.
    윤 씨는 자녀들에게 용돈을 줘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지금까지 출퇴근용 토큰값과 목욕값 외에는 써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병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군대가기 전까지 현대엘리베이터에 취직했습니다.
    석달간 서울에서 연수를 받았는데 연수기간중에 받은 돈 1백여만원을 집에 한푼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마당이라 친구들하고 술 먹는데 썼다고 하더군요.
    평소에 그렇지 않은 아이인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 하지 않고 넘어갔지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생활이 어려운 둘째누나에게 몽땅 갖다준 모양이에요.」
    윤씨는 나중에 그 일을 알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가난은 어린 시절의 병진이에게 너무나 가혹한 중압감으로 다가갔던 모양이다.
    병진군은 국민학교 3학년 때 친구들과 놀다가 오른팔이 부러진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 등에 엎혀 병원에 가면서도 아프다는 말을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병원비에 대한 걱정이었다.

    이런 속에서도 병진 군은 부산국민학교 개성중학교 부산공고를 거치는 동안
    항상 밝은 얼굴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성실했으며 친구들에게는 의리가 있었다.
    병진 군과 어린 시절부터 단짝 친구인 박○○군은
    『병진이와는 싸우기도 자주 했지만 사과의 말은 병진이가 항상 먼저했다』며
    『그는 명랑하면서도 사려가 깊은 친구였다』고 회상했다.
    병진 군은 지난해 5월 14일 가난한 집안과 아픈 어머니를 뒤로 하고
    육군 백두산부대에 입대해 6주간의 신병 훈련에 들어갔다.

    『어머니, 저는 이제 마음만을 남겨놓고 떠납니다.
    이 땅의 강인한 파수꾼으로 조국의 미래를 지키고자
    당신이 주신 이 몸뚱이를 전선에 가져갑니다.
    끊겨질 30개월의 세월 동안 어머니에게 향하는 이 간절한 사랑의 정을,
    이 그침없을 눈물을 살로 담아 다시 어머니께 바치오리다.』
    병진 군은 입영전야에 남긴 일기에서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의 훈련병 시절도 성실함과 전우애의 연속이었다.
    몸이 약해 훈련 성적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모두가 그를 기억했다.
    그 결과 훈련이 끝나고 「가장 같이 자고 싶은 전우」「가장 사랑하는 전우」를 뽑는
    투표에서 병진 군은 모두 1등을 했다.
    그 대가는 6월 28일에서 7월 4일까지 1주일 간의 포상휴가였다.

    휴가가 끝나기 전날인 7월 3일
    병진 군은 출근하는 아버지를 길까지 쫓아가 여러번 인사를 했다.
    『몇 발짝 가니까 병진이가 저를 불러 길바닥에 엎드려 인사를 하더군요.
    그리고 다시 몇 발짝을 가지 못해 병진이가 다시 불렀어요.
    그리고는 다시 넙죽 절을 하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 애가 마지막 인사를 하느라 그랬던 모양이에요.』
    아버지 윤○○ 씨의 회상이다.

    휴가 마지막 날인 7월 4일 병진 군은 귀대를 위해
    서울 상봉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오전 7시 50분발 강원도 양구행 버스를 탔다.
    서울을 출발해 남한강 옆 국도를 따라 거슬러 올라간 지 50분만인 오전 8시 40분.
    버스는 경기도 양평군 앙서면 용담리를 지나고 있었다.
    버스는 중앙선을 침범해 마주오던 봉고승합차와 정면충돌했고 남한강으로 추락했다.
    병진 군은 물이 점차 차오르는 버스 속에서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승객들을
    진정시키면서 몸으로 유리창을 깨고 승객 7명을 차례차례 밀어냈다.
    병진 군은 힘이 부쳤다.

    그리고는 물에 잠겼다.

    …하략……

    소박사 12-08-22 09:48
    착한 사람인데 안됐네요.

    부모가 얼마나 상심 했을까요?
    일동맨동생 12-08-22 09:52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바른생각 12-08-22 10:01
    감동적입니다....아~~아..
    하늘아래ㅡ땅 12-08-22 10:01
    나보다는 남을위해 살다간 의인이군요...

    깊게 맘속에 간직하겠습니다!
    한알 12-08-22 10:02
    참 좋은 글입니다.

    이런글이 최대 조회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부지와함께"님 훈훈한 감동의 글 감사했습니다. 꾸벅!
    化山 12-08-22 10:04
    71년생, 돼지띠, 92군번 ...
    같지만 서로 다른 삶...
    저 자신이 한 없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촌붕애 12-08-22 10:05
    내 자신을 뒤돌아 보게 합니다.

    감사합니다.
    蓑笠翁 12-08-22 10:10
    감동입니다.

    부끄럽네요.
    비맞은대나무2 12-08-22 10:11
    과연 저라면 ᆢ

    왜 이런삶이 이렇게 끝나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ᆢ
    붕으우리 12-08-22 10:32
    안타깝고 또 감동입니다.
    제 자신이 부끄러워 지는군요.

    늘 마음을 울리는 글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삼구오 12-08-22 10:36
    뭉클하네요
    제자신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잡고싶다™ 12-08-22 10:40
    너무 안타까운 사연입니다 ㅠㅠ
    다시한번 저를 뒤돌아 보게 만드는군요
    부끄럽기 그지 없습니다 .....
    무용객 12-08-22 11:37
    뭉클함 뒤에 가슴이 막힙니다.

    그친구 가슴은 얼마나 답답 했을까요.

    숨은 멈추었지만 머리속은 느끼는 짧은 시간에...
    하얀비늘™ 12-08-22 13:43
    가슴 뭉클하면서 아픈 글입니다.

    그리고 참 아름다운 청년이네요.

    아버지의 마음은....



    2024 Mobile Wolchu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