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계획되거나 실험되지 않은 듯하다. 그것의 존재는 모호해서 나는 그것의 실체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것은 나를 간섭하지는 않는 듯한데, 나는 나의 행위나 인식, 내 개인의 역사까지 모두를 그것에게 저당잡힌 기분이다. 내가 그것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의 가차없음과 나의 무력함을 고백한다면, 내가 우주의 고아이며 우연의 산물이며 태어나는 순간 소멸하고 있다는, 그런 나의 절망적인 주절거림이 '이유 있음'이 될까? 실패하고 말겠지만 나는 그것의 막막함과 비정함을 말하고 싶다. 나타나는 순간 사라지는 것, 현재인 순간 과거인 것, 모든 것의 놀이 자체(le jeu meme), 실존적 불가사의(mystere), 냉정함과 무심함의 난폭자... 나는 시간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과학에 의해 측정할 수 있는 양화된 순수시간(temps pur)을 '객관적 시간'이라 정의한다... 사물이 펼치는 동질적 장소로서의 역할을 한다.] 인터넷에서 찾아낸 말인데, 나는 이런 사회적인 해석은 관심없다. 나는 나와 시간과의 관계, 즉 '주관적 시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질적이면서도 이질적인 그것은 나의 '지속의 내재적 감정'이기 때문에. 나는, 내가 아무리 순환성(윤회)과 영원을 다짐한들 시간의 비가역성(되돌릴 수 없음)과 죽음의 내재성이나 나의 유한성, 내 존재의 우발성(accident)을 부정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따라서 나는 종교의 '영원에로의 회귀'를 빌려서까지 죽음에 대해(저 절대적 난폭자인 시간에 대해) 저항해보길 포기한다. [과거는 치료할 수 없는 영역이고 미래는 죽음의 전망일 뿐이며, 현재는 다른 순간들의 연속에서 체험된 한 순간이다.] 누군가가 했던 이 말에 동의하는가? 그런 게 아니라고 나에게 말하고 싶은가? 종교의 추종적 믿음말고, 그대의 치열한 사유의 결과로 나를 가르쳐 달라. 지금 태어난 아기와 지금 생산된 이기는, 지금 피어난 꽃들과 지금 약속한 영원의 사랑은 저 가차 없는 시간의 손바닥, 그 주름살 계곡 속에서 늙어가고 녹슬고 시들고 희미해지다 사라질 뿐이다. 이것이 '망각'이란 시간의 속성이다. 영원을 약속하고 영원을 갈망하는 그대, 부정하고 싶겠지만 영원은 없다. 이것은 우리가 사용할 단어가 아니다. 오직 저 시간의 신, 크로노스만의 언어인 것이다. 시간은 언제나 내게 망각을 주사하고 나는 무력해지지만, 나는 완전하게 시간 앞에 무릎을 꿇지는 않는다. 내 육신의 썩어감은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언제나 추억함으로써 시간의 맹점인 망각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시간의 맹점인 망각은 일정 부분 과거의 고통에서 나를 해방시키지만 그것은 완전한 해방이 아니라 회피이므로.) 그래서 추억은 내게 있어서 잊지 않기 위한 슬픈 행위이며 시간에 대한 치열한 반항인 것이다. 나는, 시간은 '흐른다.'라는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데,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게 아니라 나타나는 순간 소멸하는 것이다. 즉, 낙엽처럼 떨어져 쌓이는 것뿐이다. 내 삶의 뜨락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의 이파리 한 장이 떨어져 쌓이고 있다. 어제의 낙엽들은 벌써 썩고 있지만, 35년 전의 꼬마가 본 파란 하늘이랑 17살의 첫사랑, 25살에 떠난 아버지랑 누구누구에 대한 그리움 몇 개는 썩지 않고 굳어져 시간의 화석이 된다. 나는 때때로 외로울 때면 그 시간의 화석들을 캐내곤 하는데, 뽀얗게 쌓인 세월의 먼지를 불어내다 콜록콜록 기침도 하고, 그러다 가끔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날의 풍경으로 인해 눈물도 지어보곤 한다. 추억이 나를 토닥이는 것이다. '시간을 의식한다는 것은 정신이 시간성을 초월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반성과 이성의 차원을 가질 수 있다.' 는 것이 합리론자들의 관점인데, 나는 이 말에서 '과거로부터는 현재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교훈을, 시간의 가차 없음과 그것에 대한 내 무력감으로부터는 자유를 발견할 수도 있다.'라는 희망을 조작한다. 이 모든 것이 비록 시간의 손바닥 위에서 일지라도 말이다. ㅡ 서른 즈음의 피터. # 이 글은 잡식으로 읽은 많은 책들에서 얻은 영감으로 쓴 글이므로 몇몇 표현에 표절의 의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시간의 손바닥에서 추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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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계획되거나 실험되지 않은 듯하다. 그것의 존재는 모호해서 나는 그것의 실체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것은 나를 간섭하지는 않는 듯한데, 나는 나의 행위나 인식, 내 개인의 역사까지 모두를 그것에게 저당잡힌 기분이다. 내가 그것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의 가차없음과 나의 무력함을 고백한다면, 내가 우주의 고아이며 우연의 산물이며 태어나는 순간 소멸하고 있다는, 그런 나의 절망적인 주절거림이 '이유 있음'이 될까? 실패하고 말겠지만 나는 그것의 막막함과 비정함을 말하고 싶다. 나타나는 순간 사라지는 것, 현재인 순간 과거인 것, 모든 것의 놀이 자체(le jeu meme), 실존적 불가사의(mystere), 냉정함과 무심함의 난폭자... 나는 시간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과학에 의해 측정할 수 있는 양화된 순수시간(temps pur)을 '객관적 시간'이라 정의한다... 사물이 펼치는 동질적 장소로서의 역할을 한다.] 인터넷에서 찾아낸 말인데, 나는 이런 사회적인 해석은 관심없다. 나는 나와 시간과의 관계, 즉 '주관적 시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질적이면서도 이질적인 그것은 나의 '지속의 내재적 감정'이기 때문에. 나는, 내가 아무리 순환성(윤회)과 영원을 다짐한들 시간의 비가역성(되돌릴 수 없음)과 죽음의 내재성이나 나의 유한성, 내 존재의 우발성(accident)을 부정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따라서 나는 종교의 '영원에로의 회귀'를 빌려서까지 죽음에 대해(저 절대적 난폭자인 시간에 대해) 저항해보길 포기한다. [과거는 치료할 수 없는 영역이고 미래는 죽음의 전망일 뿐이며, 현재는 다른 순간들의 연속에서 체험된 한 순간이다.] 누군가가 했던 이 말에 동의하는가? 그런 게 아니라고 나에게 말하고 싶은가? 종교의 추종적 믿음말고, 그대의 치열한 사유의 결과로 나를 가르쳐 달라. 지금 태어난 아기와 지금 생산된 이기는, 지금 피어난 꽃들과 지금 약속한 영원의 사랑은 저 가차 없는 시간의 손바닥, 그 주름살 계곡 속에서 늙어가고 녹슬고 시들고 희미해지다 사라질 뿐이다. 이것이 '망각'이란 시간의 속성이다. 영원을 약속하고 영원을 갈망하는 그대, 부정하고 싶겠지만 영원은 없다. 이것은 우리가 사용할 단어가 아니다. 오직 저 시간의 신, 크로노스만의 언어인 것이다. 시간은 언제나 내게 망각을 주사하고 나는 무력해지지만, 나는 완전하게 시간 앞에 무릎을 꿇지는 않는다. 내 육신의 썩어감은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언제나 추억함으로써 시간의 맹점인 망각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시간의 맹점인 망각은 일정 부분 과거의 고통에서 나를 해방시키지만 그것은 완전한 해방이 아니라 회피이므로.) 그래서 추억은 내게 있어서 잊지 않기 위한 슬픈 행위이며 시간에 대한 치열한 반항인 것이다. 나는, 시간은 '흐른다.'라는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데,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게 아니라 나타나는 순간 소멸하는 것이다. 즉, 낙엽처럼 떨어져 쌓이는 것뿐이다. 내 삶의 뜨락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의 이파리 한 장이 떨어져 쌓이고 있다. 어제의 낙엽들은 벌써 썩고 있지만, 35년 전의 꼬마가 본 파란 하늘이랑 17살의 첫사랑, 25살에 떠난 아버지랑 누구누구에 대한 그리움 몇 개는 썩지 않고 굳어져 시간의 화석이 된다. 나는 때때로 외로울 때면 그 시간의 화석들을 캐내곤 하는데, 뽀얗게 쌓인 세월의 먼지를 불어내다 콜록콜록 기침도 하고, 그러다 가끔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날의 풍경으로 인해 눈물도 지어보곤 한다. 추억이 나를 토닥이는 것이다. '시간을 의식한다는 것은 정신이 시간성을 초월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반성과 이성의 차원을 가질 수 있다.' 는 것이 합리론자들의 관점인데, 나는 이 말에서 '과거로부터는 현재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교훈을, 시간의 가차 없음과 그것에 대한 내 무력감으로부터는 자유를 발견할 수도 있다.'라는 희망을 조작한다. 이 모든 것이 비록 시간의 손바닥 위에서 일지라도 말이다. ㅡ 서른 즈음의 피터. # 이 글은 잡식으로 읽은 많은 책들에서 얻은 영감으로 쓴 글이므로 몇몇 표현에 표절의 의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그러세요~~~2
더위는 자시지마세요.
붕어로 맺어진~~~현실 가상적인~~~~ㅎㅎ
머라카는지 몰겄습니다.ㅠ
그 뿐!
감성으로의 회귀를 이끄는 이런 글이 두달이는
참 좋다
글쓴이가 3초 피러님이라는 사실이 약간
아쉽지만(^^;)은.....
Fe부지 피러님이
두개의달님을 영접하며 노력하는 가운데 성숙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흐믓함
이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 모래? ) ⊙⊙"
자만하지 않고
낮추고 고민하는 모습이 참 좋다
두개의달님 과 함께 하며
얻은 영감, 혜안의 가슴 벅참을 표현한.....
몇몇 표현에 표절의 의혹이 있을수 있음을
밝힌것이.... 사랑 스럽다
쌍파리의 격려에
부족한 글을 칭찬해 주셔서 부끄럽습니다
더욱 힘내어
깨달음을 얻은 자로서
몽매한 이들을 계도하기 위하여 노력 하겠습니다...... 라... 했다면,
붕날라~~// 확마!!.......
쌍파리님으로 급 수정합니다
님 자가 오데로..... ㅡ.ㅡ"
- 시간 -
접어야 하나?
- 추억 -
물 반 고기 반이였어.
뭐래?
와이카노
눈알 아파요
건강하게 잘 지내시죠?^^
아무튼....입질 없나 봅니다.
떨어진 낙엽에서 화석이 있나 뒤적뒤적 해봅니다..
너무 어렵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을 뒤적~ " 김태화 - 안녕 " 이란 노래를 찾습니다.
찾았습니다. 플레이 큐~~~
한 번 더 읽었습니다.
그리고, 한번 더~~~ 플레이 큐~~~
한 번 더 읽었습니다.
찌가 선 물가에서
지식를 사랑하는 월님들
찌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망울에 아롱이는 지혜의 갈구리
한 번 읽고 갈망의 손바닥을 부비고
두 번 읽고 감성의 손바닥 가슴에 얹고 두눈을 감으며
세 번 읽고 감동의 손바닥 마주치며 지혜의 눈을 뜹시다.
이 것이 좋은 글을 대하는 우리 월가의 문화입지요.
콜록~ 크 ... 죄송합니다...
말해놓고, 부그러울 땐... 기침이라도 해야... 커얼럭~ ~ 큭 ~
[과거는 치료할 수 없는 영역이고 미래는 죽음의 전망일 뿐이며,]
[현재는 다른 순간들의 연속에서 체험된 한 순간이다.]
[누군가가 했던 이 말에 동의하는가?]
[그런 게 아니라고 나에게 말하고 싶은가?]
[종교의 추종적 믿음말고, 그대의 치열한 사유의 결과로 나를 가르쳐 달라.]
동의합니다.
[현재는 다른 순간들의 연속에서 체험된 한 순간이다.]
말씀하신 이 정의에서,, ' 체험 '이란 말에 저는 집중합니다.
각각 다른 모습의 체험이 서로을 다르게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른 모습의 정서..
시간, 공간, 차원을 질주해 온..
피러님의 정서가
삶은, 봄날 햇빛아래 소풍과 같은 것이다~ 라고...
말할 것만 같은..
디오게네스의 햇빛이지는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댓글 쓰는 중에 창문 넘어 보이는, 하늘 한 번 봤습니다.
월님 여러분~
매력적인 남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3超 남이 되십시요~~~
지혜로운 남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3讀 남이 되십시요~~~
아 유 레디~~~
외칩시다~~~ 피~ 러~ 멘~
뭐라구요~~~ 더 크 게~~~
다시한번~~~ 뭐라구요~~~
에브리바리~~~ 한번더~~~
조~ 씀~ 니~ 다~
쿨럭~ 기침이...클.... ㅋ.
사짜붕어와의 상면을 가르쳐 드려야 하는데. .
서른즈음에도 늙어 보입니다
어르신소리가 이상하지 않습니다.
닫아 놓았던 외딴방 창고에 있던 글이었습니다.
오기입니다. 마흔, 불혹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