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오면서 또는 살아가면서 직업의 세계는 실로 예측할수없을 만큼 변하고 있다는건 누구나 부정할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하늘을 찌를듯이 인기를 구가하던 직업이 어느날 부턴가 시들해져 가고 생판 듣도 보도 못 한 직업이 생겨 각광을 받기도 하지요...
저는 참 신기한것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많던 시내버스 안내양 즉 "차장"들의 그 후 소식이 궁금하더라구요.
뭐!! 여러분들도 아시는분은 아시겠지만 버스 한대에 한명 혹은 앞 뒤로 한면씩 두명 이였던 "버스 안내양"...
그 후 세월이 흘러 안내양(원)이지 예전엔 "버스차장"이라고 부르지 않았나요.
당시 "버스안내양"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였었죠.
시골에서 갓 올라오거나 무작정 상경하여 스며들었던 곳.
"차장"이란 직업도 당시엔 시골에선 출세한 직업으로 꼽혔다는.그래서 제법 인기도 있는 직업이였다지요.
예전 "최인호"감독 "별들의전쟁"의 여주인공의 "경희(?)가 바로 그 시내버스 "차장"이였죠...아~마!!!!
제가 학창시절엔 "시내버스"를 타고 등 하교를 했는데 그때 본 "차장"의 화장기 없는 얼굴에 갸날픈 몸매가
십 수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 합니다.
때론 술 한잔에 벌겉게 달아오른 취객을 상대하면서 아님 한창 장난기 많은 학생들을 상대하면서 고달펐을 법한 "차장"...
1981년 말에 개봉된 "도시로간처녀"라는 영화가 개봉되였는데 "관제노조"로 이루워진 버스 안내양들이
극장의 간판을 떼고 항의를 하여 개봉되자마자 강제로 막을 내리게한 비운의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개봉될 당시에는 "버스 안내양"의 애환을 다룬 사회문제로서 제법 화제가 되였고
실제로 있었던 어느 버스회사의 "안내양"의 자살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영화였는데
버스회사의 강력한 항의로 그만 상영이 중단된거였습니다.
전국적으로 "안내양"제도가 처음 도입된것은 1961년도이고 70년대 우리나라에는 약 3만여명의 안내양이 있었다네요.
60 ~ 70년대를 온몸으로 막아낸 보통의 도시 빈민들처럼 10대 중.후반의 "안내양"들도 자기몫의 삶을 접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아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남동생 혹은 오라버니들의 학업연장을 위해서 "삥땅누명"과 "알몸수색"의
"인권유린"으로 점철 되였던 그 애띠고 갸냘펐던 "차장"들이 우리들의 여동생이자 누이들이 였습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버스 하차지의 "안내방송"이 시작되고 "버스벨"이 개설되며 "안내양"의 필요성을 잃었고
이후 1989년"교통부"령 이 정하는 바에따라 안내원을 승무하게 하여야한다 는 "법조문"이 삭제 되면서 그 자취를 감추게됐던 것입니다.
얼마전...
신문을 보니 춤남 보령시 대천동 버스터미널엔 감색유니폼에 흰색 빵모자를 눌러 쓰고
버스 뒷문을 "탕~탕" 치며 크게 "오~라이"를 외치는 "버스안내원"이 등장했다지요.
시골엔 노인분들이 많이 계시는 관계로 승. 하차시 안전사고가 급증하자 도입하였답니다.
그때 그 시절.........
감색(곤새)유니폼에 빨간(도시마다 틀리겠죠)빵떡모자 눌러쓴 뻐스 안내양(차장)을 기억하시는지요.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 그 시절...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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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학교다닐때 많이타고다녔읍니다
아주오래된 애기입니다
권형님
그 시절이생각납니다
그 좋은시절다지나고 이제 마빡엔 주름만남고
안내양 정말고생많으셨지요
그래도 그때는 그나름대로 재미있었읍니다
요즈음은 지하철이다 자가용이다해서 교통이아주편리해졌지만
그래도 그때가 더정아나고 즐그움이 좋았네요
항상 옛날을 생가나게하는 글 언제나잘보고있읍니다
좋은밤되시고 언제나즐겁게사세요
등하교길에 버스안내양 바로 뒷자석에 앉거나 서서
말걸고 히히덕 거리면서 시야카시(죄송 일본어라..)를
걸라치면 안내양의 좋으면서 싫은척..ㅋㅋ
고등학교 시절이었으니 누나 였죠..
친구들과 여럿이 타면 10원 정도는 눈 감아주던
그 안내양 누나는 지금은 어디살까?..
보고잡고 싶네요..
권형님께선 안내양과 추억이 없으신가요??..
남달리 많으실것 같은데...^^
뒷문에는 남자 차장이 앞문에는 여자 안내양이...
까마득하게 생각이 나는것 같습니다
또 한편의 추억을 되새겨 봅니다
댁에 잘들어 가셨죠...
네비아가씨 말을 잘들어니 집까지 잘 댈따 주드라고요....
엄청 위험하기도 했고요~
특히 아침 등교와 출근이 시작되면 담 정류장 까정 매달려 가던 기억있습니다.
힘이 장사 아니면 감히 소화 안되는 직업?
운전 기사 아저씨가 가속페달과 브레이크 연달아 두번정도 흔들때 배로 밀어 재끼면 손님들 살짝 정리 되고
출입문 계단 양쪽 난간에 발만 걸치고 출입문 닫던 그 힘쎈? 분들
저 서울 올라오고 얼마 안 있어서 알몸수색 파문등의 있었고 자동문 등장하면서 사라져간 직업이지요~
전 시골출신이라 서울에서 첨 봤고요
우리 시골엔 남자들이었고 기사 지망생들이 기사 보조로 따라댕겼지요
워낙에 시골차는 ?차라 그리고 비포장 도로라 비오는 날엔 웅덩이에 바퀴 빠지면 삽질하고 돌맹이 넣고 등등이 주업이고요
1970년 7월 여름방학이 시작하자 친구들과 지리산으로 덕유산으로 해매던중
전북 설천에서 시외버스 안내양과 친구와 만남이 기억 됨니다.
처음은 장난이었는데.... 2-3년의 세월이....
그덕에 덕유산을 자주 갔었지요. 설천 삼거리 중국집, 약국등.....
40년전 이야긴데 마음이 무겁군요.
좋은 하루 시작하십시요.
홀려본적이 있는 일인 입니다
정말 요즈음 일로치면 4D 업종
일것 같지요 용감하게 밀어넣던
허리힘..고된 일거리로 한달 한달
번돈으로 고향으로 돈부쳐 주었던
안내양들이 많았었지요
월척에는 권형님과 같이 추억을
나누시는 분들이 있어서 좋습니다
이말 빠지면 안되죠.
학창시절 엄청나게 고생시켰죠.
문천지 낚시 가면서 친구 7명타고
차비계산(시외요금) 하면 앞에서 "3*7은 29 4*8은 44 니까 880원 맞죠". 1000원주면서 잔돈 내달라꼬 카면
아가씨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고 잔돈 내주던기억이~~~~~~~~~
이렇게 몇백원 챙겨먹던 기억이~~~~
아마 그 아가씨 동생같은 학생 봐준거 겠죠
추억은 나누는게 아닌데
추억은 씹는 거지요.
오늘 하루종일 추억이나 씹어야 겠습니다.
안내양과 사귀는...^^
데이트는 하루종일 종점 오가기~
차장의 한자 표기 車掌이 직업을 비하한다는 논란이 있어서
공식적으로는 승무원으로 바뀐 것으로 압니다.
※ 掌(손바닥 장)
추억속의 한 장면을 차지하고 있지요.
아련한 추억속의 그때 그시절
감사히 잘 보고 갑니다.
참 고달픈 삶이였습니다.
오빠 동생들을위해 자기를 버린것이지요.......
그분도 어느 하늘아해서 같이 늙어가겠지요....
참 세월 빠르게 흘러가네요.^^*
출발하면 기사 양반은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으면 차가 기우뚱 하며
매달렸던 차장까지 다 밀려 들어가고 차문을 닫는 공간 확보를 해 줍니다.
멋진 콤비플레이죠.
차장과 기사는 땔래야 땔 수 없는 그런 사이죠.
옛 추억 되세겨 봅니다.
출발하는 만원버스를 늦게 탄적 있었는데...
그때 뒤에서 억지로 밀어넣는 차장누부야(?)의 몰캉거리는 가슴을 느낀후(?)
항상 꼴찌로 탑승하는 못된버릇(?)이... 켁!!
안들어 본 사람... 말을 마세요...
운전기사옆에 난 작은 문.... 다들 모르시져?? ㅋㅋ
형님들 틈에 통학 안 하신분은....말 마세요.... ㅋㅋㅋ
지금은 정년을 하셨고, 예술원 회원 이시죠.
도시로간처녀라는 영화는 유지인 금보라 같은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출연한 영화로
감독 김수용이 작정하고 만든 영화 였는데,
개봉관에서 뜻하지 않는 일로 영화가 중도에서 내려지게 되었지요.
뒤이어 김수용은 걸레스님 중광의 이야기를 다룬 허튼소리라는 영화를 만드는데, 이번에는 사전검열로 자신의 영화가 11군데나 삭제를 당하자, 이에 항의하여 은퇴를 선언 하지요.
권형님의 해박한 지식과 년도의 정확성 등에 감탄하게 됩니다.
(월님들... 아는체 하구 건방 떨어서 지송천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