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 자유게시판

    누나의 일기

    아부지와함께 / 2012-08-02 11:33 / Hit : 2520 본문+댓글추천 : 0

    복실이의 눈물에서 잠깐 누님의 얘기를 했었습니다.
    누님이 맏이이고 제가 막내, 그리고 누님과 저는 띠동갑입니다.
    애기 때에는 울면 늘 누나가 업고 다녔다 합니다.
    저 때문에 누나는 또래의 친구들과 마음껏 놀지도 못했었다고 하더군요.
    누님의 고등학교 졸업 시 제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고
    그 때부터 중2 때 누님 결혼하실 때까지,
    누님은 저에게 장사하시는 어머님의 빈 자리를 채우셨죠.

    누나는 정이 참 많은 분이었습니다.
    하루는 대문 밖이 시끌하여 나가 보았더니 각설이 두 아이가 다투고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저의 집에 밥을 얻으러 들어간다 하고
    또다른 아이는 이 집은 안된다며 옥신각신 하더군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말리는 그 아이는 얼마 전 저의 집을 왔다간 아이더군요.
    누나는 밥동냥하는 각설이가 오면 밥만 주는 것이 아니라
    데리고 들어와서 깨끗이 씻어서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바로 그 아이였습니다.

    누나는 책을 무척 좋아 했습니다.
    책을 읽다가 밥을 태운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고,
    그때마다 아버지께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전혜린,까뮈,헷세,한국문학,수필집…등
    누나 시집간 후 빛 바랜 책을 버리지 못하고 제가 보관하였습니다
    그리고 누나가 쓴 손 때 묻은 일기장,
    두꺼운 대학노트로 대여섯 권 되었던 것으로 기억 되는데
    제가 읽었던 어떤 수필집 보다 가슴에 와 닿는 그런 글들이 많았습니다.
    몇번의 이사 속에 책은 버렸고 누나의 일기는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지금까지도 아쉬운 일 중에 하나입니다.
    누나의 일기 중 20대 때 제가 베껴 쓴 한 페이지가 있어 그대로 옮겨 드립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어머님이 일이 있어 누나에게 가게를 맡기고 생겼던 일입니다.
    빵집 주인과 어떤 남학생의 실랑이가 배경인데 앞 페이지는 분실 되었고
    여기서부터 누나의 일기는 시작됩니다.

    어떤 남학생이 빵을 사먹고 돈이 없어 지불하지 못해서 그러고 있노라고 하셨다.
    십 여년간 장사해 온 분이라 그런 수법에 여러 번 속아
    옷이라도 벗으라고 성화가 대단하다.
    그 학생은 학생증을 맡기며 애원을 거듭하였다.
    초라한 모습에 핏기 없능 얼굴이 몇 끼나 굶은 듯 매우 애처로와 보였다.
    가여운 맘이 솟구쳐 생각지도 않고 아주머니에게 빵 값 오십원을 드리고 그 학생에게
    "양심은 버리지 마세요.
    아주머니는 하루 왼종일 벌어도 오십원 정도의 수입일 거에요." 하고 말했다.
    그리곤 고맙다고 굽신 절을 하며 학생증을 나에게 주고
    집이 가까우니 돈을 가져 오겠다며 도망치듯 사라졌다.
    돈을 받기 위해서 준 것은 아니다.
    학생 말에 B고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라며 학생증을 맡겼으니 찾아 가려니 하고 기다렸다.
    무심코 학생증을 들춰보니 재학생이라던 그의 말은 거짓이었다.
    학생이라고 애원하던 그의 순진한 눈매가 떠 오른다.
    남을 속이는 눈매가 아니었는데, 다시 학생증을 들여다 보았지만……
    졸음은 저만치 달아나고 그 학생을 기다려 보자는 믿음이 움트지만,
    단순한 성격에 남을 의심할 줄 모르고 무조건 믿어 버리는 나.
    그러나, 한 번 속고 두 번 속아 이제는 불신이라는 어휘에
    곧 동화되어 버리는가 하는 두려움이 전신을 휩싸고 돈다.
    무척 우울한 하루였다.

    참붕어♥대물 12-08-02 11:39
    고운 마음씨의 누님을 두셨군요
    저는 5남매의 중간이라
    맨날 싸운기억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그때가 그리운건
    그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부들과땟장사이 12-08-02 11:40
    너무나 착한 누님이시군요...
    감사해유6 12-08-02 11:41
    누님께서 참으로 선하신 분이셨군요.

    음,,,저도 저녁때 누님들에게,,,떼레뽕을,,, 생각하게 합니다.
    세워도 12-08-02 11:43
    사남매...
    두분은 행님이고 한분은 누님..
    어릴적 행님들은 거의적군?이었지만
    누님은 항상 따뜻하게 안아줬지요!
    소박사 12-08-02 12:36
    누나가 인정이 많으시고 착하신 분이군요^^
    소요 12-08-02 16:00
    인정많으시고 사려 깊으신분 이네요

    생활에 작은것에서 느끼고 글 적는 실력도 대단하신것 같습니다
    쌍마™ 12-08-02 17:19
    잘 읽었습니다

    누님께선 건강히 잘 계신지요?

    매번 편안히 읽을수 있는글 감사히
    읽고 갑니다

    건강한 여름나기 되세요
    아부지와함께 12-08-02 18:41
    참붕어대물님
    부들과땟장사이님
    감사해유님
    세워도님
    소박사님
    소요님
    쌍마님

    귀중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저의 누님은 현재 울산에 거주하십니다.
    부모님께서 늘 그리 말씀하셨죠.
    책을 좋아하니 서점하는 남자와 결혼시키겠다구요.

    이후에 누나에 대한 글을 쓸지 망설여집니다만......

    지금 조그만 서점을 하고 있구요.
    아마 그 지역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오래된 책방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원 12-08-04 14:08
    그렇치요...'돈을 받기 위해서 준 것은 아니다' 라는
    누나의 말씀에 공감이 가는데....
    그당시 누나가 생각하게된 불신과 두려움에 잠시 서글픔이 느켜지지만
    이제는 자신이 좋아하는 책과 함께하며 서점을 하고 계신다니
    행복한 분이십니다*^ ^*



    2024 Mobile Wolchu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