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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비(꽁트) 2부

    안동어뱅이 / 2002-08-09 09:47 / Hit : 4475 본문+댓글추천 : 0

    2부
    나는 동화 속의 공주의 모습이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간혹 길을 가다가 저만치 소녀가 보이면 얼른 다른 길로 가거나 어쩔 수 없이 마주치면 길 한편으로 서서 고개를 숙이고 그녀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곤 했다. 나의 헤진 운동화, 낡고 빛 바랜 교복(그것도 형이나 남의 것을 얻어 입었음), 내 손에 든 신문뭉치나 토끼풀이 담긴 바구니, 내 몸에서 나는 땀 냄새. 나는 죄인처럼, 또는 상전을 보고 고개를 숙이는 하인처럼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 감히 말을 부치거나 흠모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고 하늘의 천사 같이 느껴졌다.

    어느 날 오후 해거름 무렵, 나는 신문을 옆에 끼고 그 골목길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퍼부었다. 신문이 젖을 까봐 가슴에 품고 처마 끝에서 비가 그치기를 잠시 기다려보지만 신문이 늦어지면 큰일이기에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는데, 저만치 골목길을 누군가 우산을 쓰고 오는 사람이 보인다. 비닐우산이 아니고 검은색 고급 우산이다. 그 우산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데, 다가오는 우산의 주인공은 그 소녀였다. 흰색의 목 짧은 장화가 유난히 눈에 들어 왔다.
    나는 구세주를 만난 듯, 그녀가 가는 방향을 나도 가니까,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그녀의 우산 속으로 뛰어 들었다. 갑자기 우산 속으로 뛰어든 나를 본 소녀는 놀라서, 마치 못 볼 것을 본 듯이, 나를 밀치고 우산을 팽개치고 빗속으로 도망쳐 가고 말았다.
    나는 우산을 주워서 접은 후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와 그녀의 집 대문 앞에 놓아두고, 싸늘한 자취방에서 추위와 울분으로 하룻밤을 잠들지 못했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또한 얼굴이 험상궂거나 불치의 병을 앓는 환자도 아니다. 다만 나의 모습이 초라하고 내 옷이 비에 젖어 그녀의 좋은 옷을 더럽힐 수는 있지만,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이 아님을 그녀도 알 것이다. 그런데, 나를 보고 송충이를 본 듯, 미친개를 본 듯, 나를 밀치고, 우산을 던지고 피해서 달아나는 그녀를 나는 밤 세워 원망을 했다.
    결론은 내 모습이 초라하다는 것, 내가 부모를 잘 못 만나 신문배달을 하면서 가난하게 산다는 것, 이것이 나의 죄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어떠한 고통이 따르더라도 나는 성공을 하여서 그녀에게 당한 수모를 갚아주리라 생각했다.

    며칠 후 우연히 길을 가다가 그녀를 만났다. 나는 그녀가 무슨 사과의 말이라도 하려나 하고 일부러 앞으로 지나갔지만, 그녀는 얼굴을 붉힌 채 외면하고 지나갔다. 한줌도 후회의 빛을 발견할 수 없었던 나는 그녀를 보는 것이 나의 자존심을 땅 끝까지 끌어내린다는 생각을 하고서는 자취방을 멀리 옮기고 말았다.

    중학교를 졸업 후 나는 K시를 떠나게 되고 그녀에 대한 관심은 줄었지만, 때때로 그녀에게 당한 수모를 잊지 못하고 울컥 솟아오르는 울분을 싹이며, 내 가슴에 복수심과 같은 것이 남아 있어 힘들고 괴로울 때면 그녀를 생각하며 더욱 열심히 살았다.

    이제 30년이 지난 이 시간에 출장으로 며칠동안 K시를 찾아온 나는 친구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의 생각하게 되고 그녀의 안부를 물으니, 워낙 이름난 부잣집이라 아버지는 병으로 죽었다는 것은 알지만 그녀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다.
    친구들과 헤어진 나는 그녀가 살던 옛집으로 가 보았다. 토담을 쌓고 궁전처럼 거대하게 버티고 있던 집은 헐어지고, 내가 살던 자취방도 아파트가 가득히 들어서 있었다.
    다시 시내로 들어와서 그녀가 나를 밀치고 도망을 갔던 골목이 생각나 이렇게 힘들게 찾아와 지난날 영화 같은 한 장면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또다시 담배를 피워 문 나는 어디서 그녀를 찾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왠지 꼭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과, 그녀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약속을 하지도 않았고, 그녀를 만나야 할 이유도 없다. 다만 그녀가 아직도 이 도시에 살고 있다면 사는 모습이 보고 싶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니다, 나 보다 훨씬 초라한 모습으로 살고 있기를 바라고, 내가 그녀를 만나면 지금의 내 모습을 뽐내고 싶었다.

    골목길을 나오면서 어쩌면 그녀는 부모님들이 하던 포목점을 계속 할 수 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부잣집 외동딸이라 가업을 계승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빗줄기는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다. 나는 시장 길로 들어서서 그녀의 가게가 있던 골목길로 가 보았다. 이미 시간이 밤 10시를 넘어서고 있어 가게마다 문을 닫고 컴컴한 재래식 시장은 스산한 분위기가 들었다. 그 가게는 멀리서 불빛이 보이고 예전의 그 간판이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나는 언 듯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가게 앞을 지나며 창문을 바라보니 어떤 중년의 여인이 안경을 쓰고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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