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때 일본 관헌과 민간인들이 한국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를 학살한 사건.
역사적 배경
1920년대 전반 일본은 하나의 큰 시대적 전환기에 직면하였다.
밖으로는 코민테른의 활동이 동아시아에 미쳐 한국·중국의 민족해방운동이 격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안으로는 공황으로 노동운동·농민운동·부락해방운동이 사회의 저변을 뒤흔들었다.
여기에 일본의 군부와 국가주의자들은 ‘과격사회운동취체법’ 제정을 시도하고, 이들 운동에 대한 탄압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 때 일어난 대지진으로 민중이 공황 상태로 빠져 버리자, 일본 군부와 군국주의자들은 당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라 여기고 민중의 보수적 감정을 이용하였다.
대지진이 일어난 직후인 1923년 9월 1일 오후경시청(警視廳)은 정부에 출병을 요청함과 동시에 계엄령 선포를 준비하였다. 내무 대신 미즈노(水野鍊太郎 : 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경시총감 아카이케(赤池濃 : 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등은 1일 밤 동경 시내를 일순하였다.
다음 날동경과 가나가와현(神奈川縣)의 각 경찰서 및 경비대로 하여금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라는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리도록 하는 한편 각 경찰서에 진상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폭동’의 전문(電文)을 준비해 2일 오후부터 3일 사이에 내무성 경보국장 고토(後藤文夫)의 명의로 전국의 지방 장관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타이완총독부에도 타전되었다.
전문 내용은 “동경 부근의 진재(震災)를 이용해 조선인이 각지에서 방화하는 등 불령(不逞 : 불평불만이 많아 멋대로 함)한 목적을 이루려고 하여, 현재 동경 시내에는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리는 자가 있다. 동경에서는 이미 일부 계엄령을 실시하였으므로 각지에 있어서도 충분히 주밀한 시찰을 가하고, 조선인의 행동에 대하여는 엄밀한 단속을 가해 주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조선인 폭동’의 터무니없는 소문이 일본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가운데 2일 오후 6시 긴급 칙령으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5일에는 계엄 사령부에 의해 ‘조선 문제에 관한 협정’이라는 것이 극비리에 결정되었다.
협정 내용은 ① 조선인의 폭행 또는 폭행하려고 한 사실을 적극 수사해 긍정적으로 처리할 것 ② 풍설을 철저히 조사해 이를 사실화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긍정하는 방향으로 노력할 것 ③ 해외에는 특히 적화(赤化) 일본인 및 적화 조선인이 배후에서 폭행을 선동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 데 노력할 것 등을 지령해 조선인 폭동을 사실로 날조하는 데 광분하였다.
7일에는 두 번이나 유산된 ‘과격사회운동취체법안’을 부활시킨 치안유지령을 긴급 칙령으로 공포하고, 치안을 해치는 사항을 유포시키는 행위는 징역 10년의 중형에 처하게 하였다. 이것이 1925년의 〈치안유지법〉의 전신이다.
계엄령은 처음 동경부와 인접 군에 선포되었으나, 3일에는 가나가와현, 4일에는 사이타마현(埼玉縣)과 지바현(千葉縣)에도 확대되었다.
경과
이같은 계엄령 아래에서 군대·경찰을 중심으로, 또한 조선인 폭동의 단속령에 의해 각지에 조직된 자경단(自警團)에 의해 6천여 명의 조선인 및 일본인 사회주의자가 학살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독립신문 특파원이 조사 보고한 바에 의하면, 동경에서 752명, 가나가와현에서 1,052명, 사이타마현에서 239명, 지바현에서 293명 등 각지에서 6,661명이 피살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시체조차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학살이 가장 먼저 행해진 동경과 가나가와현에서는 군대와 경찰이 중심이 되어 행해졌고, 지바·사이타마현 등지에서는 민족배외주의자를 중심으로 한 자경단에 의해 행해졌다.
이들 자경단은 죽창·일본도·곤봉·철봉 등을 들고 도망치는 한국인들을 붙잡아 무차별 학살하였으며, 심지어 경무서내로 도망친 한국인들까지 쫓아 들어와 학살하였는데도 일본 관헌은 사실상 이를 방조하였다.
또한, 일본 정부는 10월 20일 학살 사건의 보도 금지를 해제하였으나 그들은 군대·관헌의 학살은 모두 은폐하고, 그 책임을 자경단으로 돌리는 데만 급급하였다. 그 뒤 일부 자경단원은 형식상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였으나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모두 석방되었다.
일본애들은 종교가 없어요
언제나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서 아간의 보편적.저버릴 수 릴거여요
그러니 우리는 일본과 경제등 모든면에서 협력을 하더라도 계속 끝까지 역사의 진실을 우리 자손만대에 알려야하고 그 역사를 대외적으로 알려나가야합니다
그들은 끝까지 사죄하지 않을 것이기때문입니다
이런걸 우리나라 방송국 에서 본적이 없다.
이러것들도 언론 이라고 한다.
그걸 왜 방송하지 못했는지는 대충 짐작은 간다.
지금이라도 이런걸 공영방송에서 주기적으로 다루어 주어야 한다.
초 중 고 학생들 교과서에도 6년간 실려 있어야 한다,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직후인 1923년 9월 1일 ~~그날을 생각나게 우리정부는 는 뭐라도 해야했다~~~
그러나 그동안 정부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안았다.
그때 학살당한 한국인들을 위해서 정부는 지금이라도 뭔가를 해야 한다.
일제시대 쌀수탈의 산실 흥남시청 농업과장을 역임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군 상위(대위) 문용현의 아들 문재인이 대통령인 나라. 일제시대 천왕에 맹세하고 일제역사를 가르킨 훈도의 후손 유시민이 지지율 1위인나라, 일제시대 공무원하다 광복후 조선공산당 공산청년동맹 서울지부 청년위원장 손용우의 딸 손혜원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30채 투기를 해도 쉴드치는 나라. 난 이런 대한민국이 싫다.
박원순의 아버지 박길보는 일제시대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징용 보내고 젊은 처녀들을 위안부로 보내는 일본 보국대 직원으로 7년이나 근무했다. - 쪽발네이버 뉴스 댓글 중에서
[출처] 오늘 방송은 쉽니다; 쪽발 미쓰비시 사사키 훈장, 박원순 애비 박길보, 문땡 애비는 쪽바리인가?;오늘 뉴스만 정리해서 올립니다 |작성자 인드라
날도 더운데 더 열받네요.
사라짐으로
죗값을 받겠죠
정의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때 일본 관헌과 민간인들이 한국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를 학살한 사건.
역사적 배경
1920년대 전반 일본은 하나의 큰 시대적 전환기에 직면하였다.
밖으로는 코민테른의 활동이 동아시아에 미쳐 한국·중국의 민족해방운동이 격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안으로는 공황으로 노동운동·농민운동·부락해방운동이 사회의 저변을 뒤흔들었다.
여기에 일본의 군부와 국가주의자들은 ‘과격사회운동취체법’ 제정을 시도하고, 이들 운동에 대한 탄압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 때 일어난 대지진으로 민중이 공황 상태로 빠져 버리자, 일본 군부와 군국주의자들은 당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라 여기고 민중의 보수적 감정을 이용하였다.
대지진이 일어난 직후인 1923년 9월 1일 오후경시청(警視廳)은 정부에 출병을 요청함과 동시에 계엄령 선포를 준비하였다. 내무 대신 미즈노(水野鍊太郎 : 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경시총감 아카이케(赤池濃 : 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등은 1일 밤 동경 시내를 일순하였다.
다음 날동경과 가나가와현(神奈川縣)의 각 경찰서 및 경비대로 하여금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라는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리도록 하는 한편 각 경찰서에 진상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폭동’의 전문(電文)을 준비해 2일 오후부터 3일 사이에 내무성 경보국장 고토(後藤文夫)의 명의로 전국의 지방 장관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타이완총독부에도 타전되었다.
전문 내용은 “동경 부근의 진재(震災)를 이용해 조선인이 각지에서 방화하는 등 불령(不逞 : 불평불만이 많아 멋대로 함)한 목적을 이루려고 하여, 현재 동경 시내에는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리는 자가 있다. 동경에서는 이미 일부 계엄령을 실시하였으므로 각지에 있어서도 충분히 주밀한 시찰을 가하고, 조선인의 행동에 대하여는 엄밀한 단속을 가해 주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조선인 폭동’의 터무니없는 소문이 일본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가운데 2일 오후 6시 긴급 칙령으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5일에는 계엄 사령부에 의해 ‘조선 문제에 관한 협정’이라는 것이 극비리에 결정되었다.
협정 내용은 ① 조선인의 폭행 또는 폭행하려고 한 사실을 적극 수사해 긍정적으로 처리할 것 ② 풍설을 철저히 조사해 이를 사실화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긍정하는 방향으로 노력할 것 ③ 해외에는 특히 적화(赤化) 일본인 및 적화 조선인이 배후에서 폭행을 선동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 데 노력할 것 등을 지령해 조선인 폭동을 사실로 날조하는 데 광분하였다.
7일에는 두 번이나 유산된 ‘과격사회운동취체법안’을 부활시킨 치안유지령을 긴급 칙령으로 공포하고, 치안을 해치는 사항을 유포시키는 행위는 징역 10년의 중형에 처하게 하였다. 이것이 1925년의 〈치안유지법〉의 전신이다.
계엄령은 처음 동경부와 인접 군에 선포되었으나, 3일에는 가나가와현, 4일에는 사이타마현(埼玉縣)과 지바현(千葉縣)에도 확대되었다.
경과
이같은 계엄령 아래에서 군대·경찰을 중심으로, 또한 조선인 폭동의 단속령에 의해 각지에 조직된 자경단(自警團)에 의해 6천여 명의 조선인 및 일본인 사회주의자가 학살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독립신문 특파원이 조사 보고한 바에 의하면, 동경에서 752명, 가나가와현에서 1,052명, 사이타마현에서 239명, 지바현에서 293명 등 각지에서 6,661명이 피살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시체조차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학살이 가장 먼저 행해진 동경과 가나가와현에서는 군대와 경찰이 중심이 되어 행해졌고, 지바·사이타마현 등지에서는 민족배외주의자를 중심으로 한 자경단에 의해 행해졌다.
이들 자경단은 죽창·일본도·곤봉·철봉 등을 들고 도망치는 한국인들을 붙잡아 무차별 학살하였으며, 심지어 경무서내로 도망친 한국인들까지 쫓아 들어와 학살하였는데도 일본 관헌은 사실상 이를 방조하였다.
또한, 일본 정부는 10월 20일 학살 사건의 보도 금지를 해제하였으나 그들은 군대·관헌의 학살은 모두 은폐하고, 그 책임을 자경단으로 돌리는 데만 급급하였다. 그 뒤 일부 자경단원은 형식상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였으나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모두 석방되었다.
네이버에서 퍼옴.
추신.
어두운 역사를
들춰서 감정을 일으키자는
의도가 아닙니다.
잊지말고 기억하여 그 누구도
같은 실수를 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종자들 착한 인간 백 명 정도만 추리고 나머지는 다 멸족해야합니다.
의외로 우리나라 학생들은 잘 모르던데 역사교육으로 바로알려야 한다고봅니다
잘모르거나 잊고사는이가 많은듯합니다.
이런시기일수록 다시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된듯하네요.
정은이가 두방만 쏴주면 얼마나 속이 후련할지....
쩝~~~
우리국민들은 훌륭한데
정치인들은 한심
국민들은 애국심
정치인은 현실을 직시하고 가슴만 뜨겁다고 되는건 아니지요 머리를 써야지
영원히 용서못할 개쪽바리 쉐2들~!!!
일제 만행에 대한 문제는 반듯이 출제하도록 해서 자자손손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잘하시겠죠!!
국민의 목소리를
잘들으시겠죠!!
여.야가 하나되어
잘하시겠죠!!
변화된 대한민국을 보일때입니다.
반일 운동에 적극동참합시다.
왜냐구요
친일세력이 고스란히 살아남아 주요 요직 내지는 통수권자까지 되어. .....
독립문 현판글씨도 이완용의 글씨죠
그 독립문이 대한독립을 위해 세운게 아니라는 글도 인터넷에 쉽게 검색되죠
지금 시기에 더많은 사람들이 진신을 알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이 딱 맞죠.
저도 후회합니다. 무관심을.
언제나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서 아간의 보편적.저버릴 수 릴거여요
그러니 우리는 일본과 경제등 모든면에서 협력을 하더라도 계속 끝까지 역사의 진실을 우리 자손만대에 알려야하고 그 역사를 대외적으로 알려나가야합니다
그들은 끝까지 사죄하지 않을 것이기때문입니다
몹쓸...기저의식이 깔려있는 나라입니다.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척하는"
이번 경제보복도 자신에게 도움이 될일이 있으면 합리화하는척 마무리하려 들겠죠
지속적인 일제 불매운동과 한국제품의 질을 높이며..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일본보다.. 순간의 이익을 위해 나라 팔아먹은 매국놈이 더 쓰레기입니다.
이러것들도 언론 이라고 한다.
그걸 왜 방송하지 못했는지는 대충 짐작은 간다.
지금이라도 이런걸 공영방송에서 주기적으로 다루어 주어야 한다.
초 중 고 학생들 교과서에도 6년간 실려 있어야 한다,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직후인 1923년 9월 1일 ~~그날을 생각나게 우리정부는 는 뭐라도 해야했다~~~
그러나 그동안 정부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안았다.
그때 학살당한 한국인들을 위해서 정부는 지금이라도 뭔가를 해야 한다.
일본 처죽여도 시원찬은......
눈물이남니다.
원자폭 만들어야죠!
우리도 핵을 만들어야 합니다.
무궁화꽃이피엇습니다?
박원순의 아버지 박길보는 일제시대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징용 보내고 젊은 처녀들을 위안부로 보내는 일본 보국대 직원으로 7년이나 근무했다. - 쪽발네이버 뉴스 댓글 중에서
[출처] 오늘 방송은 쉽니다; 쪽발 미쓰비시 사사키 훈장, 박원순 애비 박길보, 문땡 애비는 쪽바리인가?;오늘 뉴스만 정리해서 올립니다 |작성자 인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