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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로 타인을 감동시키는 비법을 공개합니다

<<내 글로 타인을 감동시키는 비법>>

 

** 작가 임승수입니다. 제 신간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의 일부를 발췌했습니다 **

 

당연한 얘기겠지만, 자기소개서가 통과되려면 내 글로 면접관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소설 분야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쓴 이야기로 독자의 마음에 감동을 전해야 한다. 내가 쓴 기획서가 통과되려면 팀장의 마음이 동動해야 한다.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쓸 수 있게 된다는 것, 그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다.

 

이제 내 글로 여러분을 한 번 슬프게 만들어보겠다. 내 몸 안에 흐르는 모든 슬픈 기운이여! 자판을 두드리는 나의 열 손가락 끝으로 모여라. 손가락 끝이 욱신거린다. 슬픔을 느낀 손가락 부위의 체세포들이 분자 단위로 요동치고 있다. 이제 그 모든 슬픔을 모아서 쓴다.

 

“슬프다…….”

 

자! 여러분, 내가 쓴 ‘슬프다…….’라는 글을 보고 슬퍼지는가? 아마 짜증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뭔가 기대했는데, 역시 약팔이는 믿을게 못 된다고 침 뱉는 소리가 들린다. 잠깐, 침 뱉기 전에 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연출한 장면, 사실은 바로 당신의 모습 아닌가? 당신은 슬플 때 뭐라고 쓰는가. 혹시 ‘슬프다’라고 쓰지 않나? 그래놓고는 왜 나한테 침을 뱉나?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슬프다’라는 단어는 절대로 슬프지 않다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걸 모른다. 그리고 슬플 때 그저 ‘슬프다’라고만 써버린다.

 

내 글로 사람을 슬프게 만들려면, 무엇을 알아야 할까? 사람이라는 존재가 언제 어떻게 슬퍼지는지 알아야 한다. KBS1에서 방영하는 <사랑의 리퀘스트>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안타까운 상황에 놓인 분들의 사연을 전하고 ARS를 통해 시청자에게 모금을 하는 자선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에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출연했다고 치자. 얼굴이 TV 화면에 가득 차도록 클로즈업 되면서 내레이션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 분은…… 정말 대단히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입니다. 정말 가난합니다. 불쌍하지요. 너무나 슬프군요. 자…… 시청자 여러분! ARS 번호 눌러주시면 이분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아무리 내 얼굴이 ARS를 부르는 얼굴이라 하더라도 아마 대부분 전화기를 들지 않을 것이다. 가난하다, 불쌍하다, 안타깝다, 슬프다, 등의 말은 추상적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가난하단 말인가? 뭐가 안타깝단 말인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시청자들이 ARS 버튼을 누를까?

 

TV 화면이 온통 검다. 그런데 정적을 깨고 자명종 소리가 울린다. 순식간에 화면이 밝아지며 천정에 매달린 백열전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절대 프렌치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아니다. 백열전구다. 천정에 매달린 백열전구를 비추던 화면이 점점 아래로 내려오자 내의 차림의 40대 남성 한 명이 아직도 잠이 덜 깬 듯 눈을 비비고 있다. 내의 오른쪽 옆구리 쪽에는 나 좀 보란 듯 구멍이 나 있다. 화면은 좀 더 아래쪽을 비춘다. 이 남자가 자던 자리 옆이다. 아직도 꿈나라를 헤매며 뭘 먹는 꿈을 꾸는지 헤벌레 하고 있는 꼬마 세 명이 크레용 세트처럼 나란히 자고 있다. 남자는 다시 잠을 청하는 몸을 이끌고 방문을 나선다. 문을 열자 느닷없이 간이 부엌이 나오는데 앞에는 연탄보일러가 나 아직 죽지 않았다고 웅변하고 있다. 다세대 주택의 지하 단칸방.

 

밥상을 차리는데 그제 한 밥이 쉬어터지기 바로 직전이고, 반찬은 5개? 2개? 그렇다. 2개다. 김치와 멸치. 헤벌레 웃던 아이들은 잠이 깨자마자 표정이 어두워진다. 마치 현실보다 꿈을 더 선호하는 듯한 얼굴. 40대 남성이 차려준 밥상 주위로 약속이나 한 듯 제자리 찾아 앉은 아이들은 레미콘 차량이 공사장에 콘크리트를 들이붓듯 밥과 반찬을 우겨 넣는다.

 

40대 남성이 이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챙겨서 학교에 보낼 동안, 이상한 건지 어쩌면 당연한 건지 성인 여성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는 집 나간 지 3년 됐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이 남성은 마땅히 갈 곳이 없다. 추리닝 바람으로 어기적어기적 집을 나선 이 사람은 마치 약속된 코스가 있는 듯 정확하게 취업정보지가 있는 곳만을 찍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손에는 두툼한 정보지 뭉치가 들려 있다. 전화기를 붙잡고 돌리기 시작하는데…….

 

방송을 보며 한숨을 쉬는 시청자들이 늘어난다. 벌써 ARS 번호 누르고 있는 분들 보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나운서가 또박또박 숙련된 발음으로 정확하게 ‘가난하다, 불쌍하다, 안타깝다, 슬프다’라는 용어를 전달했음에도 꿈쩍도 안하던 사람들이 그런 용어를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ARS 번호를 눌러대고 있다. 감동은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라 ‘디테일’에서 오기 때문이다.

 

내가 글쓰기를 가르칠 때 항상 내는 과제가 있다. 자신의 장점에 대해 쓰라는 것이다. 평가기준을 제시하는데, 맞춤법이나 문장력 따위는 절대 아니다. 내가 과제 글을 읽은 후 ‘진짜 이 분은 이런 장점이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유일한 기준이다. 그런데 과제 글을 읽다보면 이렇게 쓰는 분들이 상당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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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글쓰기를 하면서 과제로 제출받은 글이다. 이 글의 문제는 무엇일까? 영상디자인부와의 협업을 제시했다는데, 무슨 협업인지 떠오르는가? 전혀 모르겠다. 기존 구성원과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는데, 도대체 상대편이 내 뺨을 때려서 틀어진 건지 아니면 약속시간에 늦어서 그런 건지 도무지 알 방법이 없다. 효율성을 내세워 설득한 후 체계적인 역할 분담을 했단다. ‘효율성’ ‘체계적인 역할 분담’ 같은 추상적 단어로는 도무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낼 재간이 없다.

 

그 어떤 면접관이 이 자기소개서를 읽고 ‘참 이 친구는 협업을 잘 하겠구먼’이라고 생각할까? 면접관 대부분은 50대 넘는 임원들 아닌가. 만약 협업을 잘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면접관은 나이를 헛먹은 것이다. 이 글을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no information’ 그야말로 아무런 정보가 없는 글이다. 디테일이 없으니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다른 자기소개 글을 보자. 좀 길지만 차분히 읽어보기를 권한다. 역시 글쓰기를 가르칠 때 과제로 제출받은 글이다. 오타를 고치지 않고 원문 그대로 살렸으니 이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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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심지어 이 글을 읽고 언어치료실을 찾아갈 수 있다. 대구계명문화대 대명캠퍼스 네거리에 있다하지 않나. 세 평 정도의 공간이었단다. 똥 누는 소리 내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으며, 빨리 끝내고 딸기 맛 셰이크를 먹고 싶었단다. 언어장애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당한 얘기를 ‘풀 좀 빌려줄래’를 열 번도 넘게 말했다고 ‘디테일하게’ 회상한다.

 

솔직히 맞춤법도 많이 틀리고 비문도 속출하는 글이다. 그럼에도 이 글을 읽으면 ‘이 분은 언어장애를 이겨낼 정도의 의지력을 갖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맞춤법, 문장력 떨어지는데도 말이다. 이 글은 50대 너구리 면접관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다. ‘풀 좀 빌려줄래’를 열 번도 더 말했다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감동은 어디서 나온다고? 잊지 말고 기억하시라. ‘디테일’에서 나온다.

 

취업 자기소개서를 쓸 때 많은 사람들이 어디선가 모범 자기소개서를 구해 거의 그대로 도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 폐해가 얼마나 심한지, 한 언론사 편집장은 자기소개서를 검토하면서 절반 가까이가 장점을 ‘경청’이라고 했다며 한숨을 내쉰다.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는 내용에 과연 ‘디테일’이 존재할 수 있을까?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는 내용이라면 얼마나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하게 서술되어 있을까? 혹시 자기소개서 써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발 부탁하는데, 자기소개서는 직접 쓰시라. 최대한 디테일을 살려서 말이다. 그래야 면접관의 마음이 움직일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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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연수의 이 글이 진리다. ‘슬프다’라는 단어는 절대 슬프지 않다. 슬픔을 표현하려면 슬펐던 경험을 ‘디테일’을 살려 자세히 써야 한다. 제주 여행 다녀온 다음에 ‘제주도 풍경이 너무 멋있었어’라고 말하면 어떡하나? ‘멋있었어’는 추상적인 단어 아닌가. ‘멋있었다’는 느낌이 아니라, 제주도에서 내가 본 것, 냄새 맡은 것, 맛본 것, 손끝으로 만져보고 느꼈던 것을 써줘야 할 것 아니겠나. 사람이란 존재는 오감을 통해 세상의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통해 감정의 변화를 겪는다.

 

그렇다면 내 글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내 글로 내가 본 것을 생생하게 보여줘야 한다. 내가 냄새 맡은 것을 냄새 맡게 해줘야 한다. 내가 느낀 촉감을 최대한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테크닉이 아니다. 글쓰기란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더 잘 이해할수록 글을 더 잘 쓰게 된다.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에는 소년은 소녀가 죽어서 ‘슬펐다’는 얘기 절대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독자는 눈물 콧물 다 쏟는다. 그저 소년과 소녀 사이에 있었던 일을 디테일하게 글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20대 시절 무척이나 인상적으로 봤던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걸작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샐리: 미안하지만 해리, 송년의 밤이고 외롭다는 거 잘 알아. 하지만 갑자기 나타나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되는 건 아냐. 이런 식으론 안 돼.
해리: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샐리: 몰라. 하지만 이런 식으론 안 돼.
해리: 그럼 이런 건 어때? 더운 날씨에도 감기에 걸리고, 샌드위치 하나 주문하는 데 한 시간도 더 걸리는 널 사랑해. 날 바보 취급하며 쳐다볼 때 콧등에 작은 주름이 생기는 네 모습과 너와 헤어져서 돌아올 때 내 옷에 배인 네 향수 냄새를 사랑해. 내가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 너이기에 널 사랑해. 지금이 송년이고 내가 외로워서 이런 말 하는 게 아냐. 네 인생을 누군가와 함께 보내고 싶다면, 가능한 빨리 시작하란 말을 해주고 싶어.
샐리: 이것 봐, 넌 항상 이런 식이야 해리! 도저히 널 미워할 수 없게끔 말하잖아. 그래서 난 네가 미워, 해리. 네가 밉다고.

 

대학시절 궁상맞게 혼자 비디오방에서 보던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해리가 샐리에게 건네는 대사는 그것이 도저히 샐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디테일'이 살아 있다. 덕분에 샐리의 마음은 완전히 연두부가 되고 만다. 사랑도 쟁취하는 대단한 '디테일'의 위력!

L

 

■ 책정보(예스24) http://www.yes24.com/24/goods/13414959


책 광고인가요?
내용이 너무 흩어져 있어서 무슨 말인지...
제목관 너무 틀린 글이네요
디테일 하지도 않고...내 맘은 전혀 움직이질 않네요
마음을 움직이는건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야합니다.

까까머리 검정고무신 동무들이 웃기지요?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는것이 동요라는 생각뿐이지요?


여기 이 두 질문의 답이 개개인마다 모두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정지어 상대의 감정을 호소하는일은 옳지 못합니다.


신을 믿지 말고 나를 믿어보세요,

내가 곧 신처럼 느껴질겁니다. 라는 말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잊지마세요 ~

"내 글은 여러 사람의 다양한 감정을 받아들일수 있는 자세에서부터 존중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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