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어딘지 분명 하지는 않았다
어느 소도시
도심의 평범하고 오래된 단독주택에서 누군가의 이삿짐을 정리해 주고 있었다
작은방
그녀가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그 방 한켠엔 오래된 장농이 벽 한구석을 지키고 있었다
의자를 딛고 장농 위를 손으로 훓어보니 주인의 오랜 부재를 말해주듯 묵은 먼지가 손바닥에 묻어난다
장농을 열자 아래로부터 차곡히 개여 쌓여진 이불들과 방의 주인이 썻던 물건들이 빈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사진들 그리고 열쇠가 달린 작은 서랍
잠궈지지않고 열쇠만 매달려 있는 서랍안은 꽤 중요한 것들을 담아뒀던듯 내용물을 흰종이로 또한번 덮어뒀다
조심스레 열어보니 누군가와 주고 받은 편지들
"그중 맨위 펼쳐있는 편지엔 "부산역에서 이번주 토요일에 만납시다 "라고 힘주어 쓴 남자의 편지가 보인다
편지들과 사진들
장농안엔 오랬동안 잊어버렸던 그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20년도 훨씬 지난 . 아주 오래된 기억
경희 ...
내가 왜 그녀의 이삿짐을 정리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삿짐을 나르기 위해 간곳이 왜 하필 그녀의 방인지는
알길이 없다
그런데 중년의 어느날 일찍 아침 낚시를 가기위해 새벽에 일어나야지 하고는 잠들었을 뿐인데
꿈속에서 누군가의 이삿짐을 정리 하던중 그녀를 기억해 낸것이다
아마도 열 여덟살 고등하교 3학년 무렵 그녀가 지냈을 방이었을 게다
그쯤의 여학생이 썻을 만한 물건들이 그리 짐작케 한다
사용하지 않은 생리대와 일기장 .옷가지들 .교과서들과 가방 . 그리고 그녀가 누군가 주고 받은 편지들 ..
남녀공학 같은 학교에 다니던 그녀였다
도시의 어느 상고에 진학했던 나는 2년동안의 학교생활을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도시생활을 접고
다시 그녀가 다니고 있던 학교에 전학했었다
같은 나이였지만 1년을 꿇어 복학생으로 전학하고도 도시생활의 후유증을 단단히 앓았던 그때였었다
큰키에 청바지 .통통한 볼살에 해맑고 건강해 뵈는 어찌보면 운동선수 같기도 한 그녀였다
어느날 "나를 받아 줄수 있느냐 " 물었을때 그녀의 대답은 작게 고개를 가로로 저을 뿐이었다
마음에 둔 사람이 있노라는 ...
그녀가 졸업을 하기도 전에 학교를 그만두고 스스로 자청해 목부가 되어버린 나
거의 수작업을 해야했던 젓소목장의 일은 고되고 힘들었다
새벽 네시면 손수레에 출렁이는 소똥을 가득 싣고 눈이내려 언 언덕을 오르내려야 했다
하루 네시간 .많아야 다섯시간을 자고 건초를 나르고 전기 울타리를 치고 뒷발에 채여가며
삼십마리 젓소의 젓을 짜야했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
논가운데 어떤 연유로 홀로 서 큰키로 자라던 은행나무가
불이 붙은듯 진노랑 은행잎들을 쏟아내던 따사한 오후에 ...그녀가 왔다
벽 틈사이에 벗어둔 속옷을 찿아내서는 아무렇지 않게 씩씩하게 문질러 빨아널고
자다보면 운동장에 혼자 자는것처럼 쓸모없이 넓은 숙소도 말끔히 치워냈다
연인도 아닌 .친구도 아닌
그녀가 졸업하고 그리고 어디론가 떠나가고 하는동안 난 여전히 목장에 머물러 있었고 그녀와의 인연은
그것이 끝이었다
그후 더이상의 만남도 연관 지을만한 무엇도 없었다
그런데 중년이 된 지금 어느날의 꿈속에서 그무렵 그녀가 머물렀을 그녀의 방에 내가 있는 것이다
남자는 편지 첫머리에 또박 또박 눌러 "부산역에서 이번주에 만납시다"라고 썻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집을 떠났을 그녀와 그무렵 연애하던 이 였을까 ..
경희의 아버지는 엄했었다
곱고 바르게 자라왔던 경희가 낳고 키워준 부모가 지금의 부모가 아니라는걸 알게 된게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스스로 알게 되더라 ..했었다
엄하던 경희 아버지도 더이상 경희에게 엄하게 대할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무렵 경희는 "부산역에서 만나자는 남자와 편지를 주고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남자 였을까
날 받아줄수 없냐는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마음에 둔 남자가 있다 하던 ..
경희와 남자가 서로 주고 받은 꽤 많은 편지들을 읽고 또 읽었다
친부모의 존재를 스스로 알아가는 경희가 있었고 그 남자와 그 많은 대화를 해가는 동안
점차 서로를 그리워하는 남자와 경희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토요일 부산역에서를 마지막으로 경희와 남자의 편지는 끝이 나 있었다
경희의 방 한가운데 앉아 그녀의 편지를 읽다 잠에서 깨어났나보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이른 아침이다
왜 그녀가 갑자기 생각났을까
왜 벼란간 그녀를 꿈꿨을까
그녀와의 인연이라 할만한 얘긴 구실을 남길만한 특별한게 없는데 ...
스무살 서른살 마흔 중반이 될때까지 여러 인연들을 만나왔고 그중엔 "연애"라고 특정지을만한
경우도 꽤 여러번이었지만 경희와는 그 짧은 얘기가 전부인데 ..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사는동안 문득 문득 생각난 사람이 그녀였다
까닭없이 이유없이 지금쯤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가 돼 있을 그녀가 궁금하곤 했었다
사랑 했었을까
사랑했었다 말하기엔 너무 짧았다
너무 가벼웠다
손한번 잡아본적도 없는데 서로 탐하거나 욕심에 부대낀적도 없는데
안고 부비고 핧으며 울고 몸부림 치던 젊은날 사랑했던 어느 인연보다 더 생생히 기억되는 이름 경희
왜일까 ..
동이 트면 요즘 나온다는 낚시터에 출근전 두시간이라도 가서 앉어봐야지 하며
잠들었다가 벼란간 꾼 꿈의 느낌을 기록하고 싶어 컴퓨터 앞에 앉아버렸다
이제 겨우 동이 튼다
마흔 중년에 보는 동화책 같은 느낌이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낚싯터로 달려 가봐야 겠다
중년 남자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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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암시가 있을것 같네요.
문득 떠오르는 첫사랑의 기억들
아마 그여인에게 무슨 사연이 생겼던가 그녀도 본인 생각을 동시에 하면
텔레파시가 통했을수도 있구요.
여튼 은둔자님의 글 솜씨는 노벨상 감입니다.
낚시 그만두고 글쓰기 하이소 노벨상은 제가 추천 합니더
문맥 표현력....프로 작가입니다.
출조앞둔 주말아침에 좋은 글 읽었습니다.
역시 좋은글은 감정이 꿈틀데는 고요한 시간에 나오나봅니다.
부지런도 하시지 새벽에 글쓰시고 출조도 하시려구요.
덕분에 풋풋한 사춘기감정 느끼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
우짜마 글을 조리있게 쓰는지를..................
작가로 데뷔해보심이 어떠하실지요.. 무조건 베스트셀러 나온다에 1표입니다^^
즐거운 출조하세요^^
자유롭게 쓰이기도 하지만 "은둔자"님의 글에선
"기승전결"이 확실한 글이기에 눈길이 한번 더 갑니다.
이제 저도 게흘러졌는지 글쓰기가 힘들어집니다.
글감도 그렇거니와 집중력과 시력이 떨어져서 예전같지가 않습니다.
좋은글 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