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 아침...
조무래기들의 재잘거림에 베란다 밖을 내려다보니 봄 逍風을 가는지 녀석들의 웃음소리가 아침공기를 가른다.
교문밖엔 녀석들을 태우고 떠날 버스가 줄지어 서 있고 선생님들의 인솔에 버스에 오르는 초등학생들...
그 옛날 저와 여러분들의 逍風은 어떤 모습이였을까. 혹 기억하십니까??
기억조차 희미해져서 이런 시절이 있었었는 없었었는지.
정작 내 자신의 모습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예전 "국민학교"시절...
빛 바랜 흑백 필름을 되 감으면 내 어릴적 봄 소풍가던 추억이 "파노라마"되어 아스라이~~~~~~~~~ 펼처집니다.
소풍가기 전날밤.
설레는 마음 "도곤도곤" 작은 몸을 요리조리 꼼지락 거리다가 새벽녘 졸리우는 눈을 비비며 밤하늘을 올려다 보면
캄캄한 하늘엔 커다란 "달무리"와 함께 "개밥바라기별"이 초롱초롱...
아~~~~~하늘이 내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신게지요.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학교에 흉흉한 괴 소문이 돌곤 했습니다.
예전에 "소사"아저씨가 학교 순찰 중 "화장실" 뒤에서 하늘로 올라가려는 "이무기"를
삽자루로 때려 잡아서 "소풍" 때나 혹은"운동회"때는 꼭 비가 온다는 둥...
발거름도 가볍게 "팔랑팔랑" 학교에 가면 교문앞엔 어느새 장사꾼 천지.
"솜사탕" 아저씨 "야바위꾼" 주판알 같이 생겨 꽂이에 끼워 팔았던 일본식 떡 "당고" 장난감 "총" "구슬" 그리고 엿장수"아저씨 까지...
맛난 과자랑 "음료수"와 "장난감"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어린 우리들을 꼬득였습니다.
허면 호주머니속에 "紙錢 "과 지금은 없어진 500환짜리 " 銀錢 " 몇개를 만지작 거리며 과자 한봉지 사고
먹고싶고 갖고싶었던 강한유혹 뿌리치고 몇 십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니끄자끄"(소풍가방.베낭의 일본식 발음)를 작은 어께에 걸머메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맨 물통과
주머니엔 "미루꾸"(캬라멜의 일본식 발음)을 까 먹으며 혹시나 옆 짝꿍을 잃어버릴세라 맞잡은 손 꼭잡고 "전차" 종점으로 향하는데
그때 그 모습들이 귀여웠던지 지나던 미군이 짚차에서 내려 카메라로 우리들의 사진을 찍어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동하는 "전차" 에서 음악시간에 배운 노래를 목청것 몇 곡을 부르면 어느새 "창경원"...
선생님의 간단한 주의사항을 듣고 벗 꽃이 흐드러지게 핀 나무밑에 돗자리깔고 김밥"벤또"(도시락)에 삶은 계란....
나들이 겸 따라오신 어머님이 따라 주시던 "사이다"와 "스페시"콜라...
소고기 살짝 볶아 밥과 비벼 계란을 길게 썬 "지단"과 "우엉" "홍당무" 데친것과 "시금치"로 싼 김밥 "벤또"를
선생님께 드리면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어머니와 눈이라도 마추치면 인사를 꾸벅하시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지금의 "치맛바람" 쯤 되겠지요.ㅎㅎㅎ
보물찿기가 끝날무렵의 자유시간..."회전목마"도 타고...아주 큰 "회전차"도 타고 "코끼리" "원숭이"에게 과자도 던저주고...
선생님의 긴 호각소리에 집합하여 굳은 장승처럼 서 있는 우리들에게 다리가 긴 사진기에 검은 천 뒤집어쓴 사진기사 아저씨가 터트린 "마그네슘"의
메케한 연기 맏으며 찍은 사진 밑 엔 흰 글씨로"단기" 몇년. 몇월. 몇일.어디에서.라고 쓰여진 흑백 단체 사진을 몇일 후 학교에서 받았던 기억...
그리고 "국민학교" 5학년땐 "서울역" 뒤 청파동 "서부역"에서 "석탄"으로 움직이는 시커먼 "증기기관차"를 타고
지금은 "桑田碧海"로 변해 버린 신도시 경기도 "병점" "용주사"의 소풍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엔 저학년은 무조건 "창경원"으로 고학년은 "태릉" "동구릉" "금곡릉" "서오릉" "서삼릉" 또는 "정릉"이 고작이였습니다.
근자에 신문을 보니 "수학여행"에 불참하는 학생들이 점점 늘어난데네요.
그 이유는 "수학여행"경비가 점점 늘어 비싸다는 이유랍니니다.
업자들이 선정의 댓가로 학교관계자에 "로비"를 하니 그 경비가 고스란이 학생들에게 전가되기 때문이랍니다.
남들 "수학여행" 떠날 때 없는집 자식들은 텅 빈 교실만 지키니 참으로 통탄할 일 입니다.
여러분들도 앨범속에 묻어둔 빛바랜 사진을 들처보며 유년의 소풍을 회상해 보십시요.
그 앨범속엔 여러분들의 유년의 역사가 고스란이 남아 있을겁니다.
그 시절 친구들아!!
지금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거니?......
적당이 행복하고..... 적당이 아프기도 하고...적당이 즐겁겠지...
늙으막에 아프지 말고 즐거운 추억만큼 이쁘게 살자구나!!!!!!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끝.
그때 그 시절...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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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국민학교 시절의 소풍은 단산못만 죽어라 갔습니다..
지금은 수상스키의 전유물이 되었지요..
왜 그리 소풍 전날밤은 잠이 안오는지.ㅋㅋ
모친 전용 김밥이 생각납니다.저희 어머님은 김밥을 좀 특이하게 사주셨습니다..
일명 김치볶음김밥이라고 할까요..
말그대로 김치볶음밥에 김밥을 마는거죠..단무지는 옆에 따로 사주신답니다..
어머니표 김밥이 친구들에겐 인기가 좋았지만..그 당시엔 부끄러웠습니다..
지금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지만요..ㅋㅋ
권형 선배님 제가 오늘 댓글이 길죠? 알콜 한잔 했습니다..^^
선배님 글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월척을 사랑하시는 모습 참 보기 좋습니다..
가끔 전화도 주시는데 연락 못드려서 죄송합니다..
감탄이 절로 납니다..
구구절절 이야기를 잘 역어 가시네요..
재밌게 읽고 갑니다.
권형님, 투투님, jazz님,파트린느님, 모두가 낚시꾼답게 부지런하십니다
제가 다녔던 초등학교 운동장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세그루있었는데
어느날 비속에 번개가 그중 한나무에 내려 타버렸답니다.
그나무속에는 용이 다되가는 이무기가 승천직전에 죽었지요.
그용의 원한으로 소풍날에 반드시 비가 왔다는 전설이.....
근데 입증이라도 하듯 그나무에 불탄흔적이 내내 있는걸 제가 똑똑히 보았습니다.
제가 지금은 띨띨하지만 어릴땐 똑똑했어요.
좋은아침 소풍가는 기분으로 상쾌하게 시작함에 감사합니다.
소풍갈때 사이다 한병만 있어도 기분 짱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설레이는 마음에 밤잠 설치기도 했는데, 요즘 아이들은
소풍대신 견학을 많이 가지요.
작은녀석 소풍가기전날 밤 잠을 잘도 자더군요 ㅎ ㅎ
권형님 계신 서울에도 날씨가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이곳 대구는 햇살이 따가울 정도입니다.
서울에 살면서 TV, 방5개, 집에 연못까지 있었으니 그때 그시절 괜찮았나 봅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업의 실패로
초등학교 1,2,3학년까지 소풍도 못갈정도로 어려웠던 시절
4학년때 B-29기가 잇던 여의도로 소풍을 갔는데
소풍전날 밤을 꼴딱샛던 기억이 납니다
가방안에는 어머니가 맛있게 싸주신 김밥에 초코파이, 칠성사이다 1병. 연양갱 1개
그어머니는 70이 넘으셨고 가끔 슈퍼 한 켠에 있는 초코파인나 연양갱 보면 그때 그시절이 아련한 추억이 떠오릅니다
소풍 날 처럼 설레는 것을 보면
아직 철이 덜 났나봅니다.
월척지 물갈이 하면서
6짜 붕순이 심기를 건드려
주말이면 바람이 불고
수온이 떨어진다는 전설이...
낚시 못가는 토요일
권형님 덕에 추억에 잠겨 맞습니다.
소풍 갔다 오늘길 살짝 새서 소달구지 뒤에 몸을 숨기고 도망 쳤다가
몽둥이 찜질한 기억 밖에요.
국민학교시절 사진이 거의 없네요
학교 소사 아저씨가 이무기를 죽어서 비가 온다..
제가 다닌 학교도 이와 비슷한 얘기가 있었지요.
때묻지 않은 동심에는 그럴듯한 전설처럼
근데 전국에서 몇 마리의 이무기가 죽었는지?
아님 대표적으로 진짜 이무기를 죽인 학교와 소사 아저씨는?
주말내내 햇볕 짱짱~ 하다가 토일만 되면 비오는 것은 용가리 때문인가요?
저 어릴때 국민학교도 소풍가면 비왔습니다
똑같은 전설이 있었죠
구렁이가 용이되어 승청하려는걸 소사아저씨가 삽으로 쳐서 ...
세월이 유수같습니다
어릴적 학교운동장 등구부러진 느티나무 타고놀던 친구가
머리 벗겨진 중년이 됐으니...
그 학교도 한밤중에 피아노 소리 들리고, 화장실에서는 빨간손 파란손이 올라 왔나요?
허 그거참, 이무기.. 승천... 소풍날 비오는 것. 그거 우리학굔데...
권형님 덕분에 아이러브수쿨도 아닌데 동창을 찾은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단일민족인 한국은 42촌까지가면 남이 아니랍니다.
특히 월척 초등학교에선 다 동창입니다.
선후배님, 동상, 성 ~ ~사랑혀유~~~
권형님 덕분에.... 감사허유~~
소풍,어릴때 예기 천천히 되세기며 읽었습니다.
집에 올때 동생눔들 줄려고 사이다, 과자 사가지고 오면
그렇게 좋아했는데.......
근디 이눔들이 지금은 생까고 있네요.
저야 권형님보다 훨씬 세월을 뒤로하지만 제일 기억에 남고 지금 생각하면 조금 괘씸한 예기가 있지요
소풍때 저희는 한 4Km쯤 걸어간 기억이 있네요
학교가 보이는 언덕길에 오르면 벌써 교문 주위엔 상인들로 북적거리고
전체 학생이모여 조회를 가질때면 상인들은 물빠지듯이 보따리 구려서 빠져 나갔지요
한 2Km쯤 가면 큰 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잠깐 쉬어 가는 곳이었는데
벌써 상인들은 다리 양쪽에 난전을 펼쳐 놓고 기다리고 있었구요~
그런데 여기서 괘씸한 예기가 나옵니다.
아이스케키 파는 아저씨가 고무줄로 동심을 유린한 사건이지요
고무줄 두줄중 한줄엔 매듭을 짓고 더길게 해서는 긴것 뽑으면 케키 다섯개 준다고 해서
구름떼 처럼 케키를 사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야바위쯤 된다고 해야 하나요?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에야 아하 그때 그랬구나~ 합니다.
사기까지는 아니고 걍 한개씩은 줬으니까
그도 추억이라면 추억이 되는군요~
권형님의 그때 그시절은 모든이의 동심을 깨웁니다
그래서 난 더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