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비가 내리는 날
나는 우산에 몸을 감추고 골목길을 찾고 있었다. 며칠째 장마비가 내리고 있으나, 빗줄기는 가늘어져 가로등 불빛에 흩어지고 있었다. 30년 전의 골목길을 찾으려니, 그 동안 너무나 많이 변하기도 했지만 어둠 속이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얼마간 갔던 길을 되돌아오고 또 돌아가 보고 드디어 골목길의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30년이 지나고 개발로 인하여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시내의 한 가운데 일본인들이 지은 집 사이로 난 작은 골목길은 개발을 거부하고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작은 길로 남아 있었다.
어두운 골목길을 들어서니 아무도 다니는 사람이 없다. 비 내리는 밤이기도 하지만 큰 길 사이를 연결하는 작은 골목길은 그 곳의 지형을 잘 아는 사람들이나 다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골목을 들어서자, 나는 담배를 피워 물고 한동안 골목 안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기쯤일까?, 그녀가 나를 밀치고 우산을 버리고 도망을 간 곳이...'
K시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배워야 산다는 뜨거운 마음하나로 맨손으로 뛰어 들어온 곳이다. 산아제한의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부모의 잘못으로 세상에 태어나, 수많은 자식의 학비를 걱정하던 나머지 '너는 나랑 같이 농사나 짓자.'고 달래던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무작정 혼자 도망 와서 살던 곳이다.
친구의 자취방에 더부살이하던 나를 찾아온 아버지는 주머니 속에서 지폐 다발을 꺼내주시며, "송아지를 팔았다. 방이나 하나 얻어라. 쌀은 집에서 같다 먹고..." 그리곤 쓸쓸히 돌아서 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나는 눈물을 찔끔거려야만 했다.
학교를 마치면 옷가게에서 점원노릇을 했다. 옷가게는 저녁 장이 서는 오후와 토, 일요일에 손님이 많아서 포장을 하거나, 물건을 팔고 또 배달도 하여 적은 돈이나마 월사금을 마련해야 하였고, 돌아 올 때는 채소가게를 들러 우거지를 주워서 자취방 한 모퉁이에 토끼장을 만들어 놓고 토끼를 길렀다. 토끼는 30일 마다 새끼를 낳으므로 길러서 팔면 돈이 되었다. 그래서 틈날 때마다 들로 다니며 크로바, 쓴냉이 등 토끼풀을 베러 다녔다.
아침저녁으로 신문배달을 했다. 어둠이 걷힐 때나 어둠이 내리는 골목을 신문을 허리에 끼고 헤진 운동화에 불이 나도록 다녔다. 학비를 마련 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발가벗고 불 속이라도 뛰어 들고 싶을 지경이었다. 다행히 나의 피나는 노력으로 학비는 충분히 마련 할 수 있었고, 작은 경비를 스스로 벌어서 쓸 수가 있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자취방에서 얼마 멀지 않는 곳에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있었으니, 시장에서 제일 큰 포목상을 하는 이름난 부자였다. 검은색 자가용이 언제나 드나들었고, 그 집에는 내 또래의 예쁜 여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집의 외동딸이라 했다.
소녀는 언제나 흰 저고리와 검은색 치마로 된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다녔고, 예쁘고 비싼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그리고 간혹 아버지의 자가용으로 등교를 하기도 했다.
나는 우산에 몸을 감추고 골목길을 찾고 있었다. 며칠째 장마비가 내리고 있으나, 빗줄기는 가늘어져 가로등 불빛에 흩어지고 있었다. 30년 전의 골목길을 찾으려니, 그 동안 너무나 많이 변하기도 했지만 어둠 속이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얼마간 갔던 길을 되돌아오고 또 돌아가 보고 드디어 골목길의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30년이 지나고 개발로 인하여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시내의 한 가운데 일본인들이 지은 집 사이로 난 작은 골목길은 개발을 거부하고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작은 길로 남아 있었다.
어두운 골목길을 들어서니 아무도 다니는 사람이 없다. 비 내리는 밤이기도 하지만 큰 길 사이를 연결하는 작은 골목길은 그 곳의 지형을 잘 아는 사람들이나 다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골목을 들어서자, 나는 담배를 피워 물고 한동안 골목 안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기쯤일까?, 그녀가 나를 밀치고 우산을 버리고 도망을 간 곳이...'
K시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배워야 산다는 뜨거운 마음하나로 맨손으로 뛰어 들어온 곳이다. 산아제한의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부모의 잘못으로 세상에 태어나, 수많은 자식의 학비를 걱정하던 나머지 '너는 나랑 같이 농사나 짓자.'고 달래던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무작정 혼자 도망 와서 살던 곳이다.
친구의 자취방에 더부살이하던 나를 찾아온 아버지는 주머니 속에서 지폐 다발을 꺼내주시며, "송아지를 팔았다. 방이나 하나 얻어라. 쌀은 집에서 같다 먹고..." 그리곤 쓸쓸히 돌아서 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나는 눈물을 찔끔거려야만 했다.
학교를 마치면 옷가게에서 점원노릇을 했다. 옷가게는 저녁 장이 서는 오후와 토, 일요일에 손님이 많아서 포장을 하거나, 물건을 팔고 또 배달도 하여 적은 돈이나마 월사금을 마련해야 하였고, 돌아 올 때는 채소가게를 들러 우거지를 주워서 자취방 한 모퉁이에 토끼장을 만들어 놓고 토끼를 길렀다. 토끼는 30일 마다 새끼를 낳으므로 길러서 팔면 돈이 되었다. 그래서 틈날 때마다 들로 다니며 크로바, 쓴냉이 등 토끼풀을 베러 다녔다.
아침저녁으로 신문배달을 했다. 어둠이 걷힐 때나 어둠이 내리는 골목을 신문을 허리에 끼고 헤진 운동화에 불이 나도록 다녔다. 학비를 마련 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발가벗고 불 속이라도 뛰어 들고 싶을 지경이었다. 다행히 나의 피나는 노력으로 학비는 충분히 마련 할 수 있었고, 작은 경비를 스스로 벌어서 쓸 수가 있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자취방에서 얼마 멀지 않는 곳에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있었으니, 시장에서 제일 큰 포목상을 하는 이름난 부자였다. 검은색 자가용이 언제나 드나들었고, 그 집에는 내 또래의 예쁜 여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집의 외동딸이라 했다.
소녀는 언제나 흰 저고리와 검은색 치마로 된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다녔고, 예쁘고 비싼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그리고 간혹 아버지의 자가용으로 등교를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