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시절....
1984년~~~
3학년이 되면서 경북의성에서 대구로 유학?을 왔었습니다
어린 나이라 이모네 집에서 학교를 다녔지요
일년에 딱 두번 방학이 되어야 고향집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여름방학, 겨울방학 때에만...
매번 방학이 되면 종업식을 끝낸 열살짜리 어린아이가 홀로 대구북부 정류장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의성가음 터미널에 내리면... 뭐가 그리 신났는지 쏜살같이 10리길을 뛰어 집으로 갔었습니다
그길을 뛰어 갈때면 저멀리 과수원에서 뛰어오는 저를 보고 울 아부지 목소리가 들립니다
"천처히 댕기라!!! 엎어진다!!!"
여름방학이면 아부지와 같이 집앞 저수지에서
작은 붕어 낚아서 저녁엔 모기불 피운
마당 마루에서 맛나게 매운탕 끓여 먹던
어린시절....
2006년~~ 봄~
오후 햇살좋은 어느 봄날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아부지 많이 안좋으시다"
얼마전 건강검진을 받으신다 하시더니 결과가 좋지않음을 짐작합니다
더 들을 것도 없이 차를 돌려 집으로 향합니다
저를 본 아부지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뭐할라꼬 왔노~ 천처히 댕기라 차 사고 난다"
며칠후
안동병원에 입원하셔서 정밀 검사를 하셨습니다
짐작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또 며칠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비보를 접합니다
폐암말기...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어떻게 왔는지 모를 안동병원까지에 시간....
코와 입에 의료기를 다신 아부지가 어렵게 가쁜 숨을 쉬시며 말씀하십니다
"천처히 댕기라 클난다"
2006년 여름
폐암관련 권위자가 전북대학병원에 교수로 계신다고 해서
아부지는 끝내 안가신다고 하시는것을 돈생각 하지마시고 가시자고 가시자고....
울면서 설득?하여 전주로 병원을 옮겼습니다
꼭 치료되실거라고 건강해 지실거라고 곧
며느리 뱃속에 있는
둘째 손녀얼굴 보실수 있으실거라고 말씀드리고
제 마음으로는 준비를 하고 조금더 연장만을 바라면서~~~~
매 주말이면 전주에 있는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땐 눈에 들어오지 않아 옆으로 지나기만 했던
마이산, 전주역앞 비빔밥집, 전주공설운동장과
한옥촌? 몇달을 주말이면 다녔던 곳이라
지금도 대구에서 전주까지에 길은 네비없이도
두시간여면 도착합니다
2006년 초가을
아부지는 호전되는듯 하시더니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 지셨습니다
새벽에 전화를 받고 대구에서 장수,장계를 지나 전주로 갔습니다
전북대학병원 중환자실에는 벌써 거제도에서 출발한 동생이 도착해 통곡을 하고있고
야위신 아부지는 아무 말씀도 안하셨지만 흐린눈빛으로 저를 보십니다
그때 아부지에 목소리가 제 귀에만 들렸습니다
제 귀에만.........
"야야 천처히 댕기라~~!"
그렇게 가실때 까지 제 걱정이셨습니다
무슨이유이신지 한번도 군대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던 아부지.
여러 군시절 사진을 보아 해군이셨을듯 합니다
어머니도 아버지가 해군으로 근무하신것만 알고 계셨습니다
78년도에 농사짓기가 싫어 또 저를 위해서 제가 4살 되던해 대구나오셨을때
취직이력서 내려고 서문시장에 있는 한 사진관에서 찍었던 증명 사진이라고
어머니께서 말씀하던 기억이 있네요
어머니 말씀에 두분다 결국 도시생활 1년도 못하시고 고향으로 가서 다시 농사를 지으셨다네요 ^^~
오늘 낮 아래 소풍님에 글 "불효귀경"을 보고 다시한번 아부지를 생각해봅니다
창란젖갈을 그렇게도 좋아하시던 아부지
토요일밤 방영되던 전쟁영화를 즐겨보시던
아부지에 그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듯 합니다
"야야 천처히 댕기라 클 난다...."
지난 이야기
쌍마™ / / Hit : 2620 본문+댓글추천 : 0
기억
인타까움 한 없으시겠지만 그래도
쌍마님은 행운아 이십니다
내 아버지를 그리 따뜻하게 떠 올릴수 있으시다는 것 만으로도
저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잘 못느끼지만
효도해야겠다는 생각이드네요 좋은밤되세요
아버지에대한 기억이 별로없심더ㅠㅠ
한가지 기억나는건 아버지께서 호통한번 치시면
온동네가 조~~~~~~~용~~~~~~했다는~~~~!!!
그해 시월에 저의 아버지도 암으로 투병하다 돌아가셨지요.
그해 고향인 효령면 00동 마실에선,
다른집 고추밭은 탄저병으로 고추가 거의 다 죽다시피 했는데
울집 고추밭은 그렇게 잘 된 기라예. 보는 마실 사람들이 이집 고추는 어찌 이렇게 잘 됐냐고 다들 그랬거던요.
그때 미리 짐작 했어야 했는디, 당시 지가 철이 없었는지라 감도 못 잡았거든요.
그때쯤 울 아버지가 지 손을 꼭 잡고 한 말이 있었는디,
그때는 거기 무신 말이지 몰랐는데 지금에서야 그 느낌이 조금씩 옵니다.
'정말 1년만 더 살수만 있다면 진짜 멋지게 살 긴데. 어찌 이리 살았을꼬." .. ..
살면서 진정 필요한 것은 보지 못하고 불필요한 것에 얽매여 살고 있는건 아닌지,
어쨌던 상식으로 이해 할수 없는 일들이 참 많다는 짐작만 늘어갑니다.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쌍마님.
좋은,행복한 주말보내셔요~^^
찌든 삶에 때론 지칠 때,
가족들을 바라보면서 잘해주지 못해 미안할 때,
물가에서 문득 옛 생각이 날 때,
가슴 저미도록 아부지가 그리웠습니다.
힘이 들때, 감정을 억제하기 어려울 때,
아부지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때마다 아부지는 말 없는 웃음을 짓고 계십니다.
아부지 마지막 가시는 날,
"유기야! 낚시가자!"
웃으시며 절 부르시고는 홀로 떠나셨지요.
쌍마님의 글을 읽으니 더없이 아부지가 그리워지네요.
하늘에서 지켜보십니다..
아주 어릴때는 담배냄새밖에 생각이 안나구요
까까머리 중학생때부터
중풍으로 고생하시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참...오래도 앓으셨는데......
그땐 사춘기라 참 애도 많이 먹었더랬습니다
지금 제 자식놈이 제말을 안들어도
그때의 업보려니...란 생각이 가끔듭니다
아들놈 휴가 나오면 같이손잡고
아부지 산소에다 담배나 한가치 꽂아드리고 오렵니다
안 우는자식이 효자랍니다
먹고싶은것,하고싶어하시든거
다해준 그런 자식이 효자라고
어제 티비에 나오던데
그런자식이 얼마나될런지....
저도 그런자식이 되어야되는데
쉽지않네요
그곳에 가면 부모님이 계신것같아서...
"쌍마"님
건강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가족을 지킬수있습니다.
전 서울 한양대 병원에서 제대군복 벗고 그날부터 아버지 병간호 했내요
그리움만 남아 있내요 ᆢ
그리움이 곳곳에 절절합니다
아버지의 자리..
그 자리는 영원할 겁니다
이젠 그 자리에 님이 있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를...^^
미끄러운께 찬찬히 댕기시고
새해 복많이 받으시소^^
아버님의 따뜻한 사랑을 많이 받으셔서,,
쌍마님께서도 따뜻한 분이 되신것 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30여년전 쩌렁 쩌렁 하신 아부지의 고함소리가
제가 그나이 즈음 되어 아부지를 되돌아 봅니다
자식넘들 땜에 늘 소원한 아부지 어무이
오래 오래 사시이소~
쌍마님도 홀로 계신 어무이와 가족들 한테
좋은 아들 아부지로 오래도록 머무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올린 글이 상처를 건드린건 아닌지 하는...
좋은 곳에서 쌍마님과 가족분들의 건강과 화목을
빌어 주시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아버지"란 존재가 어떤이에겐 그리움으로
또 어떤이에겐 지금 당장의 애절함으로 맞이 하겠지만
마음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넓고 깊는 산처럼 우뚝했으면 좋겠습니다.
쌍마님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월척에서는
나름 주관이 뚜렸하시고 좋으신 분인걸 글..등으로 알수있읐을것 같습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