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나물을 캐보고 싶다는 아내의 휴일. 화사한 봄옷 입고 마실 간다. 뒷산은 얕아서 좋다. 걸어서 10분, 멀지 않아 더 좋다. 신발 벗어들고 맨발 된다. 산속에서 봄은 절정으로 자지러진다. 산 벚꽃 며칠 전 수줍음 벗고 하얗게 도발한다. 탐스런 꽃송이는 서른 몇 살 농익은 여인네 가슴이다. 흠... 마음이 발기발기 일어선다. 키 작은 진달래는 속 좁은 가스나다. 띄엄띄엄 토라져 피어있다. 샛노란 개나리는 뭐든 좋은 머스마다. 노랗게 머리를 물들이고 우르르 몰려있다. 한켠에선 시든 목련이 떠날 채비를 한다. 햇살 백만 발 우수수 쏟아진다. 눈이 시리다. 은화와 아내는 나물인지 풀인지 그냥 열심이다.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정화가 따라간다. 캠코더로 아름다운 여자 세 명을 기록한다. 행복한 봄날의 오후다. 모니터에 정화를 담는다. 복숭아꽃 가지 아래 봄꽃 같은 여자아이 서 있다. 내 기억 한 자락 펼쳐진다. 연분홍빛 그날을 꺼내고, 나는 그만 아릿해진다. 봄날이다. 열한 살의 나, 지서 옥상에서 '소년중앙'을 본다. 손에는 엄마가 긁어 준 누룽지를 들고 있다. 꺼벙이는 언제봐도 재밌다. 연필로 여백에다 따라 그려 본다. 나는 만화가가 될 테야, 라고 생각한다. 너무 빨리 봐버리면 큰일이라고 걱정한다. 오늘은 이만, 아껴서 보기로 한다. 고개를 들고 기찻길을 본다. 그 옆, 작은 집을 본다. 마당에 핀 연분홍 복숭아꽃을 본다. 그 밑, 우물가 빨래하는 작은 계집아이의 뒷모습을 본다. 눈이 크고 볼이 빨간 순임이. 아버지를 따라 전학 온 나는 친구가 없다. 벌써 네 번째 전학이다. 팔자려니 한다. 첫날을 우울하게 보낸 나는 풀이 죽어 땅만 보고 걷는다. 하얀 운동화가 보이고 뽀얀 종아리가 보인다. 눈이 동그란 계집아이가 헤실 웃고 있다. "니, 오데서 왔노?" 계집아이가 한발 다가서고, 겁이 난 나는 한 발 물러선다. "니, 겁 무겄나? 머스마가 와 그리 하얗노?" 당돌한 계집애가 얼굴을 훑는다. 부끄러워진 나는 괜스레 화가 난다. "와? 내가 하얀 기 불만이가? 니는 와 그리 쌔카맣노?" 눈이 표독해진 계집애가 멱살을 잡고, 당황한 나는 손을 뿌리친다. "가스나, 니 죽을래?" 얼굴이 빨개진 계집애가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는다. "따라 와! 한 판 붙자!" 얕은 동산, 가운데는 무덤 하나 봉곳하고 이름 모를 봄꽃이 지천이다. 가방을 던지고 마주 보고 선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다. 나는 남자이기 때문에 이겨야 한다. "꼬집고 할퀴기 없기다." "암만! 머스마 니, 오늘 함 죽어봐라!" 내 키가 작다는 게 계집애에게 자신감을 줬을까... 아무리 때려도 울지를 않는다. 표독스런 계집애가 팔목을 물고 늘어진다. 놓고 하자는 애원과 협박이 아무 소용이 없다. 팔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덜컥 겁이 난 나는 항복을 하고 만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계집애가 귀신 같다. 정말 재수 없는 가스나다. "안 물기로 약속했자나?" "내가 언제? 안 꼬집고 안 할퀸댔지!" 할 말이 없어진 나, 멀뚱멀뚱 계집애 얼굴만 본다. 노려보던 계집애의 눈빛이 순해진다. 볼이 빨갛게 물들고 눈길을 땅에 둔다. 고개를 든 계집애가 하얗게 웃는다. "니, 이름 뭐고? 나는 순임이다. 저기 기와집에 산다." "나... 피러다. 지서가 우리 집이다." "푸히히! 뭔 이름이... 아 아이다." 친구를 하기로 한다. 누가 괴롭히면 자기에게 말하라고 순임이가 듬직하게 말한다. 사흘 전 일이다. 순임이가 돌아본다. 빨래하던 손으로 옆 동산을 가리킨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매일 붙어 다닌다. 동산 무덤가에 앉아 '어깨동무'와 '소년중앙'을 보며 키들키들, 그렇게 일 년이 지난다. 봄이다. 여전히 동산에는 봄꽃이 허벌나게 난장이다. 상심한 나, 순임이에게 억지로 웃으며 말한다. "우리 집... 이사 간다." 한참을 내 얼굴만 바라보던 순임이가 고개를 떨군다. "언제 가는데? 어디로? 이젠 못 오나?" 차마 내 인생의 결정권이 내게 없다는 말을 못한다. 나는 순임이의 목만 바라본다. "피러야..." 고개를 든 순임이의 볼이 빨갛다. "니가 참 좋은데... 이제는 못 보나?" 순임이가 울고, 나는 진달래를 따서 이파리를 뜯는다. 이사가는 날, 나는 '어깨동무'와 '소년중앙'을 들고 순임이를 찾아간다. 마루에 서서 이삿짐이 트럭에 실리는 걸 보고 있던 순임이가 주먹으로 눈물을 훔친다. 순임이를 잊지 않기 위해 한참을 바라보다 돌아선다. 눈물이 맺히는 걸 보여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싸나이는 결코 울지 않기로 한다. 대문을 여는 데 순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피러야... 친구야, 잘 가..." 복숭아꽃 연분홍이 참 지이랄 같은 봄날이다. 나는 언젠가는 다시 오기로 결심한다. 결혼하고, 서울에서 울산으로 내려온 1990년 봄. 출장길에 기찻길 옆 동산에 가보기로 한다. 세월이 흘렀어도 동산은 그대로다. 진달래를 따서 이파리를 뜯어본다. 다섯 살쯤 먹은 계집아이 나비 따라 뛰어 온다. 눈이 커다란 게 순임이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비 따라 뛰던 계집아이가 풀썩, 넘어지고는 울먹인다. 다가가 일으켜 세우고 바지의 풀을 떼어준다. 겁이 나는지 뒤도 안 보고 뛰어가 버린다. 예쁜 아이다. 담배를 물고 반은 좁아진 듯한 동산을 휘~ 둘러본다.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들이 봄을 만들고 있다. 해가 지기 전에 가기로 한다. 기찻길 옆 기와집은 식당으로 바뀌어 있다. 담 너머로 연분홍 복숭아꽃이 보인다. 그 꼬마 아이가 놀고 있다. 주방에서 나오는 여자를 본다. 17년 만이지만 순임인 걸 안다. 나는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다. 내 눈을 감추고 서서 한 참을 바라볼 뿐이다. 언뜻 순임이와 눈이 마주친다. 큰 눈으로 바라보던 순임이 무심한 듯 고개를 돌린다. 나도 무심한 듯 돌아선다. 순임이가 잘 살고 있다는 건 감사할 일이다. 언제나 행복하길 바란다. 길 끝에서 돌아본다. 연분홍 복숭아꽃 그늘에서 순임이가 꼬마의 손을 잡고 나를 보고 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순임이가 식당 안으로 들어간다. 나도 담배를 물고 기찻길을 건넌다. 추억에서 깨어난 나, 연분홍 복숭아꽃 그늘에서 옹기종기 봄을 캐는 여자들을 본다. 정화의 연둣빛 머리핀에 나비 한 마리 새록새록 날갯짓하고, 연둣빛 봄날이 아지랑 달팽이처럼 추억의 속도로 간다... ㅡ 2002. 피터.

토막난 가슴시린추억들 피터님의 추억속엔
늘 작은 제 모습이 방울방울 맺혀 있습니다.
거침없는 필력에 가벼운 오르가즘 마져
느낍니다. 고맙습니다.
꺼벙이가 있었지요ᆞ
요철발명왕도 있었고 주먹대장도 있었고ㅡ
소년동아일보에는 독일군 때려잡는
"케리"란 주인공도 있었답니다ᆞ
그 이후로 집에서 키우는 개의 이름은 무조건
케리였습니다ᆞ
조금 커서 국경의 갈까마귀가 있었고
무당거미도 있었습니다ᆞ
그리고 고등학교땐 '오라이' '오라이'
동기 기지배의 목소리를 들으며 학교도 갔었습니다ᆞ
봄 입니다ᆞ
선배님의 글에서 냉이 달래 냄새를 맡습니다ᆞ
감사합니다
또!.. 은지씨한테 혼났는교?
혼나셨으믄 반성을 하셔야지
거...는, 머하러 가셨는교
뒤돌아 오는길이 더 가슴 시릴거라는거
아시는 양반이.....
선그라스 벗지않은신건 잘하신겁니다
그녀도
무심히 바라보면서,
가슴시린 아련한 기억으로 남겨지기를 바랬을겁니다
오래된 이름이네요
왠일루 오늘은 순정만화같은 야그를...
다들 잠이 안오나 보네요 ^-^
이쁜 민들레 한송이 웃고 있네요
발걸음 피해 아니 밟으려니 그옆에 달래도 손을 흔듭니다
도선을 위해 일찍 일어났더니
봄이 벌써 잠자리를 같이 했네요.....
참 썬글라스 배달 사고 나쓔!~~~~~~
채금져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넘어진 계집아이 에게서, 아이엄마의 전화번호를
땄다.
눈 아퍼유.....
그래서 머 우짜라구유?
붕어를 잡았다는겨...말았다는겨
하아암<=333
'연로'하신 선배님들의 공감의 댓글을 감사히 받습니다.
'소통'의 오르가즘에 터져나오는 단말마.
하악하악~. ^^"
귀인을 언제나 존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시길. ㅡ,.ㅡ"
저를 따르시면 조만간 물 반 고기 반, 내면의 둠벙에 다다를 수 있답니다.
선글라스 배달사고요?
그게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구요?
도대체 누구야? 주거써! ㅡ;;ㅡ"
뒤에서 밀어주며 이사같이하고 일빠따로~~~~~~~~~
도깨비감투읽던 그 만화방이 생각남미더...
어쩜 피뤄님 유년시절이
저랑 똑가트세요.......눼!!??
전,,,순임이가 아인 순옥이 였어예 ^^
수....수......순옥아~~~~~~~~~~~~~~~~~~~~~~~~~~~~~~
더이상 할말이...ㅋ
무님빠져!
연분홍 추억에 범벅이 되셨군효. ^^
아래 사진은 따님이시겠져?
아빠 안 닮아 미인이에욤.
올은 책임지슈,
펙트가 없는게 안타깝네요.
조금만 더배우고 하산하시길~~
매력있는 글
봄과 어우러 집니다.
나도 첫사랑이 그리워 집니데이
추억이 같다고 인물도 같을까요?
쿨럭~. ㅡ,.ㅡ"
어젯밤, 첫월님 또래의 후배넘에게서 전화가 왔더군요.
갈증에 사이다 마시듯 제게 복음을 구하더군요.
꼴리는대로 살아라, 고 삶의 지혜를 줬습니다.
진심으로.
허울보다 내면을 봐주세요.
순결하지 않습니까? @@"
실례를 무릅쓰고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형님!"
모처럼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군요. ㅡ;;ㅡ"
우리는 늑대로 변장해도 순결한 토끼라는 걸 들키는 모양입니다.
설마 뭐욧! ㅡ;;ㅡ"
벌써 제얼굴을 잊어버리셨나~??
제 인물이 훨~~~~~~~~~~~~~~~~~~~~~~~~이뻤어예 ^^
참으로!
고생하셨습니다..^^;;
기억이 안나네
또읽자니 눈만이 아프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