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경남으로 이사했지만 지난 여름 서울 인근 경기도에 거주할 때엔 제 집에서 차로 5분 거리, 도보로는 집을 나선 후 걷고, 버스를 타고, 다시 걷고 하다보면 30분이 소요되는 곳에 본가가 있었습니다.
손자가 보고 싶다는 아버지의 카톡 메시지를 받은 것이 저녁 6시40분. 어린 아이가 있는 집은 누구나 이해하듯 외출이 그렇게 손쉬운 것만은 아닌지라 아이를 씻기고 입히고 가방에 필요한 걸 담고 제 자신의 매무새 역시 간단히 정리를 하고 나서니 시간은 벌써 7시30분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정거장 사이 거리가 대단히 짧은 지역이고 불과 다섯 정거장만 가면 되니 먼 거리는 아니지만 아이를 걷게 하거나 제가 안고 걷기에는 제법 부담이라 버스에 올랐습니다.
사람은 무척 많고 통로는 비좁았습니다. 아이 물건을 담은 가방을 매고, 아이를 품에 안은 지라 손잡이를 쥔 오른 손 이외에는 자유로운 사지가 없어 하차를 위해 버스 내부에서 이동하는 분들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일도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땀은 비오듯 쏟아지고 아이도 열이 오르는지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는데 워낙 구불구불한 길이다보니 단 한 정거장을 지났을 뿐이고 나름 운동을 오래 한 몸인데도 버겁다는 느낌이 들었고 무엇보다 승객들에게 민폐다 싶은 마음에 '오래 기다리더라도 택시 탈 것을 그랬다.' 하며 자책을 했습니다.
그 때, 두 명이 앉는 자리 통로 쪽에 앉은 분이 저를 보고 일어섰습니다. "여기 앉으세요. 아이가 힘들어 보여요." 금방 내리니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저와 비슷한 40대로 보이는 그 분은 자신도 금방 내리니 괜찮다며 자리를 양보해 주셨지요.
그런데 바로 옆에 서 계시는 어르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간 보기에도 왜소한 체격이라 저보다 더 이 만원버스가 힘겨우실 것 같았습니다. "저기... 어르신 여기 앉으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자 환갑은 한참 지난 듯 보이는 어르신께서 웃어주셨어요. "다들 아이 키우는 아비 아닌가. 자네더러 앉아 쉬란 거 아닐 걸세. 저 양보한 양반도 아이 생각해서 앉으라고 비켜주신 게지."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하는 와중에 염치없이 그냥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래도 제 아이가 아비 면을 세워주려는지 예쁜 짓을 하더군요.
"하삐~ 안녕! 아저씨~ 안녕! 아줌마 안녕~! 누나 안녕! 난 쭌이야~"
주변 승객 모두에게 눈을 마주하고 인사를 한 뒤 대견하게도 자신을 소개하기까지 했습니다.
순간 작은 웃음소리가 주변에 흐르며 기분 좋은 덕담이 이어졌습니다. '예쁘다' '잘생겼다'부터 '무럭무럭 자라라' 까지...
다섯 정거장이 지나 버스에서 하차한 후 본가를 향해 걷는 길이 그렇게나 시원하고 상쾌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들 아이 키우는 아비 아닌가.. 라는 어르신의 말씀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누군가를 대할 때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라고 건네시는 귀한 말씀이라고 생각했지요.
고맙습니다.
자리를 흔쾌히 내어주신 제 또래의 남성 분과 좋은 말씀 주신 어르신.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제게는 지난 여름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더랬습니다.
아들과 함께였던 만원버스 탑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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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복이 님께로돌아온다고 생각하십시요.
님의글들은 삶을살아가면서 다들한번은쯤은 겪은사실일겁니다.
문장력이짧은저는 그리쓰질못하니ㅎㅎ
오늘도 즐거운하루가되소서ㅡ
이번에 아드님과의 글이 미소 짖게 만드네요.
아드님 많이 자랐고 한참 이쁠? 나이네요.
다음에는 아드님 하고의 낚시도 기대해 봅니다.
기억이 가물거려 옛글을 보고 나서 알았습니다.
이 머리를 어찌 해야되는지...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제얼굴로 버스 타면 사람들이 시선을 회피하고 고개숙이고 못본척 합니다
좌석 양보 받을 나이는 아니지만.......
제가 이정도니 위에 글쓴 도톨님은.........ㅜㅜ
잘보고 갑니다
그림자님 / 선배님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즐거운 일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짜붕어님 / 복을 건네주시니 기쁩니다. 제가 가진 복은 작지만 꼭 나누어드리고 싶습니다.
도톨님 / 선배님 기억해주시니 기분 좋습니다. 자게방 떠나신 분들이 참 많은데 여전히 자리하고 계서서 얼마전 돌아왔을 때 선배님 아직 계신 것 알고 기뻤습니다. 언제고 물가에서 뵙는 날 기다리겠습니다.
달구지220님 / 별 것 아닌 글에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날이 꽤 춥습니다. 방한 단단히 하셔요!!
漁水仙님 / 여러 산배님들이 지금껏 자게방에 계셔서 참 좋습니다. 건강하지시요? 저는 제가 무척 무섭게 생겼기 때문에 양보받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다들 아이키우는 아비 아닌가"
정감있는 말이네요 ㅎ
버스 안이 눈에 선~하네요.^*^
돌 지난 큰 딸을 안고 부산발 울산행 버스를 탔었지요.
양보 받은 자리에 아픈 안해를 앉히고 두 시간 정도를 서서 왔습니다.
아빠 품을 아이를 안고요.
고달팠지만, 참 행복했던 지난 날이네요.
훈훈한 글 모처럼 편안한 맘으로 글 잘읽고 갑니다
월철 모든 회원님들은 다 같음 맘을 가지신 분들이라고 믿고 갑니다
송애님 / 선배님께서 눈에 선하다 생각하시는 그런 버스 안 풍경과 흡사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글시님 / 가끔은 조금 이상하고 조금 이기적인 사람들 때문에 날카로워지기도 하지만 세상에는 괜찮은 사람이 더 많다고 저도 믿어봅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그래도 세상은 좋은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쾌인쾌사(快人快事)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 옆에 같이 있기만 해도 행복해 진다는 뜻
한번쯤은 겪어본 지난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아이를데리고타는사람에게는 무조건적으로 자리를 양보합니다.
흐믓한 이야기 잘보았습니다.
retaxi님 / 선배님. 오늘까지 한파라는데 옷 따뜻하게 입으시고 감기 조심하세요.
정선수님 / 비록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그 날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과 상쾌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참 좋은 날이었지요.
붕붕바라기님 / 예. 잔잔한 웃음과 함께 버스 승객들 모두 미소 가득한 얼굴이었죠. 그런 느낌 참 좋았더랬습니다.
잠시의행복님 / 저도 늘 아이와 함께인 분께는 자리를 양보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제게 양보를 해 주신 일은 그 때가 처음이었어요. 기분도 좋고 마음도 넉넉해지고 이모저모 참 좋았지요.
조금만 더 여유있는 눈으로 세상을 둘러보면
아직도 살아있음에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쉬는 동안 내공이 몇 갑자 증진하신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