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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기 잡아 보셨나요?

아버지 고기
이런 고기 잡아 보셨나요 (커뮤니티 - 자유게시판)
대구에 불일이 있어 갔다가 내려오는 길. 고속도로로 늘 다였지만. 시간도 많고 드라이브나 하자싶어 국도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산길을 꼬불꼬불 내려오는데. 먼 아래로 저수지가 조금씩 보이나 싶더니 가까이 내려오자 상당이 넓은 저수지였고. 물을 보면 낚시를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잠깐 이라도 낚시를 던져 보고 싶었으나. 차에 낚시대가 실려 있지 않아 그냥 이리저리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 그래도. 왠지 좀 전에 보고 온 저수지에 가면 금방이라도 붕어가 물어 줄 것만 같은 기분에.... 집사람이 퇴근해 오기 전에 도망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낚시가방을 차에 실고 아까 그 저수지로 달려갔다. 몸이 불편해 노지로 낚시를 갈 때는 포인트보다 차가 들어가고 움직이기 편한 자리를 선택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나의 현실이다. 상류 쪽이 그래도 고기가 많이 몰릴 것 같고 뒤로 소나무 숲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카니발이 겨우 들어가는 쪽은 길도 마다하지 않고 그곳 물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양어장에서는 한 두 대로 낚시를 하지만 노지는 여러대를 편성해 낚시를 하는 편이고. 지렁이나 옥수수를 사용해 잔입질에 대를 자주 들지 않고 좀 큰놈을 노리는 편이다. 한참동안 잔챙이 입질이 이어지고 쑥“ 살아지는 입질에 챔질을 하니 굉장한 무게가 느껴졌고 겨우 끌려나온 낚시에 가재미 만한 불루길이 잡혀 나왔다. 지렁이는 틀렸구나. 싶어 떡밥을 단단하고 크게 뭉쳐서 밤낚시에 도전하기로 했다. 밤이 되자 잔챙이 입질은 사라지고 그런 되로 괜찮은 붕어씨알이 몇 마리 올라와 다시 지렁이를 여러 마리 끼워 좀 큰놈을 노려보려고 했는데 이상한 넘이 잡혀와 자세히 보니 손바닥 길이만한 버들치였다. 버들치는 1급수에 사는 어종인데 산속에 있는 저수지라 수질이 좋았나보다. 버들치를 잡고 보니? 기억의 맨 끝자리에 자리 잡은 유년기 시절이 생각이 났다 산골 촌넘인 나는 태백산 밑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어머니도 돈을 벌고 아버지는 실력을 인정받는 목수로 일을 하셔 큰 부자 집은 아니었지만 부유한 집안에 4형제 중 만내로 자랐으나 8살이 되면서 어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타락한 아버지는 술로 매일 끼니를 이으니 얼마 가지 못해서 집안은 풍지 박살이 났다. 아버지는 양계장를 해보시려고 했지만 술 때문에 힘들었고 난 죽어가는 병아리가 배고파서 죽는 줄 알고 긴 막대에 바느질 실로 원줄로 묶고 낚시 줄로 묶어서 파는 낚시 바늘을 묶어 튜부형 종대를 매달고. 냇가로 달려가 버들치를 잡아 주전자에 살려와 배고픈 병아리에게 던져 주고는 했다. 그 모습을 보신 아버지는 정신을 차리고 술을 줄이시며 양계장을 돌보기 시작 하셨고 버들치 한 마리에 십원씩 돈을 주셔 꿈에도 그리던 꼽기 식 대나무 낚시대를 사서 온 냇가를 자랑삼아 뛰어 다니고 버들치를 잡으며 유년기 시절을 흘려보내고. 사춘기 시절 중학교을 입학하면서 어려운 가정환경과 정에 굶 줄인 난 비행 청소년으로 변해 버렸다. 아버지는 1주일이 멀다하고 경찰서에 불려 다니셨고 공부는 꼴찌에서 두 번째로 한마디로 말해 꼴통 중에 꼴통이 되었다. 중1부터 술과 담배를 피우며 남의 집 담을 타넘고 치료비만 물려주며 학교를 다녔지만 단 하나! 만들기와 그림대회는 무조건 최우수상은 내 것이었다. 목수이신 아버지는 늘 상을 받아와도 “용군아” 하는 말 한마디로 넘어 가셨지만 전국대회에 최우수상 두 번은 그래도 온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니셨고 글짓기 최우수상은 못 보던 상이라 그런지 넌 내 아들이지만 알 수 없는 자식이라 하시며 중2학년인 나에게 진로소주 세잔을 따라주시며 정말 말씀이 적으신 아버지는 내게 말씀 하셨다. 그림 잘 그리는 것은 인정 하겠다. 호기심이 많고 남 하는 것 다해보고 싶을 때. 남자가 술 담배 해보는 것도 이해하겠다. 엄마도 없는 것이 학교 다니며 남에게 기안 죽고 맞지 않고 때려 주는 것도 장하다고 생각 한다. 하지만. 책이 아무리 보기 싫어도 만화책이라도 한번 책보는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버지가 통학비와 학비를 제때 못주어 미안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제 다시는 남의 물건에 손대지 않았으면 하구나. 아버지는? 말씀이 별로 없으신 분이셨고 아무리 술을 드셔도 평생 욕 한마디 쓰지 않으시며 살아오신 분이다. 자식들에게도 이 자식 저 자식은 욕이 아니라시며 정 화가 나시면 그렇게 말씀 하실 뿐 욕 하시는걸 본적이 없다. 그래서 우리형제 들은 서로 욕해 본적도 없고 싸워 보지도 못했다. 그건 아버지 앞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한날 아침 누나가 학교가라고 깨우기에 씨이팔 좀 있다 일어난다고.?? 잠시 후?? 아무런 말도 없이 장작계피에. 자전거 뒤에 짐 묶는 고무타이어 고무줄을 마구 휘두르는데 잠자던 난 뒤지게 맞다가 장작계피가 날아가 아버지가 주우러 간 틈을 타 팬티만 입은 채로 무조건 도망쳐 나왔다. 집 앞 다리를 건너 문밖에 장작계피를 들고 서있는 아버지에게 “내가 아버지 시이끼 만나” 하고 소리치고는 펑펑 울면서 아침부터 팬티 바람으로 뒤도 안돌아보고 몇백미터가 넘는 친구 집으로 도망쳐 옷장 안에 숨어 있었던 적이 있다. 누나에게 욕 한마디 했다가 머리 두 군데 찌어지고 어깨뼈 탈고. 피멍은 여기저기 말할 것도 없었다. 친구 엄마 손잡고 병원 가서 머리를 세 바늘 여섯 바늘 꾀 매고 그 꼴로 학교에 가니 담임선생님 언젠가 한번은 죽을 줄 아셨다나? 정말 한순간에 뒤지게 맞아 보았고 그것이 아버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한번 맞아 본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신발 꺽 어 신거나 끌고 다니면 혼내 주었고 침 아무데나 벹고 다니며 이유 없이 아이고 죽겠다. 죽겠다. 하던가. 한숨 필요 없이 푹푹 쉬지 않으면 그렇게 잔소리 하시는걸 보지 못했다. 그 후로도. 난 점점 남의 집 담 타넘는 것이 더 대범해졌고 폭행 또한 잔인해지면서 결국 법원까지 끌려가. 아버지. 담임선생님. 교장선생님이 그림솜씨가 너무 아깝다하시며 중학교 졸업을 시키겠다고 세 명이 각서를 쓰고서야. 집행유해로 풀려 날수 있었다. 그리고도 계속 지나친 폭행은 아니지만 정학과 무기정학은 몇 번 더 있었고 아버지는 그럴 때도 사건만 해결하시지 그 어떤 말씀도 하지 않았다. 겨우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입학했지만 그 버릇 남 주지 못하고 사고는 계속 이어졌고 형편이 더욱 어려워진 아버지는 하숙비와 학비를 몇 번이나 미루었다. 난 말씀 드렸다. 학교에서 또 말썽을 부렸는데 사실 이번에는 아버지 모셔오라고 하고 하숙비와 학비도 못주니 가서 자퇴서를 내고 서울로 가겠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니? 그럼? 한마디만 듣고 가거라. 이제 누가 때리면 한 대 맞고 죽지 않을 정도면 무조건 참 아라. 그리고 길가다 백원짜리 동전이 하나 떨어져 있어도 너 돈이 아니면 절대 손대지 마라. 지금까지는 못 나도 아버지가 너 옆에 있었는데. 이제는 혼자가 되잖니? 그길로 나의 사춘기는 상처와 아픔만으로 그렇게 지나가 버리고 서울로 상경해 모든 걸 잊고 정말 열심히 기술을 배우며 일을 했다. 열심히 하는 만큼 나의 청년기 시작은 활력이 넘치고 멋진 시절 되어갔다. 가끔 명절이면 고향 아버지 집으로가 이번에는 기계다루는 기사 다음 번 에는 반장. 주임. 계장. 거기에 회사에서 내준 썬딩 된 레코드 로얄 중형 세단을 고향으로 끌고 가면 그때 당시는 출세였다. 혼자 사시면서 몇 달 동안 드신. 외상값이라 하여도 장부에 그저 소주와 간 고등어 두부 몇 모가 다며 그걸 갚아드리고 용돈을 조금 드리고 올라오면 기분이 참 좋았다. 그러던 그해 구정! 아버지는 올해는 형제들 중 내가 가장 느낌이 좋이 못하니 늘 조심하라고 평소와 다르게 말씀 하셨고. 그러던 중 아버지께 편지 한통이 왔다. 어린 돼지를 몇 마리 길러 용돈으로 쓰시면 자식들에게 신세 지기 싫다고 하시는 내용이었다. 난 그때 장가가려고 보험 저축을 하고 있었으며 30만원을 보내면 한 달 쓸돈이 없었고 형은 옆에서 뭘 하나 하면서 보내드리지 않았다. 그 다음 달 또 편지가 왔지만. 난 50만원 대출을 해 군대 가는 친구가 준 오래된 낚시장비를 모두 교체하는데 사용하고 형이 어떻게 해 드리겠지! 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에도 보내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여름휴가를 몇 칠 남기지 않고 새 낚시대는 사용해 보지도 못 한 채 추락 사고로 난 병원에 실려 갔고 몇 일후 의식을 찾았을 때 아버지가 옆에서 간병을 하고 계셨다. 그렇게 1년을 간병하시다. 장애인이 되어 버린 나를 대리고 고향으로 내려갔지만 아버지는 암 말기셨고 돌아가시기 직전 뒤돌아 누우신 체 그동안 형과 형수 이야기를 모두 해 주셨고 절대 아무리 힘들어도 형에게 기대어 살 생각 말라고..... 그 말씀을 모두 듣고 나니 집안에 오래된 낡은 라디오 한 대와 흔한 TV하나 없었으며 냉장고는 물론 현대에 존재하는 가전제품 이란 눈을 씻고 보아도 하나도 없었으며 형에게 용돈은 단 십원도 받아 본적이 없다 하셨다. 정말 새 옷 한 벌이 없으셨다. 한 시간 거리에 돈도 잘 벌고 있는 형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그동안 이러한 무관심이 눈에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나도 마찬가지는 마찬가지였다. 정말 아버지께 너무 죄송스러웠고 그래서 그때 돼지새끼를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 하셨군아. 하고 후해 해보았지만 그때는 이미 지나가고 늦은 일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몇 개월 후! 아들들에게 버림받고 무엇이 미련이 그렇게 남으셔서 아버지는 예정보다 조금 더 세상에 머무시다 외롭고도 서글픈 이 한만은 세상과 아쉽게도 이별을 하셨다. 정말 집에서 TV구경 한번 구경 못해 보시고...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 길을 서두르는 아버지 앞에 왜‘ 조금만 더 있다가 사고가 나지! 꼭 이 모습을 보고 돌아 가셔야만 했던가? 아버지와 나에게 이런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면, 난 지금 죽어서라도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 따지고 싶다. 하지만! 모든 일들은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만든 과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라 나는 믿는다. 아버지는 당신이 그런 길을 걸으시며 만들어 왔고 난 내가 이 길로 걸어온 것뿐이다. 아버지와 나의 인연. 그리고 숙명과 운명. 그 무엇으로 다 말을 하며 얼마나 더 아프고 울어야. 가슴이 터지도록 후련 할까요? 그렇게! 그렇게 열심히 해서! 비록 장애인의 몸으로 날개를 잃었지만. 지방. 전국. 국가대표. 세계기능올림픽 그리고 산업훈장. 이모든 것을 훨훨 날며 쓰러버리는 이 모습들도 좀 보고 가시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셔서 어머니 옆으로 그리도 급하게 가셨나요. 이제와 이! 이 불효는 어찌하라고? 늘 마당에 마련된 대패 다이에서 송진 냄새 풀풀 날리시며 힘찬 대패질과 톰 질을 하시던 아버님! 늘 보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형은 지금 지병으로 형수와 살아가기 엄청 힘들어 하는 것도 보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형은! 아버지가 남겨 주신 것이 없어서 자기가 그렇게 힘들게 살고 있다고 말하며 오히려 저에게 은근히 조금 아라도 도와주길 바라지만. 아버님! 세상에는 온 갓 수많은 죄가 존재하지만 도저히 용서 못할 죄도 있음을 저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그 산골! 그 작은 마을에서. 먹을 것이 지금처럼 흔치않고 귀했던 그 시절 아버님 혼자 우리 사형제를 어떻게 키우셨어야. 형에게 그따위 대접을 받지 않고 사셨을까요? 건강한 몸으로 키워 주신 것만으로도 그 은혜를 그 무엇으로도 다 갚지 못하는 우리들인데. 피를 나눈 형제이고 아버님의 같은 자식이라 가끔은 찾아는 가지만 남겨줍게 없어서..... 그 말을 입에다 다시 주워 담든 뚱구멍으로 주어 먹든. 반성하고 후회하지 않는 한 이 동생의 너그러움은 없겠지요. 이제! 살아 온 만큼 삶에 무게를 느끼며 내일 모래면 땅과 하늘에 뜻을 이해 한다는 지천명을 바로 앞두고 살아가는 중년이 되어버린 내 모습! 과연 나의 지금 모습이 진정한 중년의 모습일까?... 버들치! 태백산 줄기에서 흐르기 시작한 맑고 투명한 벽계수는 우리 동내까지 내려오면서 작은 시냇물을 이루고 버들치와 은빛 반짝이는 파라미. 힘이 억센 꺽지 등. 나의 유년기 시절 놀이터가 되어 주었고. 흘러 오염된 사춘기 시절을 상처로 흘려 보내며 다시 정화되어 힘찬 청년기와 폭포를 만나 높은 곳에서 추락하고 부서며 아픔을 이겨내야 했고 또 다시 흘러 이곳에서 그 시절 그 버들치와 만나게 될 줄이야. 아버님은! 아버님은 민물고기를 참 좋아 하셨지요. 잡아온 버들치들을 병아리를 왜 주니 우리 개구쟁이가 힘들게 잡아 온 걸.. 자! 스물 마리가 넘는 군아. 한 마리에 십원씩이니. 어디보자. 아버지가 삼천원 줄까. 어서가 뽀빠이랑 라면땅 사서 먹으렴..... 아버지는 이넘 들이나 짭쪼름 하게 지져서 술안주나 할까... 아버님에 향수!!! 뒤 소나무 숲에서 상큼하게 풍겨오는 솔향기를 은은히 맡으니 아버님이! 우리 개구쟁이 낚시 잘하나 하고 뒤에서 지켜서 보고 계시는 듯 하다. 잡은 버들치를 조심스럽게 놓아주며 깜빡이는 케미불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하며 골이 깊었던 길고 길었던 지난 삶들. 밤새워 몇 번이고 되돌아갔다가 돌아오고 또 돌아보았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불상하고 외롭고 쓸쓸했던 사람을 문는 다면! 그는! 아버지다. 그리고 가장 남자다운 남자는 누구 나고. 그 또한 누가 문는다면. 아버지! 나의 아버지다. 밤이 새도록 붕어 몇 마리 더 잡고 버들치는 아침이 되도록 다시 보지 못했다. 아침이 밝아 오면서 깊은 꿈에서 깨어나는 듯 했으며 집에 돌아와 집사람에게 뒤지게 혼나고 침대로 올라가 나무꾼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잠에 든다. -나무꾼- [이 게시물은 운영자님에 의해 2011-06-02 22:29:33 전통바닥낚시에서 이동 되었습니다]

아침부터 정말 눈시울 뜨거워 집니다. 탈도 많고 사고 많았던 못난 아들이 여기 하나 더있음을 스스로 잘알고 있기에...
살아계실제에 더 잘해드려야겠단 생각이 다시 듭니다.
인생 선배님 , 나무꾼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리네 아버지들에 대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찌 작품도 잘 감상하고 있습니다.
나무꾼님 님의 글을 한줄 한줄 읽고 내래갈때 마다 가슴이 뭉쿨 눈시울이 뜨거워 지는군요.....
감동적인 님의글 잘읽고갑니다 .우리아들(2명)들도 읽어보라고 해야되겠네요..
무더운 날씨 건강 조심 하세요
저도 돌아볼 부모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진작에 좀 돌아볼것을...
항상 마음만 이렇게 아려옵니다
그래서 아버지고기 였군요..
장소만 틀리지 비슷한 유년시절을 경험한 저로서는 너무 가슴에 와닿으며..
또 다시 머리속에 온갖 풍경과 사진을 만들어 그림을 그렸습니다..
잠깐 읽은동안 30년의 세월이 흘렀네요..
쪽지 고맙습니다!!
엉~뭐가 이리길어~~하다가 저두 모르게 첨부터 다시 꼼꼼히 눈시울 적시며 봅니다*^^*

좋은글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버들치 저도 기억이나서 댓글 달려고 왔다가 추억이 아련한 글을 읽어봅니다..

어릴적에 잡아본기억도 나네요..

깊이깊이 생각하며 그때의 어린시절을 생각해보게 하네요..잘 읽어보았습니다.
물로간나무꾼님!
오늘은 어린시절의 모습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올려주셨군요.
구구절절이 가슴에 와 닿아 진한 감동을 주는 중년의 부모님을 생각하는 효심을 느낍니다.
불의의 사고로 불편한 몸일진데,
잘 살아오신 님의 열정에 박수드리며
건강하게 낚시와 좋은 손재주로 찌,소품에 정성을 담으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나가 조금씩은 갖고 있을 법한

어렵고 힘들었던 유년의 소중한 기억과

상처와 고통을 극복하고 치유하는 과정을

짧은 글로 담담이 풀어

좋은 글로 나누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며 즐거움 가득한 일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심연 깊숙히 내려앉는 사랑을 머금은 생명의 글 감사합니다
왜!!! 이런글을 쓰셔서 사람 힘들게 하시는지~~~~주위가 고요해지는 그런기분이네요~~~시골같다가 아버님 산소도 안들리고 왔는데~~~괜실히 신경 쓰여요~~~좋은글 읽고 갑니다
처음 물로간나무꾼님의 글을 읽었을때는

숨쉴틈도없이 간격없이 글을 써놓아서 글을 읽다보면 눈도 아프고 숨차서 힘들었었는데... ...




이제는 가슴이 아프고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나뭇꾼님 도로 산으로 올라가세요

우쒸~ 눈물이 날라고 하네
좋은글 고맙습니다. 책 쓰셔도 좋을 듯 싶습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늘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만듭니다.
옆에 계실때는 그냥 그런 존재로만 여기다 막상 곁에 없으시면 늘 후회와 그리움이

마음을 짓누르내요!!!

다시 한번 돌아 가신 아버님을 생각하니 글 올리는 동안에도 눈물이 글썽이애요!

아버님 보고 싶내요!!!ㅠㅠ
아 ! 그랬었군요

아픈 유년시절이

어찌보면

지금은 무척 아름답다는

생각이

제게 드는건 왠일일까요 ?
아버지란 단어를 한번 떠오르게 하는 좋은글입니다...버들치!

저희 충북지방에서는 중태기라고 합니다...1급수 맑은물에서 서식하는 버들치

지금은 각종환경오염으로 보기힘든 희귀종이 되버렸네요...ㅠㅠ
반가버요 물로간 나무꾼님!

저도 지독하게 가난한 집에서 자랐습니다.

딱 지금 보리익을 무렵 참 힘들었죠.

꿀밤삶아 사카리와 버무려 주먹밥 먹을때도 많았죠.

우리의 아버지들

억척같이 사시다가 허무하게 가셨습니다.

버들치로 인해 가슴 뭉클하게 읽고 갑니다.

효도란!

다시 생각해 봅니다.
눈물이 핑 도네요

부모님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 봅니다
잘읽었습니다

아버지....................''
눈 앞이 뿌여지네요.
에저께 잠시 뵙고 왔지만...
항상 부족함이...............
한자 한자 깊은마음 느끼고갑니다.
화이팅 .///
기억속의 아버지 나이가 되어 보니.....

아주 많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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