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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낚시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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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원로낚시인 송소석 선생께서 월간붕어21(http://www.fishingnews.co.kr)에 연재한 내용입니다. * 월간붕어21에서는 2001년 2월호부터 '한국낚시 어제와 오늘'을 연재한 바 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일본 낚싯대 '동작' 우리나라의 유어(流漁)낚시는 수 백년 전부터 있었지만 거기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가 거의 없어 언제부터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낚시를 했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옛날 산수화나 민속화에 낚시를 하는 그림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옛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낚시로 청류(淸遊-풍취 있는 놀이, 속진을 떠나 자연을 즐김. 편집자 주-)를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의 낚시는 중국보다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3,000년 전 주(周)나라 초에 '중국 담수어류 양어학'과 두주공(陶朱公)의 '양어경(養漁經)' 등의 책이 나왔을 만큼 일찍부터 양어기술이 발달했다. 그러나 낚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세계적인 조성(釣聖)으로 일컬어지는 태공망(太空望)이 낚시로 출세를 했으며, 또 조어대(釣魚臺) 등의 명소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중국에서도 옛부터 낚시를 많이 했을 것이라는 짐작은 할 수 있지만 적어도 근세까지는 그리 활발하게 낚시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낚시를 많이 했다는 일본의 어느 유명 낚시꾼이 '중국은 인구에 비해 낚시빈국(貧國)이었다'고 폄하한 적이 있었다. 낚시보다는 그물로 쉽게 물고기를 얻을 수 있는 중국사람들의 실리적인 성격탓이라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세계적으로 영국과 일본은 일찍부터 유어낚시를 했는데, 영국은 450년 전 아이작 월튼이 '조어대전'을 펴냈을 만큼 영국사람들은 낚시를 좋아했다. 영국이나 일본은 섬나라 특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찍부터 낚시기법이 발달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일본은 대나무가 많이 나기 때문에 낚싯대산업 역시 200~300년 전부터 활발했으므로 우리나라 낚시 역시 중국보다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낚싯대 제작기구 전시회 1940년 경 서울 정자옥(丁字屋, 현 미도파 백화점)에서 이색적인 전시회가 열렸다. 일본 낚싯대 '도오사쿠(東作)'의 문화생을 자처하는 구마가야 요시오(能谷義雄) 라는 자가 낚싯대를 만드는 기구를 진열하고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품이라고 해야 도오사쿠 낚싯대 몇 벌과 대나무 속을 파내는 송곳 등 몇 가지에 불과했다고 한다. 어려서 동작공장에 문화생으로 입문했다는 구마가야의 속셈은 질 좋은 대나무가 많은 한국에서 낚싯대 공장을 차리겠다는 것으로 짐작되었다. 전시회가 끝나고 서울역 근처 동자동에 가게를 얻어 낚싯대를 제작했다는데, 그 때 만들어진 낚싯대의 이름을, 확실하지는 않지만 '수작(壽作)'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일정 말기에다 전쟁 중이었으므로 수작은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는 이후 일본에서 서울로 이사를 했는데, 1942년 경 구마가야가 소집장을 받고 군대에 입대하면서 낚싯대 제작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음낚싯대의 원조 '주작' 우리나라는 오랜 식민지 생활과 2차 세계대전 등 어수선한 세계정세 속에서 당시에는 한가하게 낚시를 즐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해방이 되면서 비로소 일본제 낚싯대를 가지고 있던 소수 낚시동호인들 끼리 모여 낚시를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전쟁과 1·4후퇴 당시 피난생활 중 해방 직후 함경도에서 월남한 주정기(朱政基)씨가 일제 낚싯대 동작을 가지고 지금의 충남 보령시 웅천면 평리 라는 곳으로 피난을 했다. 평리는 차령산맥 뒤 성주산 남쪽 기슭 분지 속에 있는 아늑한 마을이며 대나무 자생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주씨는 원래 제약회사에 근무했으며,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생활을 했다. 그는 날씨가 좋은 날이면 마을 앞을 흐르고 있는 웅천천에서 낚시를 했다. 그러던 어느날 주씨는 낚시를 하는 도중 낚싯대를 부러뜨렸다. 주씨는 당시 피난생활을 하던 주인집 대나무 마당비에 눈이 갔다. 굵기와 마디가 낚싯대와 비슷해서 마당비로 낚싯대를 수리했더니 감쪽같았다. 손재주가 남달리 뛰어났던 주씨는 그날 이후부터 적당한 재료를 선죽해서 낚싯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당시 만든 낚싯대를 웅천천에서 같이 낚시를 하던 몇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이 때부터 주씨는 낚싯대를 상품화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본격적으로 낚싯대 제작에 매달렸으며 창의적인 연구도 했다. 그 때가 피난생활 1년째인 1951년경이다. 낚싯대에 옻칠을 하고 일본 낚싯대 처럼 자명(字名)을 '주작'으로 붙이고 각인을 찍기도 했다. 주씨의 주작은 일제 '도오사쿠(東作)'를 본따서 만든 것이었지만 일제보다는 한국적인 섬세함이 더했다. 하지만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이므로 생산된 낚싯대가 팔리는 것은 아니었다. '주작' 산업박람회 최우수상 수상 낚싯대 제작은 주정기씨 혼자의 힘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잔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주씨의 낚싯대 제작을 거들었던 사람은 보령 웅천사람 김영배씨와 오무희씨, 그리고 현 새서울낚시점을 운영하고 있는 오장규씨였다. 오장규씨가 주씨와 인연을 맺게된 것은 주씨의 피난생활 당시 집 주인이 오장규씨의 숙부였기 때문에 당연히 이웃에 살던 오장규씨와 알게 되었다. 휴전이 되고 1955년 환도와 함께 서울에는 성급하게 많은 낚시점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주작은 낚시계산업의 활성화에 불을 당겼다. 주작공장은 밤샘작업을 해야할 만큼 호황을 누렸다. 1955년경 오장규씨는 군에 입대하게 되고 주작공장은 1956년경 상도동으로 이전했다. 웅천 사람 김영배씨는 웅천에 남아 '영작(英作)'낚싯대를 만들었고 주정기씨는 오무희씨와 함께 상도동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주작이 서울로 무대를 옮길 무렵 용인에서 한승진씨의 '한작(漢作)'이 낚시계에 선을 보였고 뒤를 이어 '용인작', '용림작' 등이 용인에서 출시되면서 주정기씨는 본업인 약업으로 복귀하기 위해 당시 온양에 농장을 운영하고 있던 김세언(金世彦)씨에게 주작공장을 넘겼다. 그 때가 1957~1958년경이다. 오장규씨가 군에서 제대를 할 무렵 김세언씨로부터 윤덕기(尹德基)씨에게 주작이 넘어가면서 오장규씨는 다시 주작 제작에 복귀했다. 당시 낚시계에서 어구상조합장으로 막강한 실력을 행사하고 있던 윤덕기씨는 주작공장을 영등포로 옮기면서 상무로 있던 오장규씨의 주도 아래 주작의 고급화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종로2가 종각 옆 종각 지물포 곁에 주작 직매장도 설치됐다. 또 1961년경에는 남대문에 있던 상공회의소에 상설 우량상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주작은 이 전시장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1962년경 경복궁에서 열린 산업박람회 공예관에 주작이 전시되어 최우수상(상공부장관상=동상)을 수상했다. 용인 유방리 낚싯대 생산단지 한국전쟁 후 환도와 함께 주작이 서울 시내 낚시점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을 무렵 '한작'낚싯대가 용인에서 제작되어 낚시점에 선을 보였다. 주작이 나긋나긋하고 여성스러운 맵시를 가지고 있다면 한작은 손아귀에 착 달라붙고 액션에서도 상쾌한, 남성적인 느낌을 갖게 했다. 당연히 당시 낚시꾼들 사이에는 주작이 좋다는 둥, 한작이 쓸만하다는 둥 의견이 분분했다. 이 무렵 주작과 한작은 우리나라 양대 고급 낚싯대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한작은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용인읍 유방리 버드실마을(용인 I·C 서북쪽)에 있었는데, 이곳은 한승진씨가 피난생활을 하던 곳으로 한작은 한승진씨의 자명(字銘) 낚싯대였다. 한승진씨는 평안도 사람으로 해방 직후에 월남했다. 한씨는 이북에 있을 때 자작으로 낚싯대를 만들기도 했으므로 낚싯대 만드는 일은 익숙해져 있었다. 이북에서는 대나무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아서 일찍부터 갈대로 낚싯대를 만들어 사용했는데, 갈대낚싯대는 대나무 낚싯대보다 공이 더 들어가는 까다로운 작업이었기 때문에 용인에서 대나무 낚싯대를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작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면서 공급이 달리는 상황이 되자 한씨로부터 낚싯대 만드는 법을 배운 사람들이 독립해서 만들기 시작한 것이 당시 용인작(조철연씨)을 비롯해서 용림작(임근수씨), 용인한작(임승문씨), 조연작(조연원씨), 한양작(조창원씨), 용원작(조용원씨), 한성작(한성균씨), 용작(강재원씨), 신작(정규환·김관일씨) 등이었다. 이 낚싯대들은 모두 1955년부터 1959년까지 경기도 용인시 용인읍 유방리 버드실마을에서 생산·출시되었는데, 이 때문에 당시 용인 유방리는 낚싯대공업단지라 할 만큼 낚싯대 생산지로 유명했다. 따라서 이 시기는 가히 '낚싯대 춘추전국시대'라 불릴만했다. 한편 한승진씨의 형인 한승권씨도 한작낚싯대 제작에 가세해서 1957년경부터 1973년까지 해방촌에서 한작을 제작했다. 그 후 한승진씨는 수원으로 내려가 수원한작을 제작했다고 한다. 1959~1960년 경 용인에서 만들어지는 낚싯대와는 별도로 서울 종로3가 파출소 뒤 골목 안에서는 평양 사람 김연국씨가 '연작'을 생산했다. 대동강에서 잉어낚시꾼으로 손꼽히던 김씨는 갈대 낚싯대를 잘 만들었는데, 그는 혼자서 연작낚싯대를 생산해냈다. 연작은 고급대 수준이 아니었고 '대중대'라는 일반 낚싯대였으나 품질은 견고했다. 이 밖에 1970년경 보령 웅천 수부리에서는 김영배(영작)씨에게 낚싯대 만드는 법을 배운 이세희씨가 '수부작(水夫作)'을 만들었는데, 서울에는 공급되지 않았고 대천을 중심으로 한 인근 낚시점에서 팔렸다. 영남권 유명 낚싯대 '오작' 서울에서 주작, 한작, 그리고 용인 낚싯대가 날개 돋친 듯 팔릴 무렵 영남권인 김천·대구를 중심으로 '오작'이라는 낚싯대가 판을 쳤다. '오작'은 김천 사람 오철수씨가 만든 영남권 토박이 낚싯대다. 오철수씨는 일제시대 때 일본으로 건너가 낚싯대 공장에 들어가서 낚싯대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해방 후 김천으로 돌아온 오씨는 막대 낚싯대를 만들어 영남권 낚시점에 공급했다. 또 질 좋은 이음 낚싯대도 만들어서 본인이 직접 사용하기도 하고 팔기도 했는데, 꽤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5년경 '오작'을 대량생산했다고 하는데, 이 시기가 주작과 같은 때인지 아니면 그 이전에 이미 영남 낚시점에 판매가 되고 있었는지 연도는 확실치 않다. 어쨌던 당시 오작은 영남권에서는 독보적인 상품으로 지역 낚시꾼들의 인기를 끌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1960년경 한국 낚싯대는 일본으로 수출을 하게 된다. 당시 오철수씨에게 낚싯대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는 대구의 안재천씨, 그리고 용작을 만드는 강재원(후에 용인 유방리에 세워진 해동산업에 입사)씨 등이 각각 새마을공장을 세우고 한국 낚싯대를 일본에 수출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윤작(윤준배씨) 외 몇 사람이 낚싯대를 만들었으나 확인할 길이 없어서 여기에는 기록하지 못한다. 당시 낚싯대를 제작한 사람들이 이미 작고했거나 소재를 알 수 없어서 몇몇 원로 낚시인과 오장규(새서울낚시 대표)씨로부터 전해 들은 말을 정리 했으므로 인명과 낚싯대 자명, 그리고 연대 등은 사실과 다소 차이가 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으로 좀 더 확인 작업을 거쳐서 낚싯대 약사를 보완할 것을 약속한다. 대나무낚싯대의 맥을 이어오는 '승작' 1955년 환도와 함께 주작낚싯대가 서울 낚시점에 선을 보였고 뒤이어 한작낚싯대, 그리고 용인에서 제작된 다양한 낚싯대가 생산되면서 우리나라 낚시계는 늦게나마 빠른 성장을 했다. 그러나 이 대나무낚싯대는 1964년 12월 오리엔탈 회사에서 생산한 유리섬유 소재의 글라스로드(glass lod) 낚싯대에 밀려 1965년을 고비로 그 때까지 10년간의 대나무 낚싯대의 호황기를 접어야 했다. 1968년 1월에는 은성, 1968년 11월에는 해동, 1969년 6월에는 로얄이 각각 글라스로드 낚싯대를 출시하자 1973년에 이르러 대나무낚싯대 공장은 거의 문을 닫았다. 글라스로드 낚싯대는 대나무낚싯대보다 다소 무겁기는 하지만 안테나식으로 접고 펼 수 있어 편리한데다가 반영구적인 견고함으로 낚시꾼들의 인기를 한 몸에 끌어 모았다. 그런데 용인 임근수(용림작)씨 문하에 있던 방기섭씨는 전남 순천시 서면 선평리(강청마을)에 '민속공예 죽조간 제작소'라는 간판을 걸고 오늘날까지 '승작(昇作)'을 생산하면서 대나무 낚싯대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지금은 '승작 대나무낚싯대 제작소(061-752-6800)'라는 간판으로 바꾸고, 부인, 아들과 함께 가업으로 계속 대나무낚싯대의 맥을 잇겠다고 한다(붕어낚시21 2000년 3월호 186쪽. '승작낚싯대' 기사 참고).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아부지 낚시대 뿌라묵고
대나무로 짜집기 해보던
어릴적 생각납니다.
실패(!)하고 혼났지요.

고맙습니다.
귀한 정보 잘보았습니다~~~~

장문에글 올리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어 보았습니다.
대나무 낚시대 맥을 잇는 방기섭씨 멋지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우연히 찿아본 대나무 낚시대 역사를 읽어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저는 용작을 생산하신 아버님덕으로 일찍 낚시를 시작해 지금도 좋아하고 있습니다.버드실에서 생산하셨던분들은 잘 아시는 분들이었고 주정기씨나 김영배씨 한승진씨 방기섭씨등 기억나는 분들이 많네요.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내용들이었으나 비교적 자세하네요.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셨을 분들을 어렴풋하게 떠올립니다.옛시절이 많이 그립네요.영남권 유명 낚시대 오작을 설명하는 중간부분에 "용작을 만드는 강재원 하고 괄호안의 내용은 저희 아버님이 아니라 큰아들인 제가 해동에 입사를 한것이니 바르게 고쳐 주시면 합니다.참고로 저희 아버님이 생산하신 용작은 70년말에 그만 두셨습니다.그리고 80년 들어 부산으로 내려가셔서 바늘외 도래등 소도구생산을 몇년하시다 아주 그만 두셨습니다.그리곤 아버님이 2000년1월에 돌아가셨습니다.
지금도 70년대 중반에 생산한 나나고라고 하던 2.25미터의 옷칠한 낚시대를 십여개 소유하고 있다가 근래에 지인들 몇명에게 나눠주고 세개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너무 오래되어 사용은 안하고 전시용으로 보관만하고 있습니다.80년대초만 하드라도 이낚시대로 향어장에서 향어도 잡았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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