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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 병합이 정당하다?

    誠敬信™ / 2013-08-20 15:31 / Hit : 5447 본문+댓글추천 : 0

    도저히 그냥 못넘어 가겠습니다

    그냥 쉽게 말하겠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독립군이 잘살아야 겠습니까?

    아니면 친일파가 잘 살아야 하겠습니까?

    친일파가 나쁜놈 입니까?

    독립군이 나쁜 놈입니까?

    한일병합이 국제법상 하자가 없다?

    위키백과 함 찾아 보시죠?

    위키백과에서 퍼왔습니다

    "일본에선 NHK가 정부의 지원하에 한일강제합방 100주년 특집을 준비하면서, 강제합방을 합법적인 것으로 비치게 한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11]

    2010년 5월 10일,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을 맞아 한국의 대표 지식인 109명은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일본 지식인 105명은 도쿄 일본교육회관에서 각각 기자회견을 열고 ‘한일 병합이 원천무효’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한국병합은 대한제국의 황제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격렬한 항의를 군대의 힘으로 짓누르고 실현한 제국주의 행위이며 불의부정(不義不正)한 행위”라며 “조약의 전문(前文)도 거짓이고 본문도 거짓”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조약 체결의 절차와 형식에도 중대한 결점과 결함이 보이고 있으며, 한국병합에 이른 과정이 불의부당하듯 한국병합조약도 불의부당하다”라고 지적했다.

    성명서에는 한일병합 조약을 애초부터 불법 무효로 해석한 한국정부의 해석이 맞으며, 한국의 독립운동 역시 불법운동이 아니라는 취지의 내용도 포함됐다.[12]"

    자세한건 알고 싶으시면 위키백과에 가서 한일병합 치시면 다 나옵니다

    창씨개명 누구나 다했다구요?

    마찬가지로 위키에서 퍼왔습니다

    "창씨개명(創氏改名 そうしかいめい) 또는 일본식 성명 강요(日本式姓名强要)는 1940년 2월부터 1945년 8월 광복 직전까지 일본 제국이 조선인에게 일본식 성씨를 정하여 쓰도록 강요한 것을 말한다.

    1939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제령 제19호)하여 조선에서도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따르도록 규정하고,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씨(氏)'를 정해서 제출할 것을 명령하였다.[1]

    일부 친일파들은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에 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인의 희망에 따라 실시하게 되었다는 창씨개명은 1940년 5월까지 창씨계출(創氏屆出) 호수(戶數)가 7.6%에 불과하자, 조선총독부가 권력기구에 의한 강제, 법의 수정, 유명인의 동원 등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그 비율을 79.3%로 끌어올렸다.[2]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함으로써 조선인들은 일본식 씨(氏)로부터 해방되었다. 1946년, 미군정과 소련군정의 '조선 성명 복구' 조치로 창씨(創氏)한 성씨는 폐지되었고, 창씨개명했던 조선인들은 본래의 성명을 회복하였다."

    조금씩만 수고 하시면 올바른 지식 접하실수 있습니다

    아주 우리 국민을 근본도 없는 사람들로 만들어 버리는군요

    그당시 성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다구요 ㅋ

    정말 소가 웃을일 입니다

    다시 글 올리려면 삼일 기다려야 합니다

    다시 올바른 지식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케미컬나이트 13-08-20 16:22
    뼈속까지 친일 입니다.

    1106번 뎃글보고 어이상실.....

    이제 한일병합이 조선에겐 희망이었다 라는 말까지 나오는군요.

    신경쓸 가치조차 없으니 그만 기운빼세요...
    맘대로 13-08-20 16:28
    저는 친일 안하고는 못살겠던데요

    친일 안할려니 낚시 자체가 친일 없이는 불가능 하네요
    誠敬信™ 13-08-20 17:14
    네 계속 친일 하십시요^^*

    그건 님의 자유 입니다

    뼛속까지 친일해서 대통령 된사람도 있습니다
    케미컬나이트 13-08-20 16:53
    ㅎㅎㅎ 대단하죠?ㅎㅎㅎ
    내일은꿈 13-08-20 17:07
    재가 창씨계명에대해 쓴 글은 밑에 한줄밖에 없습니다

    잘못된거라도 있나요 ?

    誠敬信™ 13-08-20 17:13
    자발적으로 창씨개명한 사람들이 문제지요

    위의글 안보셨을리는 없고요

    1940년까지 7.6%입니다

    그 7,6%안에 있으면 님의 부친은 친일에 가깝다 봐도 무방할듯 싶습니다

    자명한 일을 물흐리지 마시구요

    자주독립을 위해서 사재 털어서 독립운동 하시던 선열들과

    혈서를 써가며 만주사관학교에 입학한 사람과는 누가 더 옳은 사람일까요?
    내일은꿈 13-08-20 17:29
    난독증 ?
    자의든타의든 창씨계명 80프로가 넘는데 무슨 ?
    위키에79프로로 되어있네요 ?
    타 백과사전은 80프로이상이상 조선총독부자료에는 거의100프로

    창시계명 이 194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거 아니었나요 ?
    식민지가 1~2년하다 만것도 아니고 36년입니다

    친일파를 예로 박정희를 꼽으셨는데
    그렇다면 혈서를 쓰고 친일을 한 증거를 제시하셔야죠 ?
    誠敬信™ 13-08-20 18:01
    타의와 자의를 구분 못하시는군요

    잘 구분 못하시니 쉽게 말씀 드리지요?

    모든재산 다팔아 독립운동한분과

    만주사관학교에 입학한 다카키 마사오랑은 누가 옳은길을 간것이지요?

    이글에 답하시면 증거 드립니다
    내일은꿈 13-08-20 18:58
    답글달 가치도 없는데

    창씨계명을 하고 안하고의 자유가 있었습니까

    누가 자의적으로 얼씨구나 창씨개명 했지요? 박정희가요 ?

    당시 우리나라에 군대존재했었나요

    그럼 만주군관학교 가서 독립군이라도 때려잡았습니까 ?

    박정희당시의 만주군관학교 관할지역은 독립군이 다 철수한후였고

    한국인 장교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이 다 친일파라는 논리 어디서 나온겁니까 ?

    그럼 한국창군전사에 보면 당시 만주군장교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던 장교들명단에 박정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

    그럼 이제 혈서를쓰고 독립군때려잡은 이야기 좀 들려주시죠
    내일은꿈 13-08-20 19:11
    誠敬信™ 13-08-20 23:24
    ㅎㅎㅎ

    독립군이 옳다는것을 알면서도 차마 이야기 하지 못하시네요?

    아직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 옳은길을 간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답하실수나 있으시겠어요?
    내일은꿈 13-08-20 23:52
    좌즘 종특 나오십니다

    제 글이 이해가 안되시나요

    자신이 쓴글에 책임을 지셔야지 무슨 해괴한 논리는 ?

    엄마 ,아빠중에 누가 더 옳아요 ? 장난 합니까

    혈서논리는 제가한게 아니고 님이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무슨 제답변이 마음에 들면하고 ㅎ 자신이쓴글에 최소한 진실을 밝히시거나 변명은 하셔야지요?

    그게 토론하시는분들의 의무이자 책임아닌가요
    면장 13-08-20 19:26
    외람되지만
    그만 하시는게 좋을듯 합니다
    자의더라도
    당시 글도 모를 뿐더러 민족이나 국가개념도 이해할 여유가 없는
    그야말로 먹고사는 것만이 오직 삶의 전부인 그들에게 무슨 방법이 있었을까요?
    선생이 권하면 하고 이장이 하자면 하고 옆집사람이 하면 해야하는줄 아는 그들에게
    자의라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자의라는 구실을 붙혀 프로테이지를 높이는 저들이 구차한것이지요,

    당시 상황을 이해하려 들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젊은 세대들를 호도하고
    잘못된 정보를 주입시켜 자신들의 입지를 넓히고자 혈안 돼 있는데도
    정부와 국가와 민족이라는 주체가 일관된 국론을 모으지 못하고 방치하는 현실이 슬픈거지요
    誠敬信™ 13-08-20 23:26
    안녕 하시죠?

    면장님의 글에 수긍을 하면서도 차마 수긍하지 못하는 부분은요

    정부와 국가와 민족이라는 주체가 일관된 국론을 모으지 못하고 방치하는게 슬픈것이라 하셨지요?

    슬프지만 정치꾼들이 선동을 해서 더욱 갈라놓는다는것이 정확한 표현 일겁니다
    맘대로 13-08-20 22:25
    삭제되었습니다
    늪사랑 13-08-20 17:28
    대한민국 현대사의
    민족 주체성을 말아 먹은 곳은 영남하고도 대구입니다.
    저수지를들어올리 13-08-20 18:49
    흠...늪사랑님...

    보기가 좀 그렇네요...

    전 영남 상주에서 태어나 지금가지도 살지만...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좀 많긴 하지만, 전부가 그런것은 아닙니다.
    면장 13-08-20 19:31
    죄송하지만
    가급적 특정지역을 폄하하는 글은
    서로의 감정을 위해 삼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거듭 죄송합니다^^
    늪사랑 13-08-20 20:40
    대한민국 경찰 !
    영남경찰. 호남경찰 따로있고, 대구 경찰. 광주 경찰이 따로 있습니까 ?
    경남에서 태어나 국민학교 6학년 때 부터 줄곧 대구에서 살고있습니다.
    지역감정을 일으키자는게 아닙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영토 내에 살고있는 한민족입니다.
    새누리 조명철의원의 수서경찰서 권은희 수사과장에게
    "광주경찰입니까, 대한민국 경찰입니까 ?"
    이런 놈을 국회의원이라고......
    국회가 이런 꼴이니 일본의 속국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맘대로 13-08-20 22:27
    삭제되었습니다
    맘대로 13-08-20 22:22
    삭제되었습니다
    맥가이범 13-08-20 22:29
    언제까지 친일파의 망령에 사로 잡혀 사시렵니까?


    제가 일본이 좋아서 조상들이 친일파라서 친일파들을 변명하고 미화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대한민국 땅이란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다케시마라고 부르며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세계 여러나라에 아직도 피해자들이 살아있는데도 성노예(종군위안부)를 인정하지 않는데


    하물며 한일합방의 무효를 인정하라고?

    이제 와서 한일합방이 무효가 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일제시대에 힘없이 죽어나간 조선의 국민들이 살아서 돌아 온답니까? 잃어버린 청춘이 회춘 된답니까?

    파괴되었던 문화재가 복원되고 수탈되었던 문화재와 지하자원과 농수산물들이 되돌아 온답니까?


    간도 만주등등 얽힌 것들이 많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중국이 만주는 커녕 간도땅이라도 내어 주겠습니까?

    현실을 직시 하셔야지 이상만 가지고 무엇을 이루실려고….




    축구시합을 하는데 상대방이 헤딩을 하는척 손을 사용해서 골을 넣었습니다.

    핸들링 반칙이라고 항의 했는데도 불구하고 심판은 골로 인정하여 결국 경기에 지고 말았습니다.


    정말 억울합니다 어떻게 해야 겠습니까?

    심판을 잘못 보았다고 심판을 때려줄까요?

    양심을 속이고 손을 사용해서 골을 넣은 놈을 찾아가서 나쁜 놈 이라고 때려 줄까요?

    골대 앞까지 공이 날아오도록 제대로 수비를 못한우리의 실력이 부족함을 인정하고

    다시는 패배의 수모를 당하지 않도록 열심히 연습하여 실력을 향상 시키는게 맞을까요?


    연습하기 싫으면 가만히 계셔야지 다시는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실력을 키우기 위해

    열심히 연습하는 사람들을 훼방하고 왜 자꾸만 끌어들여서 그 놈들을 때리러 가자고 하십니까?

    몇 대 패고 나면 우리의 실력이 올라갑니까? 승부가 무효가 됩니까?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고 하던데




    일제식민시대를 잊어버리자고 하는게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일제시대를 치욕의 역사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분하고 억울하고 답답해도 어쩔 수 없는 우리 역사입니다


    일본제품 불매운동?

    우리도 일본에 수출하는데 이것은 쪼잔한 아이들 싸움이죠

    삼성이 소니를 앞서고 현대차가 도요타를 앞서가는게 극일이고

    국가의 경제력을 높여 일본보다 잘 사는게 복수하는 것 이라고 지난번 글에도 써놓았는데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이 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입니까?

    영국이란 나라가 동서로 지구를 한바퀴 돌아가게 길게 생긴 땅을 갖고 있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입니까?

    당시 선진 강대국들은 전세계의 힘없는 나라를 자국의 식민지로 만드는게 유행이었죠.

    그냥 쳐들어가서 이제부터 너희들은 우리나라의 식민지이다 그러면 그냥 식민지가 되는 것 입니다.

    동물사냥 하듯이 잡아와서 노예로 부려먹는게 당연시 되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가 무엇입니까?

    원인이 어떻든 결국은 프랑스나 미국이나 조선을 어떻게 요리해 먹어볼까 찝쩝대던것 아닙니까?


    청일전쟁 러일전쟁은 왜? 일어났습니까?

    19세기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서로 조선을 차지 하겠다고 싸운전쟁 아닙니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으니 일본식민지가 된 것 이지 러시아가 승리했으면 러시아의 식민지로 살수밖에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러시아가 이겼으면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던 1991년 까지는 대한민국은 없었을 지도 모르고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이겼다면 대한민국은 탄생하지도 못하고 중국의 자치구나 성으로 남아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걸 가지고 일본에 합병된것이 다행이란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당시 국제 정세가 그렇다는것 입니다.





    제가 한일합방이 정당하다고 말했나요?

    우리가 아무리 불법이라고 인정 못한다고 떠들고 일본의 지식인들이 아무리 성명을 발표 한다 해도

    도덕적으로는 한일합방이 불법인 것이 맞는 말이겠지만

    당시에 주심들 ( 강대국 )이 인정하면 그게 국제법적 판결이란 겁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도록 러시아와 일본의 중재를 한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것을 중재하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국제사회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저도 위키백과에서 퍼왔습니다.

    포츠머스 조약(Treaty of Portsmouth)은 1905년 9월 5일 미국 뉴햄프셔 주에 있는 군항도시 포츠머스에서

    일본제국의 전권외상 고무라 주타로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 간에 맺은 러일전쟁의 강화 조약이다.

    미국의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 조약의 주선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조선은 원래 청나라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그러나, 개항 이후 청나라, 러시아,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는데,

    일본이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데 이어 1905년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게 된다


    회담주요내용

    (1)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에서 정치•군사•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또 조선에 대해 지도•보호•감독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

    (2) 러•일 양군은 랴오둥 반도 이외의 만주 지역에서 철수하며 만주에서 청나라의 주권과 기회균등 원칙을 준수한다.

    (3) 러시아 정부는 청국 정부의 승인을 얻어 랴오둥 반도(뤼순, 다롄) 조차권, 창춘-뤼순 간의 철도, 그 지선,

    그리고 이와 관련된 모든 권리와 특권을 일본에 양도한다.

    (4) 양국은 만주의 철도들을 비군사적인 목적으로 경영한다. 단 랴오둥 반도 지역은 예외로 한다.

    (5) 일본이 배상금을 청구 하지 않는 대신, 북위 50° 이남의 사할린 섬, 그 부속도서를 일본에 할양한다.

    그러나 이 지역은 비무장지역으로 하며, 소오야(宗谷), 타타르(Tatar) 해협의 자유 항행을 보장한다.

    (6) 동해•오호츠크 해•베링 해의 러시아령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인에게 허용한다.


    국제 사회는 (1) 조항으로 러시아가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를 공인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 권익을 인정한 것일 뿐 한국 병합을 용인한 것은 아니라는 태도를 보였다.






    일본이 필사적으로 전쟁 준비를 하고 있던 긴박하던 1903년, 고종과 대한제국 정부는 어떻게 처신했던가.

    그들은 탕진된 국고를 모두 쏟아서 고종의 즉위 40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고종은 외국의 축하사절들이 오면 항구에서 예포를 쏘며 맞는 예전 행사에 쓰려고 양무호라는 노후한 군함을 일본에서 사들였다.

    “갑판에 포대 몇 개가 있는 낡은 3000t급 함정을 ‘승무원은 모두 일본인을 고용한다’는 불리한 조건으로 50만엔의 거금으로 샀는데,

    너무 노후하여 수리비가 구입비만큼 들어간다”는 소문이 나면서 주한 외국인들의 비웃음은 물론

    독일 일간지 등 유럽의 신문에까지 보도되어 국제적 망신과 경멸을 샀다.


    그 격동의 시절에 주한 미국 공사로 활약했던 외교관 알렌은 대통령인 루스벨트와 마찰을 빚으면서까지

    본국 정부에 대하여 반일정책을 강력히 요구했던 친한파 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코리아는 국민들이 정부보다 낫다”고 탄식하고 국가적 위기에 전혀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통치자 고종을 가리켜 “코리아에는 재앙”이라고까지 부르며 절망했다.




    주변국들 보다 빨리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해 힘없고 무지하고 무능하여 일본의 식민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우리 자신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런 수모를 겪지 않도록 하나가 되어 노력하여 국력을 키워나가는 것만이 진정한 복수며 우리가 지향해 나아갈 바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誠敬信™ 13-08-20 23:21
    그정도 혜안을 가지고 계시니 참 다행입니다

    그럴듯 하게 민중들의 책임으로 돌린 님의 글을 보고 도저히 참지 못하겠어 이글 올렸습니다

    지금 친일파를 단죄하자는것 아닙니다

    허나 점점 왜곡되어지는 역사를 바로잡을 필요는 있지 않을까요?

    그래 그때는 내가 그랬다 잘못했다

    이정도로 하면 그만입니다

    지금 자기들의 안위를 위해 역사까지 왜곡시키고 있는것 보이지 않나요?

    대선당시 다카키 마사오가 검색1위를 한적 있습니다

    그만큼 숨기고 싶은 과거였겠지요

    님께서 옮겨온글은 님께서 공감을 느꼈기에 퍼오신것 아니겠습니까?

    3일후에 님의 글에 반박글 다시 달 예정입니다

    한일병합당시의 상태 우리임금님께서 직접 갖다 바치셨다구요?

    그때의 당시상황을 위키에서 확인 해보셨는지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말씀 해주셔야 합니다

    좋습니다

    내일은꿈님께 직설적으로 여쭈었지만 정확한 대답을 피하시네요?

    님께도 여쭈어 보겠습니다

    재산 처분해 독립운동에 쏟아부은 부자가 바른길을 간것일까요?

    아니면 만주사관학교에 입학한것이 바른길일까요?
    맥가이범 13-08-21 00:05
    갔다 바치다니요?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이유를 말씀드렸는데


    합방이란 미명이 붙였지만 힘이 없어서 할수없이 강제적으로 그냥 합친것 입니다.

    그렇게 만드느라고 수고했다고 루즈벨트 대통령이 노벨상까지 받게 된것이 당시 국제사회의 정서 였다는것 입니다.


    독립운동과 만주사관학교 이야기는 너무 긴 이야기라 기회되면 다음에 쓰겠습니다.
    天地不仁 13-08-20 22:49
    지금 대한민국은 친일파들이 잘 살죠 역같은 나라죠 우니라나보다 후진국인 필리핀도 친일파 다 정리했는데...
    天地不仁 13-08-20 22:56
    고종(高宗, 1852년 7월 25일 - 1919년 1월 21일)

    조선의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광무황제(光武皇帝, 재위 1897-1907)이다. 본명은 재황(載晃). 아명은 명복(命福). 자는 성림(聖臨). 호는 주연(珠淵). 시호는 고종통천융운조극돈윤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립기지화신렬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황제(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皇帝).



    헌의 대원왕(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의 차남이다.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헌의 대원왕과 대왕대비 조씨(신정왕후)의 후원으로 12세에 즉위하였다.[1] 장남인 재면 대신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나이가 어려 섭정을 하기 수월해서이다.



    즉위 후 10년은 헌의 대원왕이 섭정을 하였다. 즉위 초기는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노골화되어 프랑스(1866), 미국(1871) 등과 강화도에서 군사 분쟁을 겪었으나 헌의대원왕은 단호한 집념으로 이들을 모두 물리쳤다. 국내적으로는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여 오직 47개소만 남겼으며 여흥 민씨 집안의 딸을 왕비로 맞으니 곧 명성황후이다.



    1873년 흥선대원군의 섭정은 최익현의 탄핵을 받아 끝나고, 비로소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여흥 민씨의 척신 정치의 경향을 보였다. 1876년 일본의 압력으로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후 조정은 개항을 가속화하였다.



    1882년 청나라의 중재로 조선-미국 수호 조약의 체결을 시초로 구미 각국과 수교하고 1883년에는 민영익 등 보빙사(報聘使)를 미국 등 서방에 파견하여 임오군란(1882) 이후 비대해진 청나라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 박영효(철종의 사위) 등 개화파가 고종을 보필하였으나 고종의 입장은 중립적이었으며 마침내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급진 개화파의 혁명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청나라의 압력은 더욱 거세지고 러시아의 위협 증대와 이에 대항하여 영국 군함이 거문도를 일방적으로 점령(1885-1887)하는 사건이 잇달았다.



    이후 소강 상태를 거쳐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 양국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마침내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때 고종은 김홍집 등 중도 개화파를 등용하여 갑오개혁을 시행하고 개국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홍범 14조를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개화의 문을 열었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직후 명성황후가 러시아와의 접근을 시도하는 등 일본을 공공연하게 자극하다가 1895년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었다.



    고종은 김홍집 내각의 건의로 을미개혁을 시행하여 연호를 건양으로 고치고 태양력을 채용하였으며 단발령을 공포했는데 이것이 국민 감정을 자극하고 말았다. 1896년 2월 고종은 당시 친러파였던 이완용 등의 끈질긴 종용으로 왕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으며,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었다.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막강해지고 열강의 이권 각축 경향을 보였으나 고종은 1897년 덕수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라 정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후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서재필 등이 독립 협회를 창단하여 대한 독립의 공고화와 입헌군주제의 수립을 호소했으나 조정의 보수 대신들이 지원하는 황국 협회가 새로이 결성되어 양측은 노골적으로 대결하였다. 결국 고종은 두 단체를 모두 해산시키고 정국은 다시 소강 상태가 되었다.



    일본은 1904-1905년의 러일전쟁을 통해 러시아는 물론 한반도에서의 열강의 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전쟁 기간 중에 대한제국 정부에 각종 조약을 강요함으로써 그 영향력을 극대화시켰다. 고종이 이를 척결하기 위하여 1907년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밀사를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파견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본의 압력으로 고종은 황태자(순종)에게 양위하고 태황제(太皇帝)가 되었다. 고종 양위 사건 참조.



    이후 일본의 영향력 증대가 가속화되었으며 마침내 일본의 강압으로 1910년 한일 합병 조약이 성립되었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세상을 떠났는데 이를 놓고 항간에 독살설이 나돌기도 했으나 실제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고종황제는 한일합방이후 일본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했기 때문에, 독살설은 근거없는 주장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천년학 13-08-20 23:35
    여러분! 여기 더러운 토사물과 같은 역사왜곡의 정점에 치닿는 이들과 말섞을 필요 없습니다.
    월척 총 회원이 몇분이신가요?
    저는 여기 이슈방에 그저 눈길만 주시는 분들도 충분히 보시고 이해하셨을거라 짐작하고, 이글을 씁니다.
    어느 회원님께서 그러시던데,
    '상대하는 이가 질려서 떠나버리게 만들려는는게 그들의 목적!'
    완전 공감백배 합니다.
    제 주위에는 젊은층이 많습니다. 일베라는 그 바퀴벌레보다 못한 인간들만 모인곳과 여기가 뭐가 다릅니까?
    그것도 나름대로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몸으로 겪으신 분들께서,
    순고한 정신으로 나라사랑을 외치며, 한몸던져 충성하셨던 애국열사들이 자신의 안위와 번영을 위해서 그리하셨습니까!
    어째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십니까,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세상이 알고 여기 회원이 알고 우리가 알면 되는것입니다. 빌어먹을 가치관은 저기 배스 아가리에 쳐넣어 주시길...
    아...덕분에, 슬프게 하루를 마감하는군요.
    일베충 어르신들 그럼 편히 두다리 쭉펴고 쥐나십시요.
    맥가이범 13-08-21 00:16
    역사 왜곡?

    어떤게 역사 왜곡입니까?

    미화한다고 역사가 바뀝니까?

    인정할것은 인정하고 힘없어서 당했던 과거를 잊지말고 힘을 길러 부강한 국가를 만들어 가자는 것인데

    사사껀껀 트집잡고 늘어진다고 국가가 발전되겠습니까?





    말은 정신을 담는 그릇이고 행동을 지시하는 나침반이라고 합니다.

    싸우려고 오신것 아니라면 좀더 순화시켜서 말씀하시기 부탁합니다.




    .
    천년학 13-08-21 06:33
    나는 싸우려고 여기 있는게 아닙니다.

    말은 정신을 담는 그릇이고 행동을 지시하는 나침반 입니다.

    ---최근에 올리신 많은 글귀 가슴에 새기며, 내 주위를 한번 둘러봐야 겠군요.
    남의 말을 빌어 말하려 하지 말라는 제 말도 귀담아 들어주시고,
    합법한 한일합병과 2천만 국민이 바라던 한일합병 만천하에 알려주시는데 뜨겁게 매진 하소서~~~

    -Good Game ^^
    천년학 13-08-20 23:40


    이 글자를 보고 부끄러워 해야 하실분들, 제발..... 좀... 적당히 찌그러져 주시길....
    맘대로 13-08-21 00:23
    삭제되었습니다
    천년학 13-08-21 06:27
    삭제되었습니다
    맘대로 13-08-21 00:58
    토론은 토론으로 해야지 인신공격으로 하다가 이번에 살인 사건도 난거 아닙니까

    애들처럼 이러지 맙시다
    한결같은 13-08-21 02:23
    황국 신민 박정희의 친일행적

    1940년대는 식민지 조선의 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민족독립과 해방을 위해 상해,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일제와 투쟁을 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우리의 민족영웅 박정희는 그 시대에 어떠했는가?
    박정희는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긴 칼을 옆에 차고 싶은" 욕망을 위해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保國滅私奉公)", 즉 "충성을 다해 일본에 보답하고,
    나를 죽여 국가를 받들겠다."며 일왕에게 바치는 충성혈서(忠誠血書)를 써서
    만주신경군관학교로 보냈다.
    안중근은 손가락을 잘라 태극기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는 혈서를 쓰고 항일 독립군이 됐지만,
    박정희는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保國滅私奉公)"이란 혈서를 耗?덕택에 일제의 철저한 신원조회· 사상검증에도 불구하고 1 940.4.1 일 만주신경군관학교에 입교해 꿈에도 그리던 일본군 장교가 된 것이다.
    당시 동료교사였던 유증선이 "박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라며 제안하자 박정희는 그 자리에서 찬동하고 혈서를 썼다고 한다.
    유증선은 만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박정희 이야기가 실렸다고도 증언했다.
    박정희추종자들이 주장하길, 유증선은 박정희를 음해하기 위해 만들어 낸 허구인물이라 한다.
    하지만 유증선은 안동교육대 국문과 교수를 지냈고 박정희가 죽기 석 달 전 박정희로부터 청와대 초청까지 받았던 실존인물이다.

    1962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비서였던 이낙선 중령이 정리해둔 비망록에도
    "원래 일본 육사는 연령초과였고 만주군관학교도 연령초과였으나 군인이 되고자 하는 일념에서 군관학교에 편지를 하였다.
    그 편지가 만주신문에 났다. 이렇게 군관을 지원하는 애국 정신이 있다고…
    " 이러한 당시 혈서론의 근거를 뒷바침할 취재 내용이 들어있다.
    이 내용들은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도 나온다.
    박정희 찬양이라면 진실과 상관없이 미쳐 날뛰는 조갑제조차 충성혈서(忠誠血書)의 존재롼 인정하는 글을 쓴 것이다.
    설마 박통교의 교주 조갑제가 박정희를 음해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겠는가?
    내일은꿈 13-08-21 08:34
    아따 조갑제 어르신을 다 믿으시고 글까지 인용하시네

    근데요

    나이제한에 걸려 혈서편지 ?

    당시 신흥군관학교 입대연령제한이 26세 까지 입니다 그럼 나이제한에 걸려 혈서를 쓰고 진충보국?? 했다는것은

    그냥 소설 구라 맞지요 ?

    한결같은 13-08-21 10:02
    삭제되었습니다
    한결같은 13-08-21 10:34
    삭제되었습니다
    내일은꿈 13-08-24 11:15
    삭제되었습니다
    한결같은 13-08-21 02:26
    '<박정희 친일행적 1 0가지>에 대한 명쾌한 반박'이라는 글을 보면,
    혈서론의 출처인 만주일보는 1927~1934년까지 존재했다고 한다.
    즉 1934년에 폐간되었으니 박정희가 입교한 1 942년에는 만주일보가 없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1 940년에 만주신경군관학교 입교).
    그 근거로 서울대 소장목록을 들었다.
    그러나 서울대 소장목록은 말 그대로 1927~1934년 사이에 발행된 만주일보롼
    서울대가 소장하고 있다는 얘기지 실재로 만주일보가 존재했던 기간은 아니다.

    만주일보(滿洲日報)는 1 919년 7월 2 1일에 만주 봉천에서 친일 언론인인 선우일(鮮于日)이 창간한 친일지로 폐간과 재창간을 반복했었는데,
    신경군관학교 2기생 예과 졸업식의 박정희 사진에서 보듯 1942년에도 존재했던 신문이다. 만주일보의 <창간-폐간연도>도 모르고 박정희가 입교한 해도 모르면서 거짓글을 써댄 글쓴이와 '명쾌한 반박'이라며 입이 쩌억 벌어진 수만명의 꼴통 박사모 회원들...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신경군관학교 2기생 예과 졸업식에서 박정희는 우등상을 받고
    부상으로 부의 황제 명의의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박정희는대열 앞에서 생도 대표로 인사하였다
    졸업식장에서 재학생의 송사에 답하는 졸업생 답사를 낭독했는데,
    그 답사 내용 중에는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라는 구절이 명백히 포함되어 있다.
    (滿洲日報 1942.3.24)

    "빛나는 우등생 오카이(日系), 고야마(日系), 다카키(鮮系-박정희) 등 5명에게
    각각 은사 상증의 전달이 있고 폐식 하였다."
    (滿洲日報 1 942.3.24)

    "매년 가을이 되면 군관학교에는 생도 전원이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행군연습을 실시했다.
    박정희는 그때 내가 맡은 소대의 제1분대장이었는데,
    다른 분대장과는 달리 기합이 들어 있었고, 의욕도 대단했다.
    진지공격 연습 같은 때 대단히 어려운 임무가 부여되더라도 박정희는
    그 임무를 달성하려는 의욕으로 꽉 차있었다.
    박정희는 말수가 적고 속에 투지를 감춘 사나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박정희를 지도했던 일본인 장교)


    "다카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페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 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
    (일본 육사 교장 '나구모 쥬이치')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
    (한 일본 외교관의 『국가와 정보』라는 책에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벽력같이 고함을치곤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 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이 아닌가."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만주군 장교 출신의 박정희 동료)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1971. 10. 17 계엄이 선포되었다) 박대통령이 나를 불러요.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 장화에 점퍼 차림인데 말 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 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 만큼은 잘 알고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다."
    (동경의 한 요정에서 유창한 일본어로 기시 수상 앞에서 맹세 ..)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 사이 같은 관계로서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겁다."
    (전 자민당 부총재 오노 반보쿠)


    박정희가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한 완전한 일본인이란 이유를 대기위해 근거가 될 만한 글들을 대충 모아봤다.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지닌 분들이라면 대충 읽어도 박정희가 어떤 의식을 지닌 인물인지 충분히 느끼시리라 생각된다.
    박정희를 옹호하고자 하는 변명이 일왕에게 충성한 황국신민이 되기 이전인 교사로 재직시 박통 제자들의 증언이라니 이또한 참으로 궁색하다.
    박정희의 친일을 판단하기 위한 기준은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 후인 일왕에게 충성한 황군이후의 일인데, 객관적 자료란게 고작 교사로 재직시의 민족교육 타령인가. 그 민족교육도 스승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는 제자들의 눈물어린(? )
    미화·왜곡된 증언이라 생각해 본 적은 있는지...
    내일은꿈 13-08-21 08:45
    금시계를 하사받고 생도 대표로
    '


    당시 생도대표로 답사를 한건 일본인 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태연하게 조작질된 글을

    자세히 반박할 가치가 없음
    한결같은 13-08-21 10:03
    할말 없으면 조작질
    한결같은 13-08-21 02:30
    저널리스트 이상우는 『신동아』1 987년 1 0월호에 게재한
    <박정희, 그 ‘컴플렉스의 정치학’>에서 다음과 같이 이 시기를 서술하고 있다.
    "박정희가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장교로 임관된 다음 처음 배치된 곳은 일본의
    마쓰야마(松山) 제14연대였다.
    그러나 곧 만주국 보병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목단강 아래 있는 영안으로 파견되었다.
    이곳은 일찍이 노령 신한촌에 웅거하던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서진할 때의 요충지로서 한인 농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박정희는 얼마 안있어 이곳으로부터 화북지방의 열하성으로 이동배치되어
    일본 북지나파견군의 열하보병 제8단에 배속되었다.
    열하지구는 만주와 중국대륙을 잇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일본군에 대한 항일세력의
    저항이 끊임없었던 곳이다.
    항일세력의 중심은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이었으나
    당시 동북지구성과 화북일대에서 일본군에 항거한 세력은 이밖에도 여러갈래가 있었다.
    국민당 정부의 국부군관 군벌군, 독립적인 항일유격군, 심지어는 만주일대의 비적들까지도
    일본군과 싸웠다. 주력은 중국인이었으나 조선인의 항일조직도 만만치 않았다.
    한인들은 임시정부의 광복군, 연안의 조선의용군 혹은 독립된 게릴라부대로서 때로는 단독으로 또 때로는 국부군이나 중공군과 함께 항일유격전을 벌였다.
    조직의 구성과 이념은 달랐지만 당시 조선인 항일부대의 목표는 우선 한가지,
    일본에 대한 무력항쟁과 조국의 광복이었다.


    박정희가 일본군장교로서 싸운 항일세력이란 이런 것이었다.
    식민지민족의 비극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속해 있던 일본군이 소탕의 대상으로 삼았던 항일세력 속에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이역에서 피흘린 동족의 청년들이 있었다. ......
    당시 일본군으로 끌려간 조선인 학병이나 징용군 가운데서는 일본군으로부터 탈주하여 항일군에 가담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
    (이상우)


    박정희 부대와 맞서 싸운 대표적 항일군사조직인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을 간단히 살펴보자.
    1942. 7 월에 중국의 화북지방(연안)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위해 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을 결성하고, 그 밑에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군을 거느린다. 조선의용군이 속한 조선독립동맹은 건국강령으로 보통선거실시, 의무교육실시, 조선에 있는 일제의 대기업의 국영화와 토지의 분배실시 등를 내걸어,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건국강령에 천명된 내용과도 별반 차이가 없던 항일조직이었다.
    즉 조선의용군은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목표로 활동한 한인무장부대였던 것이다.
    당시 조선의용군은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에 합류하지 않고, 연안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활동을 하며 8로군과 협동작전도 펼치고 화북, 만주지역에서 항일전투를 전개했다.
    또한 8로군에도 한인무장단체나 독립투사들이 소속돼 있었다.
    이들 독립투사들은 독자적 군대를 결성하기 힘들어 민족 독립을 위해 무기를 얻고자 8로군에 들어간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박정희가 "독립군을 110여회나 토벌했다"는 이야기의 시발점은 진보학자의 주장이 아닌 1960년대 박정희추종자가 쓴 박정희 전기다.
    다만 이 책은 박정희의 친일전력을 덮기 위해 박정희의 일본군 복무경력을 반공투쟁으로 미화시켜 항일세력들을 공비들로 둔갑시켰다.
    공비들로 매도된 그 분들이 일제와 맞서 싸운 항일운동가로 인정받게 됨에 따라 1 10여회의 토벌설은 오히려 박정희의 악행으로 부메랑이 돼 인터넷상에도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다시말해 110회 토벌설을 먼저 주장한 쪽은 아이러니하게도 박통교 친일수구꼴통들이었다.
    왜 박정희는 자신의 추종자가 쓴 이 내용에 대해 침묵했으며, 왜 추종자들은 이제와 자신들이 주장하고 인정했던 110여회의 토벌사실을 좌파들의 박정희 죽이기라며 부정하는 건가?


    만주8단에 같이 근무했던 선배와 동기들의 증언을 통해 박정희가 일선 소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독립군 토벌작전에 수차례 참가한 사실은 이미 확인되었다.
    박정희가 110여회나 독립군 토벌에 적극 나섰다는 주장은 개인적 생각으론 과장됐다고 생각하지만, 간도특설대나 만주보병8단 출신들의 증언도 자신들의 죄를 축소하기 위해 박정희의 전력을 축소시켰을 가능성이 많아, 박정희가 겨우 수차례 토벌작전에 참가했다는 이들의 이야기 또한 그 신빙성이 희박하다.
    당시 박정희와 함께 우수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한 중국인 우쉬에원 씨의 증언에 의하면
    "나와 다른 2명의 동급생은 육사 졸업 후 항일 전선에 가담하기 위해 도망쳤지만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로 다시 돌아가 견습군관을 거친 후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고 했다.


    또한 일본인인 다카야나기 도시오 일본 법정대 교수조차도
    "당시 공비로 불리던 독립군 토벌이 군관학교의 역할"이라며
    "황국군인으로 길러진 청년 장교들이 만주국의 통치수단이었으며 동시에
    소련과의 전쟁준비에 이용됐다"고 했다.
    어쨌든 박정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과 맞서 싸운 항일운동가들을 적으로 삼는 제국군인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황국신민(皇國臣民)이란 사실엔 추호도 변함이 없다!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는 조선인(재일동포 포함)으로 구성된 특수부대로 육군군관학교 조선인 출신들이 이들을 지휘, 일명 ‘독립군 사냥개’집단으로 불리었다.
    5·16쿠데타의 핵심역할을 했던 군인 대부분이 육군군관학교 출신이다.
    만주국군은 1932년 3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제1단계 치안숙정’기간을 정하고 대부대를 동원하여 ‘집중적 배치전술’로 항일운동의 중심지를 대규모적으로 토벌하였다.
    이 기간동안 1만여 명의 항일운동가들과 무고한 사람들이 집단도살당하거나 살해되었고 700여 채의 가옥이 전부 불에 탔으며 650만 권에 달하는 역사책들이 소각되었다.


    이러한 탄압과 함께 같은 해 5월부터 만주지역에는 일제의 앞잡이(개)를 잡는 유격대조직인 일명 ‘개잡이 부대’들이 우후죽순처럼 조직되어 무장투쟁을 벌였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만주제국 옌볜(延邊,간도성) 초대성장 이범익 (李範益,기요하라 노리에키·淸原範益)은 1 938년 9월1 5일 일제 조선총독부에 조선청년들로 결성된 특수부대를 옌볜에 조직할 것을 제의하였다.

    일제 조선총독부는 이 제의를 쾌히 받아들여 안투(安圖)현 치안대, 훈춘(琿春) 국경감시대,
    옌지(延吉) 청년훈련소, 펑톈(奉天,선양·瀋陽) 육군군관학교와 기타 만주국군 부대에서 일본인 군가 7명, 조선인 위급군관과 사관 각각 3명을 선발하여 안도현 명월구에 조선인 특설부대 본부와 분부를설치했는데 후에 이 부대를 ‘젠다오 특별설치부대(間島特別設治部隊)’라고 불렀다.


    당시 연길 특무기관장 겸 옌볜지구 고문인 오코시 노부오(小越信雄) 중좌는 조선인 거주지구에 조선인으로 구성된 간도특설대를 새로 설치하였는데 간부 이하 전원은 조선인이었다.
    간도특설대 대장은 야나가와 가즈오(梁川一男) 소교였고 부대장은 고모리야 요시카쓰(小森谷義一) 상위였으며 연장은 하시기 기요시(橋木淸) 상위였다.
    병사는 제1 , 2 련 및 기관통련이 각각 120명씩으로 360명이었다.
    나머지 각 부대 대장은 와타나배 주고로(渡邊捨五郞), 소노베 이치지로(園部市二郞),
    사사키 고로(佐佐木五郞), 시바타 기요시(柴田淸) 소교였다.


    간도특설대는 옌볜 각지의 병력을 집결하여 이르는 곳마다
    ‘수비대’
    ‘헌병대’
    ‘경찰서’
    ‘분주소‘
    ‘산림경찰대’ 그리고 각종
    ‘특무기관’을 설치하였다.
    민족반역자 집단인 간도특설대는 1945년 8월20일 중국 만리장성 부근인 리허(熱河)성에서 조선의용군 토벌을 감행하다 뒤늦게 8 ·15광복소식을 듣고 선양에서 해산됐다.
    간도성 특별설치부대는 그 암흑의 나날 민족앞에 천추에 용납못할 악행을
    저지른 민족반역자 집단이었다.


    한편 간도특설대 중대장급 군관이었던 육군 중위 박정희(朴正熙,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는 광복 후 시세에 편승하여 중국 하북지대 조선족 청년들을 모아 ‘조선의용군’에 참가하려 했으나 추방당했다~.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 결전편>
    한결같은 13-08-21 02:30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 관련 박정희 의혹들


    ①박정희가 속했던 보병 8단이 간도특설대와 연합했다는 증언.
    ②박정희가 간도특설대에 있다가 갔다는 의혹.
    ③같이 근무했던 부대원들의 입을 통해, 박정희가 북간도로 건너가
    '간도조선인특별부대'에 자원 입대했다는 증언.
    ④1980년 8월 1 8일에 육군본부가 펴낸 '창군전사'란 자료집에 박정희가
    '간도특설대'에 장교로 근무했다는 기록.
    ⑤1991년에 중국만주지방의 조선족 유지들이 발간한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 결전편>에 "특설부대에 참가한 자들은 모두 민족반역자들이다.
    박정희는 특설부대의 중대장급 군관이었다.
    그는 해방이 되자 시세에 편승하여 하북지대 조선청년들을 묶어세워 조선의용군에 참여하려 했다. 그러나 받아주지 않자 곧추 남조선으로 내뺐는데 그 뒤 우익세력을 긁어모아 나중에는 대통령으로까지 되었던 것이다."라고 기록.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의 편집위원들은 65명이나 되며 연변대학 총장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조선족 학자들이 위원을 맡고 있다.
    이 책은 중국 조선족역사연구에 있어서 가장 방대하고 신빙성이 있는 자료집으로,
    박정희가 간도특설부대 출신이라는 사실은 연변 역사학계에서 공동으로 인정한 정설이다.
    현존하는 간도특설부대 관련 서류에 특설부대 성원 전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일설에 따르면 간도특설부대 성원은 743명으로 79명의 십 배에 가까운 숫자라한다.
    지금은 한줌 흙이 된 합창의장 출신의 장창국이란 인간도 박정희를 비밀광복군으로 미화시키는 글을 쓰다가 "일본은 만주 서남부와 중국북부에 투입할 용맹한 부대를 선발하여 특수부대(철석부대)를 만든다.
    여기에 조선인 부대인 [간도특설대]도 선발되는 영광을 얻는데 그 속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주일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며 박정희가 간도특설대에 관련되었다고 인정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와같이 박정희가 간도특설대와 관련되었다는 자료와 의혹들 또한 상당하다.


    보통학교 교사에서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거쳐 만주군 장교로,
    박정희에서 다카키 마사오로,
    다카키 마사오에서 오카모토 미노루로,
    오카모토 미노루에서 다시 박정희로,
    만주군 중위에서 가짜 광복군 중대장으로,
    가짜 광복군 중대장에서 대한민국 육군장교로,
    제국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로,
    공산당 최고위급 간부가 공산당 진압군 작전장교로,
    무기징역 죄수에서 다시 육군 정보장교로,
    공산당 최고위급 간부가 공산당 진압군 작전장교로,
    무기징역 죄수에서 다시 육군 정보장교로,
    '빨갱이'에서 반공주의자로,
    육군장성에서 반란군 두목으로,
    민정이양공약에서 출마선언으로,
    "개헌은 없다"에서 삼선개헌으로,
    "이번이 마지막 출마"에서 종신 대통령으로,
    어제까지 악마라고 욕하던 김일성과 손에 손잡고
    '7.4 남북공동성명'으로 전민족과 세계를 상대로 '역사적 사기'를 치고...
    한결같은 13-08-21 02:32
    박정희의 창씨개명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 ,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이회창의 부친
    이홍규는 '마루야마(丸山)'로
    김대중은 '도요다 다이쥬(豊田大中)'로
    김영삼은 '가네무라 코유(金村康右)'로 창씨개명을 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창씨개명이 시행되던 당시
    김대중은 만15세,
    김영삼은 만13세,
    박정희는 만23세였다.
    박정희는 당시 만주군관학교 생도로 본인 분명히 스스로 창씨개명을 했지만,
    김대중·김영삼은 창씨개명 당시의 나이로 봐 자신들이 했다기 보다
    일제의 강제에 의한 것으로 봐야 한다.


    김대중의 창씨개명 소식에 흥분해 앞뒤분간도 못하고 박정희의 친일행위를 덮고자
    김대중을 끌어들이는 추종자들의 작태가 가증스럽다.
    일왕에게 충성혈서를 쓰고 황국신민이 되고자 자진해서 창씨개명한 다카키 마사오와, 강제에 의한 창씨개명으로 친일파의 기준에 속하지 않는 대다수 국민들의 한 사람에 불과했던 겨우 15살의 어린 소년 김대중을 같이 엮을려는 게 말이 되는가.

    박정희의 또다른 창씨명인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라는 이름은,
    일본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가 탈출해 6000리 대장정 끝에 한국 광복군에 합류한 진짜 광복군 장준하가 주장한 박정희의 또다른 창씨개명이며 박정희의 일본군 시절 동료들이 증언한 이름이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사에 편입했을 때 다카기 마사오에서 완전히 일본 이름처럼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꾸는데, 그 증거로 일본 백과 사전엔 박정희의 창씨명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 2판에 소개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력.
    일본 이름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기록돼 있다.
    이 사전은 동경대학출판회가 2005년 8월1 5일 공식 발간한 것이다.

    '혹 떼려다 혹 붙인' 박지만씨의 '가처분 신청'

    최재천

    박정희 전 대통령 아들 지만 씨가 민족문제연구소를 상대로 낸 가처분 소송이 6일 기각 되었습니다. 먼저, 최상천 교수가
    정리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생을 한번 되돌아보지요.

    ‘시골의 평범한 학생→두목 급장→보통학교 교사→‘충성 혈서’→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제국주의자→만주 군관학교

    →일본 육사→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만주 주둔 일본군 장교→다시 박정희→가짜광복군 중대장→대한민국 육군장교
    →공산주의자→남로당 군 최고책임자→진압군 작전장교→무기징역죄수→반공주의자→육군정보장교→반란군 두목→민
    정이양공약→출마선언→대통령→“개헌은 없다”→3선 개헌→“이번이 마지막 출마”→종신 대통령→부하의 총에 사망’
    내일은꿈 13-08-21 09:34
    오카모토 미노루 ?

    일본백과사전 등등 나와있다 글은 쓰지만 증거자료는 제시못하죠 ?

    오카모토 란 일본이름을 맨처음 사용한것이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북한 노동신문에서 처음 언급됩니다

    김대중은 나이가 어려 문제가 없고 ?

    그럼 당시 학교교사는 창씨계명 하지않고 교사가 될수 있었나요 ?
    한결같은 13-08-21 10:05
    삭제되었습니다
    내일은꿈 13-08-21 10:22
    삭제되었습니다
    케미컬나이트 13-08-21 11:13
    삭제되었습니다
    내일은꿈 13-08-21 11:19
    삭제되었습니다
    天地不仁 13-08-21 20:54
    삭제되었습니다
    한결같은 13-08-21 02:34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내용
    17 박정희 朴正熙│高木正雄, 1917~1979
    만주국군 중위
    1917년 1 1월 1 4일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이다. 1 926년 4월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32년 3월 졸업했다. 1932년 4월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 3월 심상과(尋常科)를 제4기생으로 졸업했다. 1937년 4월 경상
    북도 문경면의 문경공립보통학교(1 938년 문경서부심상소학교로 개칭) 훈도로 부임해 1940년 2월까지 근무했다.

    훈도로 재직 중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하였으나 일차 탈락하고 재차 응모하였는데, 당시의 정황이 만주지역에서 발행되던 일본어신문인 만주신문(滿洲新聞) 1939년 3월 31일자에 “혈서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
    터 “라는 제목으로 상세히 보도되었다.

    기사 전문에는 “29일 치안부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서부공립소학교 훈도 박정희 군(23) 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증명서와 함께 ‘한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e
    御奉公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계원(係員)을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두렵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 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 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라고 하여 군관학교 지원의 동기와 좌절된 사연을 미담으로 소개
    했다.
    기혼자인 데다가 연령 초과로 입학 자격이 문제되었으나 다시 도전하여 결국 1 939년 10월 만주 무단장시(牡丹江市)에 소재한 제6군관구 사령부에서 4년제 만주국 초급장교 양성기관인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제2기생 선발 입학시험
    을 치르고 1940년 1월에 15등으로 합격했다. 만계(滿系 :日系 외 통합분류)
    합격자 240명 중 조선인은 11명이었다.

    자격 제한의 벽을 넘어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사자의 강고한 지원 의지와 함께 대구사범학교 재학 시 교련 배속장교로 있다가 전임하여 신징(新京) 교외 제3독립수비대 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관동군 대좌 아리카와 게이이치(有川圭一 :
    1945년 6월 오키나와에서 전사)의 추천, 그리고 대구 출신으로 신경군관학교 교관부에 일시 근무하고 있던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인 강재호 소위(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 세칭 봉천군관학교 4기)의 도움이 있었다.

    1940년 4월 신경군관학교 예과과정에 입교해 제3련(連) 제3구대(區隊)에 소속되어 군사교육을 받고 1 942년 3월 졸업했다. 졸업식에서 일계 2명, 만계 2명과 함께 우등생으로 선정되어 만주국 황제 푸이(溥儀)가 하사하는 금장 시계를 은사
    상(恩賜賞)으로 받았다.

    예과 졸업 후 타호산(打虎山)에 있는 제6군관구 예하 제5단(第五團) 제3영(營) 제8련(連)에 파견되어 2개월간 조장(組長)으로 부대실습을 한 후 다시 관동군 보병 제3 0연대 일명 다카다(高中)부대에 파견되어 3개월간 실습을 마쳤다. 1942
    년 10월 성적 우수자로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했다.

    1944년 4월 일본육사 제57기와 함께 졸업한 뒤 견습사관으로서 소만(蘇滿)국경 지대의 관동군 2 3사단 72연대[치치하얼 (齊齊哈爾)에 주둔한 관동군 635부대라고도 한다]에 배속돼 2개월여 근무한 후 같은 해 7월 만주국군제6군관구 소속 보병 제8단으로 옮겨 배장(排長 :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같은 해 7월 하순경부터 8월 초순까지 제8단의 2개 대대가 일본군 과 합동으로 팔로군을 공격할 때 소대장으로 작전에 참가했다.

    1944년 1 2월 2 3일 일본군 소위로 예비역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만주국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보병 8단 단장의 부 관실에 부임해 작전참모 역할을 하는 을종(乙種) 부관 겸 부대의 단기(團旗)를 책임지는 기수로 근무했다.

    옌지(延吉)에서 조직된 8단은 간도지구경비사령부 히노 다케오(日野武雄) 소장이 편성한 히노지대(日野支隊)를 기반으 로 출발하였으며, 처음에는 주로 동북항일연군과 소련에 대한 작전을 수행했다. 1938년 7월 말부터 두만강 유역 하산호(湖) 일대에서 벌어진 국경분쟁에서 일본군이 소련군에 패퇴하는 장고봉(張鼓峰)사건이 발생한 이후, 만주국 국경경비대를 해산하고 국경경찰대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만주군 잔류를 원하는 군인들을 기간으로 히노지대를 신설했다.

    히노부대는 장비와 전투력이 우수하고 대원들의 일제에 대한 충성도도 높다는 평가를 받아 8단의 주력으로 재편되었다.
    1943년 8단은 중국 관내의 팔로군을 공격하기 위해 러허성(熱河省)
    칭룽현(靑龍縣)과 싱룽현(興隆縣) 일대로 이동해 준화(遵化) 인근의 팔로군
    11·12단(團)에 대한 작전을 전개하는 한편 집단부락정책을 실시했다.

    1944년 4 , 5 월경부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8단은 칭룽현 서남부의 반벽산(半璧山)을 중심으로 남북 지역에 산재한 팔로 군과 교전했으며,
    이때 을종 부관으로 8단 예하 각 부대에 작전 지침과 명령을 하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8단에 근무하던 조선인 출신 장교로는 배장 방원철(신경군관학교 2기)과 제1영 본부의 이주일(신경군관학교 1기, 일본육사 56기 해 당)이 있었으며, 뒤이어 신현준(봉천군관학교 5기)도 간도특설대에서 8단 연장(連長 : 중대장)으로 전입해 왔다.

    1945년 7월 만주국군 중위로 진급했다. 1945년 8월 보병 8단 예하 각 부대는 둬룬(多倫)으로 진출해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8월 1 0일부터 이동을 개시해 8월 17일 싱룽에 집결했다. 이곳에서 일본이 패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8단의 중국인 군인들에 의해 신현준 등과 함께 직위에서 해임되고 무장을 해제당했다.

    같은 해 9월 팔로군의 지휘를 받는 제8단과 함께 미윤(密雲)으로 이동한 후 이곳에서 8단을 떠나 신현준·이주일 등과 함께 베이핑(北平 : 베이징)으로 가서 과거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편성된 광복군 제3지대 주(駐) 핑진(平津) 대대의 제2중대장을 맡았다. 1 946년 4월 평진대가 해산한 후 5월 초 톈진(天津) 탕구(塘沽)항에서 미국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했다.

    1946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朝鮮警備士官學校 :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여 3개월의 단기과정을 마치고 12월 14일 제2기로 졸업하면서 조선국방경비대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경비사관학교 생도로 재학할 당시 형 박상희가 대구10월사건으로 경찰에게 살해되었다.
    이 사건을 전후해 남로당의 군 내부 조직원으로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1947년 4월 조선국방경비대 제8연대(연대장 : 원용덕) 제4소대장으로서 3 8도선 경비를 맡았고, 9월 대위로 진급했다. 1947년 10월 육군사관학교 중대장으로 부임해 8월
    소령으로 진급했다.

    1948년 10월 19일 제주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로 출동하기로 되어 있던 여수와 순천의 제14연대가 이를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키자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발탁되어 전라남도 광주에 있는 호남지구전투사령부에서 작전참모로
    근무했다.

    같은 해 11월 1 일 군내 남로당 프락치를 적발하는 ‘숙군(肅軍)사업’을 담당하던 제1연대 정보주임장교이자 육군 정보국 요원인 김창룡 대위(관동군 헌병 오장 출신)에 의해 남로당 군 내부 프락치 혐의로 체포되었다. 수사 과정에서 좌익 혐
    의 사실을 순순히 시인하면서 군내 남로당 조직원들의 명단을 제공하고 ‘숙군사업’에 적극 협력한 점을 인정받아, 1949년 2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면하고 ‘파면·무기징역·전(全) 급료 몰수’ 선고를 받았다.

    이후 재심에서 징역 15년으로 감형받았다. 육군본부 정보국의 숙군 책임자인 백선엽 육군본부 정보국장(봉천군관학교 9기 출신), 김안일 육군본부 정보국 특무국장, 김창룡 1연대 정보주임 등이 연대 신원보증을 하고 원용덕(만주군 군의 중교 출신) 등 만주군 출신은 물론 일본 육사 인맥들이 적극 구명운동을 해 사형을 면했다. 재판 중에도 육군본부 정보국 1과(전투정보과)에서 근무하다 1949년 4월 18일 형집행정지와 함께 군에서 파면되었다.

    육군본부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하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7월 소령으로 육군본부 작전정보국(국장 : 장도영) 제1과장을 맡으면서 현역으로 복귀했다. 이후 제9사단 참모장, 육군정보학교 교장,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차장, 제2군단과 제3군단 포병단장을 역임했다. 1 953년 11월 준장으로 진급하였으며, 다음해 도미하여 6개월간 오클라호마주 포트실육군포병학교에서 고등군사훈련과정을 이수했다. 1954년 6월 미국에서 귀국한 뒤 제2군단
    포병사령관, 육군포병학교 교장 겸 포병감을 지냈다.

    1955년 7월 제5사단장이 되어 1956년 7월까지 처음으로 일선 전투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1957년 3월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곧바로 제6군단 부군단장으로 전보되었다가 9월에 제7사단장으로 임명되어 1958년 6월까지 복무했다.

    1958년 3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고, 같은 해 6월 제1군 참모장으로 보임되었으며, 1959년 2월부터 11월까지 제6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60년 1월부터 7월까지 부산의 육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재임했다. 4·19혁명
    후 민주당이 집권한 제2공화국 정부 아래서 1960년 7월 제1군관구 사령관에, 9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에 임명되었다가 12월 제2군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장악했다. 1961년 5월 군사혁명위원회 부의장이 되었고 계엄부사령관· 계엄사무소장·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을 거쳐 7월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1961년 8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고 3개월 후인 11월 육군대장이 되었다.

    1962년 3월부터 육군 대장으로서 대통령 권한대행과 내각 수반을 겸하다가
    1963년 8월 정계에 진출하기 위해 예편했다.
    1963년 9월 민주공화당 총재를 맡았고, 1963년 10월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에 신승(辛勝)해 12월 17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장기집권을 위해 1969년 9월 3선 개헌을 단행하고 1971년 7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2년 10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유신헌법을 공포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간선제로 바꾸면서 유신체제를 구축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를 통해 제8대와 제9대 대통령에 당선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을 받고 사망했다. 김영삼 대통령 재임 당시 5·16군사쿠데타는 불법이라고 공식 규정되었다.
    케미컬나이트 13-08-21 11:53
    기지촌 정화운동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선거의 핵심 표어로 ‘여성대통령’을 들고나왔다.
    생물학적인 성(섹스)과 사회적인 성(젠더)을 엄격히 구분하는 입장에서는
    박근혜의 여성대통령론을 마뜩지 않게 여기고 있다.
    박근혜 후보가 동시대 여성 전체는 물론이고
    자신의 동년배 여성들과도 달라도 너~무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유신과 오늘’에서는 여성대통령을 표방하고 나선
    박근혜가 영애로서, 퍼스트레이디로서 생활했던 유신시대에
    동년배 여성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돌아보고자 한다.
    유신시대 여성들의 삶은 이미 살펴본 여공들보다 더 내려가
    기생관광과 기지촌을 들여다보아야 바닥이 보인다.


    박근혜가 구국의 결단이었다고 찬양해온 유신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기지촌 정화운동이 나온다.
    인혁당이나 정수장학회 문제와 같은 낯익은 국가폭력 사건의 경우 직접적인 피해자도,
    직접적인 가해자나 수혜자도 국민 전체에서 보면 소수라 할 것이다.
    그러나 기지촌 문제는 그 피해자가 수십만이고,
    수혜자도 특정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데다 너무나 뚜렷하게 현재진행형이다.
    기지촌 정화운동을 통해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사실상의
    공창제를 운영하면서 힘없는 여성들의 몸뚱이를 담보로
    국가안보와 외화벌이를 동시에 해결하고자 했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미군철수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 

    해방 후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일본군 주둔지역에 주둔했다.
    용산 미군기지는 일본의 조선군사령부 자리였고,
    미국 공군이 자리잡은 평택도 일본군이 비행장을 닦던 곳이었다.
    당연히 일제 때에 형성된 유곽은 미군을 상대로 한 기지촌으로 바뀌어갔다.
    사회안전망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던 시절,
    갑작스러운 전쟁으로 남편을 잃거나 공동체로부터
    유리된 여성이 먹고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아무도 그들을 지켜줄 수 없었던 전란 속에서도 순결은 여전히 목숨보다 귀한 가치였다.
    한번 ‘몸을 버린’ 여성들, 특히 가진 것이라곤
    ‘이왕 버린 몸뚱어리’밖에 없는 수많은 여성들은 극도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갈 곳이 없었다.
    수많은 순이들은 지친 몸을 누일 곳이라곤 기지촌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에레나가 되어갔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순이가 에레나가 되었을까?
    한국전쟁 때부터 지금까지 기지촌을 거쳐 간 여성의 수를 관련 연구논문에서는
    대개 30만가량으로 추산하는데,
    30만이라면 파월장병 수와 비슷한 규모이다.


    미국은 닉슨독트린에 따라 1971년 3월 7사단과 3개 공군 전투부대 등
    주한미군 6만2천명 중 2만여명의 철군을 단행했다.
    미군 철수로 공황상태에 빠진 박정희는 미군의 추가 철수를 막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갑’인 미국은 ‘을’인 한국에 다양한 경로로 기지촌 정비에 대한 요구를 해왔다.
    미국대사관은 주로 한국의 기지촌에서
    한국인들이 흑인 병사들을 인종차별하는 것에 대한 닉슨 대통령의 우려를,
    미8군 쪽은 기지촌의 불결한 환경과 성병 문제를 제기했다.
    1971년 12월 박정희가 한미 1군단사령부를 순시했을 때 부사령관 이재전은
    박정희를 수행하면서 미군 쪽이 요구하는 기지촌 정화에 대하여 건의했다.
    미군은 지원병 제도를 택하고 있는데 자식을 군대에 보낸 부모들이
    한국이 성병 발병률도 높고 인종차별도 심하다며 자식의 한국 배치에 극력 반대한다는 것이다.
    주한미군 쪽은 독일이나 오키나와 등지의 쾌적한 기지촌의 예를 들며
    한국 쪽에 대대적인 기지촌 정비를 요구했다.


    청와대로 돌아온 박정희는 수년에 걸쳐 내각에 지시했는데
    왜 정화가 안 됐느냐고 크게 화를 내면서
    청와대가 직접 사안을 챙기라고 지시했다.
    담당자는 정무비서관 정종택이었는데,
    그는 새마을운동 담당관을 겸임하고 있어
    기지촌 정화운동은 기지촌의 새마을운동으로 불리기도 한다.
    1971년 12월31일 청와대에서는 10여개 부처의 차관들을 위원으로 하는
    청와대 직속의 기지촌 정화위원회가 발족해,
    미국의 요구를 적극 수용해 기지촌의 환경 개선과 성병의 예방과 치료 등의
    과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미군 철수의 절박한 상황에서 바짓가랑이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기지촌 정화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기지촌 정화운동이 미국의 요구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추진도 한·미 합작으로 이뤄졌지만,
    한국 정부는 사실 기지촌 정화운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되기 전부터
    기지촌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박정희의 지시로 5·16 군사반란의 적극 가담자이자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으로 막강한 위세를 떨친
    백태하가 주도한 군산의 아메리카타운은 미군들의 쾌락을 위해 건설된 계획도시였다.
    1969년 9월 문을 연 아메리카타운은 미군을 위한 클럽, 식당, 미용실, 각종 상점, 환전소에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500여개의 방까지 갖춘 매매춘을 위한 자급자족형 신도시였다.
    여성학자들은 군산의 아메리카타운을 정부 주도 아래 설립된 ‘군대창녀주식회사’라 부른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전투력을 극대화하려면 전장의 병사들이 섹스를 즐길 수 있어야 하되,
    성병으로 인한 전투력 손실을 막기 위해 깨끗한 성을 공급한다는 국가관리 성매매 시스템이었다.
    이 점에서 기지촌 정화운동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무섭게 빼닮았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야만적인 제도지만,
    이 제도를 만든 자들은 야만인이 아니라 대일본제국의 가장 우수한 아들들이었다.
    기지촌 정화운동을 입안한 자들도 한국과 미국의 엘리트 관료들이었다.
    대일본제국의 가장 우수한 아들들도,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일본과 싸웠다는 위대한 미국의 빼어난 아들들도,
    일본에서 미국으로 주인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승승장구한 식민지 조선의 수재들도
    위안부들의 인권같이 사소한,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을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박정희에게 기지촌 정화운동을 건의한 이재전이 솔직하게 고백한 것처럼
    기지촌 정화운동은 기지촌 주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한미군을 위한 것이었다.



    ‘주한미군 전투력 극대화 위해
    섹스를 즐기도록 하되
    성병으로 인한 전투력 손실을
    막기 위해 깨끗한 성을 공급한다’
    그것은 일본군 위안부제와 흡사한
    좋게 말하면 국가포주제였다

    영애 박근혜는 그 시절
    원로급 인사들을 모아놓고
    충효사상을 강연했지만
    밑바닥에서 사회를 떠받치는
    기지촌 여성들 손을 잡은 적 없다 


    “안보와 달러를 위해 몸을 씻으시오” 


    기지촌 여성들은 청결한 몸과 깨끗한 성을 판매하기 위해 최소 일주일에 두 번 검진을 받아야 했다.
    아무리 몸을 파는 여성이라 해도 검진대에 올라 남자 의사에게 치부를 보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렇게 검진을 받아야만 검진증에 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
    기지촌 여성들에게 검진증은 신분증이자 ‘영업허가증’이었다.
    검진증을 갖고 있지 않다가 미군 헌병의 검문(기지촌에서는 이를 ‘토벌’이라 불렀다)에 걸
    리면 즉심에 회부되었다.
    당시 미군의 성병은 놀라울 정도로 증가하고 있었다.
    기지촌 정화운동에 대한 탁월한 연구인 캐서린 문의 <동맹 속의 섹스>에 따르면,
    1천명당 성병 발생 건수는
    1970년 389건,
    1971년에 553건,
    1972년 692건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미군부대 정문 보초의 주된 임무는 외출 나가는 병사들에게 콘돔을 나눠주는 일이었다고 한다.
    검진에서 성병에 걸린 것으로 적발당한
    여성은 가차없이 ‘몽키하우스’라 불린 성병진료소에 감금되었다.
    반면 성병에 걸린 미군이 완치될 때까지 외출이 금지되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
    미군의 7할이 성병에 걸려 있건만 성병의 책임은 오로지 한국 여성의 몫이었다.
    성병진료소에서는 처음에는 페니실린을 투약했지만 부작용이 자꾸 생기고
    잦은 투약으로 내성이 생겨 약효가 떨어지니 투약 용량을 거푸 늘렸다.
    의사들은 부작용이 거의 없었다고 했지만,
    여성들은 주사를 맞으면 다리가 끊어지게 아팠고,
    많은 사람들이 자다가 죽고,
    화장실에서 죽고,
    밥 먹다 죽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아직 한국 경제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던 시절 기지촌 경제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나영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64년 한국의 외화수입이 1억달러에 불과하던 시절,
    미군 전용 홀에서 벌어들인 돈은 근 10퍼센트인 970만달러에 달했다.
    한국 정부는 주말 외출을 나온 미군들이 오키나와나 일본으로 가 성매매하는 것을
    기지촌 여성들을 업그레이드하여 국내에서 흡수하기 위해 그들에게 영어와 에티켓을 교육하려 했다.
    기지촌 ‘양공주’에서 활동가로 우뚝 선
    아메리카타운 왕언니 김연자의 회고록에 보면 당시 강사들은 이런 식으로 얘기했다고 한다.
    “흠흠, 에 여러분은 애국자입니다
    용기와 긍지를 갖고 달러 획득에 기여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에, 저는 여러분과 같은 숨은 애국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미국 군인들이 우리나라를 도우려고 왔으니 그 앞에서 옷도 단정히 입고,
    그 저속하고 쌍스러운 말은 좀 쓰지 마세요.”
    원자재 없이 외화를 벌어들이는 산업전사이자 미군을 붙들어 두는 안보전사로 그대들이야말로
    참된 애국자이니 긍지를 갖고 일하라는 말에 그렇게 좋은 일이면
    제 딸부터 시키지 하고 코웃음 치는 사람도 있었고,
    그래 우리는 “열심히 씹을 팔고 조옷을 빨자”고 자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영어 강사들은 “메이 아이 싯 다운?”
    하는 식의 교양 영어를 가르쳤지만,
    여성들은 바쁜 세상에
    ‘메이’는 무슨 놈의 얼어죽을 메이냐며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어란 렛스 고 숏 타임, 렛스 고 롱 타임,
    하우 마취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찰서나
    ‘자매회’가 주최하는 이런 교양강좌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지만,
    모두들 검진증 뺏기지 않으려면 자리를 채워야 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 여성들은
    학교 문전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일본어를 몰랐다.
    그들은 “
    닛뽄징 조센징 덴노헤이까 오나지네”(일본인과 조선인은 천황폐하가 같지요)
    따위의 서비스 언어를 날림으로 배워 급히 외워야 했다.

    안보전사답게 기지촌 여성들도 팀스피릿 훈련을 뛰었다.
    기지촌과는 달리 훈련 나와서는 부르는 게 값이었다.
    미군들도 훈련 사이사이의 짧은 시간에 욕구를 풀려니
    앞사람이 조금만 오래 끌면 문을 두드리고 난리를 쳤다.
    이렇게 밖에는 길게 줄을 서 있고,
    안에서는 5분도 안 걸리게 일을 치르면서 여성들은 옛날 정신대 끌려간 사람들이 이랬겠구나 생각했다.
    그 와중에 한국 정부는 야전에 임시보건소를 지어 여성들을 검진했다.
    여성들이 아니라 미군을 위해서였다.
    왕언니 김연자는 그런 데까지 돈 벌러 간 여자들도 참 대단한 사람들이지만
    거기에 천막 치고 보건소 세워 준 정부도 참 대단한 정부였다고 혀를 찼다.

    한미동맹은 가치동맹 이전에 ‘섹스동맹’ 

    미군기지에서 얼마나 떨어진 곳까지가 기지촌일까?
    보산리,
    안정리,
    용주골만 기지촌이 아니었다.
    미군기지는 어디에나 있었다.
    대한민국이 캠프 코리아였고,
    대한민국 전체가 거대한 기지촌이었다.
    미군이 떠나면 우리는 다 죽는다며 미군의 바짓가랑이 잡고 늘어지는 자들이
    한국의 ‘지도층’인 한, 정신적으로 대한민국 전체가 기지촌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그 거대한 기지촌 캠프 코리아의 주민이었다.
    우리가 몸을 팔지 않았고,
    우리가 포주질 하지 않았고,
    우리가 뚜쟁이질 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우리 부모와 우리 형제자매가 그렇게 번 돈으로 밥 먹고 학교 다닌 것이다.
    기지촌 정화운동은 아무리 좋게 얘기해도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의 관련성을 부인할 수 없는 국가포주제도였다.
    이나영 교수의 지적처럼 대한민국 전체가
    ‘양공주’가 담보하는 국가안보에 기대어,
    ‘양색시’가 번 돈에 혹은 그들의 일터와 관계된 경제구조에 기생하며,
    일정 부분 미국의 ‘위안부’가 되어 살아왔던 것이다.

    군대가 있는 곳에 매매춘이 있기 십상이지만,
    군대와 성매매 사이에 필연적인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우디처럼 이슬람 율법이 엄한 나라의 미군기지 앞에는
    매매춘으로 흥청대는 기지촌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지촌 정화운동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여성들이나
    업주들과 매매춘을 원하는 미군 병사 사이의 사적인 거래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기지촌 정화운동은
    미국과 한국 두 국가가 긴밀히 협력하여 추진한 국가적인 산업이자 정책이었다.
    한-미 동맹을 얘기할 때 가치동맹을 얘기하지만,
    가치동맹 이전에 섹스동맹이 있었다.
    미국은 자국 병사들의 안전한 섹스와 스트레스 해소를 원했고,
    한국은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과 미국 병사들이 뿌리는 달러를 원했다.
    두 나라는 굳게 손잡고 기지촌 정화운동을 펼쳤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군 범죄에 관한 기사는 신문에 자주 실렸다.
    그러나 기지촌 정화운동과 거의 동시에 시작된 유신시대의 신문지상에서
    미군 범죄에 관한 기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정부는 기지촌 여성들을 안보전사이자 산업역군이라고 떠받들었지만,
    정작 그들의 인권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혼혈’ 자식들은 미국으로 입양보내고
    홀로 남은 이들은 이제 늙고 병든 몸으로 고독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난 8월31일 기지촌여성인권연대가 발족했다.
    그동안 기지촌 여성들을 위해 활동해온 이들이 먼저 깃발을 들었지만,
    어찌 이 문제가 기지촌여성인권연대만의 과제이겠는가?
    거대한 기지촌 캠프 코리아의 주민 모두는 이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기지촌 여성 문제는 모든 국민이 책임져야 할 문제이지만,
    국가포주제를 건설하고 운영한 수장의 따님인
    박근혜 후보는 각별한 책임을 느끼고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한다.
    그들은 사회가 조금만 문 열어 주었어도
    우리가 이렇게 살지는 않았다고 지금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들이 정녕 안보전사였다면 마땅히 국립묘지에 모셔야 하는 것 아닌가?
    국립묘지 문 열어달라는 말은 안 하겠다.
    다만 그들을 향해 굳게 닫혀 있는 우리 사회의 문,
    우리의 마음의 문은 열어야 할 것이다.
    그 문을 가장 먼저,
    가장 활짝 열어야 할 책임은 다른 누구보다도 박근혜 후보에게 있다.
    공주와 양공주는 딱 한 글자 차이지만,
    이 사이에 우리나라의 모든 여성이 다 들어간다.
    영애 박근혜는 그 시절 자신보다 두세배 나이를 잡수신 교장선생님이나 원로급 사회인사들을 모아놓고
    새마음정신 고취란 이름으로 충효사상을 강연했지만,
    정말 이 사회를 밑바닥에서 떠받치는 기지촌 여성들의 손을 잡은 적은 없다.
    박근혜 후보여,
    여성대통령을 표방하려면 동시대를 산 동년배 여성들의 희생에 먼저 경의를 표하시라!
    天地不仁 13-08-21 13:16
    평생 직장생활 안해본 사람이 멀 안다고 아버지가 뺏은돈으로 잘먹 잘살았는데
    날마다월 13-08-21 15:46
    천년학님, 한결같은님 승!! 내일은꿈님 패 !!
    날마다월 13-08-21 15:48
    성경신님도 승!! 맥가이범님 패 !!
    산사에서 13-09-19 12:32
    종북좌파들이 친일파 하면서 주저리 까는것도,북한을 옹호하기위해서 핑계삼는 수단이다,대대후손까지도 친일파를거론하며 국론분열을 끝까지 일으킨다는,개수작이다, 대한민국에서 청소되어야할 골수 좌빨 좀비들이다, 지금 친일파가 어디있냐?,,호시탐탐 우리를못살게 구는북괴공작원들이 더 나쁜 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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