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장마의 초입을 알리는 비였다.
발정 난 숫캐처럼 온 감각의 안테나를 물을 향하고 사는
낚시꾼의 뇌리에 농사에 대한 걱정보다도,
'처마 물받이가 막혔더라' 는 아내의 잔소리보다도,
언뜻 먼저 떠오른 것은 방목수로의 물목이었다.
비만 오면 붕어들이 미쳐 날뛰는 곳,
새 물기만 하면 고기들이 환장을 하여
게걸들린 거지 떼처럼 입질해주는 곳,
그러다가도 비가 개이고 물 흐름이 그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순간에 입질이 뚝 끊겨 버리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곳,
그 보물창고 방목수로의 물목은
친구와 나만 아는 비밀의 터였다.
부리나케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그러나 친구는 전화를 받질 않았다.
'벌써 튀었구나! 제길...'
맨 날 의리를 입에 달고 살지만 그 친구의 의리 없음을 나는 안다.
술 쳐 먹을 때는 의리 내세우며 음주 별로 즐기지 않는 나 불러내어
밤새 집에도 못 들어가게 만드는 용서받지 못할 늠,
주색잡기(酒色雜技)하다 문제 생기면 의리 들먹이며 꼭 날 끌어들여
문제 해결하려 드는 개 같은 늠...
심지어는 지난번 여자 문제를 마누라한테 들켜 다급해지니까
나랑 사귀는 여자라고 불법전매(不法轉賣)까지 해버려
나를 곤경에 빠뜨리기까지 했던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늠이다.
허긴 이런 것들조차도 친구늠은 의리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낚시터에 갈 때면
그것도 이번처럼 호기(好機)를 맞은 번개낚시를 갈 때면
저와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나보다 한발 앞서 들어가 가장 좋은 자리 꿰차고 앉아 있었으며
뒤늦게 도착한 나를 향해 득의의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지금 같지 않게 차가 귀했던 그 시절,
사실 나보다 훨씬 일찍 세상살이에 나선 녀석은
나름대로 사업에 성공해서 비록 트럭이지만 차를 굴리고 있었고
나는 낡아빠진 구십시시 짜리 오토바이로 낚시터를 전전(轉轉)하곤 했었다.
낚시 갈 때를 제외하곤 언제나 죽이 잘 맞는 나를
제 차 옆자리에 태우고 나들이하는 것을
숙명처럼 알고 사는 친구녀석이었지만
낚시 갈 때만은 사람이 바뀌어 버렸다.
나를 태워 주는데 무지하게 인색했고 매정했다.
그 이유는 오직 앞장서가서 좋은 포인트를 선점해
나보다 더 큰고기를 많이 잡기 위해서였고
그 의지는 비정하리 만치 매몰차고 단호(斷乎)했다.
낚시터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큰 고기를 걸거나 손길이 좀 바빠진 듯 싶으면
이 체면 저 체면 안 가리고 거침없이 내 곁으로 파고들었고
내가 조금이라도 언짢은 기색을 보이면
'의리 없이 혼자만 붕어 많이 잡아서 처먹고
힘 생기면 어디다 쓸라고 그러냐'고 몰아 부쳤다.
그것은 나보다 훨씬 늦게
그것도 나를 통해 배운 낚시에 대한
기술적 열등감을 해소해보려는 자구책(自救策)인지도 몰랐다.
비옷까지 뒤집어쓰고
악다구 쓰는 구십시시 오토바이를 타고 도착한 낚시터에는 아니나 다를까
친구 놈이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퍼 질러져 앉아 있었다.
물 목 언저리로의 내 접근을 아예 막아버리려는 의도로
제가 가지고 있는 온갖 낚시대를 물 목 언저리에 모두 펴놓고서...
나를 바라보는 친구의 얼굴이 의기양양(意氣揚揚)했다.
"망할 늠!"
악세레이터를 입빠이 땡겨 엔진 소리를 높여주고
물 목을 지나쳐 삼십미터쯤 떨어진 수초 옆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원래부터 조행길이
그렇게 약아 빠지고 매정했던 친구는 아니었다.
정도(正道)낚시를 구사한다며
언제나 두 대의 낚시대만 펴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깎듯이 예의를 지키는
정통파 낚시를 추구하던 시절도 있었다.
헌데 어느 날 일어났던 해프닝 한번이
그의 낚시패턴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팔십 년대 초쯤 되었을까?
정확한 시기를 기억해 낼 수는 없지만
친구와 나는 무안에 있는 <유당수로>로 낚시를 간 적이 있었다.
동네 인근 터만 찾던 그 시절의 낚시로서는
제법 먼 거리 출조였던 지라
새벽 일찍 서둘러 준비를 하고 출발하여
해뜨기 전에 <유당수로>에 도착한 우리는
자신의 취향대로 적당한 포인트를 골라 낚시를 시작했었다.
늘 그렇듯 세 칸 대와 세 칸 반대,
두 대의 낚시대를 펴고
초봄의 옅은 수초대를 공략하던 친구와 나.
낚시를 시작하던 때의 모든 조건은 같았지만 결과는 너무나 판이했다.
그 날 내겐 끊임없는 입질이 이어졌고
십여 수가 넘는 월척을 포함해서 씨알 좋은
오십 여수의 붕어를 잡아 올렸지만
친구는 같은 시간에 여섯 치쯤 되는 붕어 두 마리를 잡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친구를 돌아버리게 만든 사건은
낚시를 거의 마무리 할 무렵인 점심때쯤 일어났다.
마침 그 시간 한 동네 사는 친구 두 명이 응원 차
술과 요리를 준비하여 낚시터에 도착해 있었으며
그때 내 세 칸 반대에 입질이 왔다.
실컷 손맛을 본 후라 대수롭지 않게 챔 질을 하였는데
낮은 수심을 두들기는 강한 저항이 있었고
'쌍태(雙胎)다!'
하는 외침이 친구들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삼십 중반쯤 되는 월척 두 마리가
동시에 걸려드는 진기한 광경이 연출된 것이다.
이것을 바라보는 친구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오전 내내 씨알 좋은 붕어를 끌어내는 나를 보며
물어주지 않는 붕어를 얼마나 원망했을 것인가!
이때 친구의 열기에 휘발유를 뿌리는 한마디가
동네 친구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얌마 이리 와서 술이나 마셔라!
낚시도 못 헌 놈이
뭣 뽄다고 먼디까지 와서 쭈그리고 앉아있냐.
어뜬 늠은 월척을 쌍으로 잡아내는디..."
벌떡 일어서서 붕어 두 마리 담긴 살림망을
수로 한가운데까지 팽개쳐버린 친구는
"씨-팔 내가 또 낚시를 허믄 성을 갈아 분다!"
이 한마디를 남기고 그 길로 짐을 싸 짊어지고 낚시터를 떠나가 버렸다.
그 날 이후,
친구는 낚시를 그만 두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성을 갈지도 않았지만
그의 낚시는 변해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부산해야할 친구의 움직임이 그냥 그대로 멎어있었다.
비가 내리고 새 물기만 흘러들면
낚시 대 두 대도 감당 못 할 만큼 물어대던 붕어들이
웬일로 입을 꼭 닫아 버린 것이다.
허긴 고기 속을 누가 알까!
친구의 줄담배가 이어지고 푸념하는 소리가 빗줄기를 뚫고서
내 귀에까지 까지 들려 왔다.
입질이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한 일이다. 별 일이다.'를 뇌까리며 얼마를 지났을까?
총독부(總督府) 말뚝처럼 꼼짝 않던 찌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두 마디쯤 올렸을까?
그리고 나서 슬쩍 잠기더니 그대로 멈춰버리는 것이었다.
"제길 미끼를 다 따먹어 버렸나 보다."
미끼를 갈아 끼워주기 위해 대를 걷어드리는 순간
대를 타고 전해지는 갑작스런 무게 감과 저항에 화들짝 놀라 대를 세웠다.
그리고 끌려나오는 것은
놀랍게도 십 여 년 전에 <유당수로>를 떠올리게 하는
두 마리의 쌍 월척이었다.
친구를 힐끗 바라보았다.
내 대 끝에 매달린 두 마리의 월척붕어를 바라보는
친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대물붕어 한 마리 잡아 약을 바싹 올려주려 했던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애써 친구의 눈길을 외면하며 끌려나온 붕어를
슬그머니 물 속으로 돌려 보냈다.
'첨-벙'
이때 갑작스런 물 튀김 소리가 들려 놀라 바라보았을 때,
친구는 커다란 돌멩이를 집어 물 속으로 집어던지고는 소리치고 있었다.
"씨-팔 내가 또 낚시를 허믄 성을 갈아 분다."
벌써 스무 여 해 전의 이야기다.
지금은 그 방목수로가 골재채취(骨材採取)와 오염으로
낚시터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버렸다.
그래도 이렇듯 장맛비가 시작되면 그곳이 떠오르는 것은
나이 들어 지난 추억을 그리워함도 있지만
풍성했던 낚시터의 낭만이
망가져 가는 현실의 낚시와 대비(對比)되어
더 소중하게 여겨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성질 급한 내 친구도
이렇게 비나리는 저녁이면
어느 소주방 한구석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옛 방목수로를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날 혈기 왕성하고 잘생겼던 그의 얼굴에
이미 오호(五號)줄보다도 굵은 주름이 생기고
꼬라지 섞인 그의 큰 목소리가 기름기 빠져 거칠어 졌어도
아직은 더 할 수 있는 낚시이야기가 있어 우리는 행복한지도 모른다.
늙어가도록 낚시터에만 가면 나를 몰아 부치고
자신을 최고 낚시꾼의 반열에 올려놓기 위해
나 없는 곳에서 친구들에게 내 낚시를 폄하하고
맨 날 폼만 잡는 낚시라고 비아냥거려도
나는 내 친구도 낚시만큼이나 사랑한다.
내가 고향을 떠나있던 십 여 년 동안
내 부모님 생신 기억했다가 한번도 거르지 않고 인사 여쭙고
가끔 내 아버님 모시고 목욕탕에 가 목욕시켜 드린 일 하며
지난해 내 아버님 돌아 가셨을 때
술 취한 모습으로 나보다 더 슬피 울 던
내 친구의 따뜻한 마음을 내 다 알기 때문에...
지난 낚시 이야기 중에서
어유당 올림
쌍월척(雙越尺)...그리고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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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16
운전대만 잡으면 변해버리는사람
술만 먹으면 변하는사람
이해가 안되는 사람이 많더군요....
님의 조행기를읽고 그냥 지나가기엔 웬지 아쉬움이남아 꼬릿글을 답니다
제게도 그런친구가 한명있었는대 요즘은 낚시를 끊었다더군요
친구란게 정말친한친구는 동기간보다도 더 정이가더군요
그런 친구가 제게는 두명있습니다
세상 살면서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한답니다
님께서도 그러한 친구분이 있어 인생을 보다 애정어린 눈으로
돌아보는것 같군요...
잘 보고 갑니다...
3년 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을때 정신을 놓은 나를 대신해서 아버지를 거두어 드렸던 친구 들..,
막걸리 한잔을 먹어도 부담이 없는 친구들..,
나이 50이 다된 지금 제가 세상에 진정으로 "친구" 라고 떳떳하게 말 할수있는게 자랑스럽습니다.
"어유당" 님 의 마음속 도 그런 친구 란 것을 글을 읽으며 느껴봅니다.
그런 친구와 인생 늘 행복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한편의 소설보다 더 재미있고 감명깊은...
또한 추억을 회상케 하는 .............................
항상 건강하시고 즐낚하시길....
구성도 탄탄하고 보통 수준이 아니십니다
곰살맞은 친구분과 오랜시간 동출 하시길 바라며
좋은글 자주 뵐수있기를 앙망합니다.
건강하시구요~~~~~~~~~
가슴에 와 닿는 좋은 글입니다..
朋...성공한 삶을 살아 오셨군요...내내 무탈 하시길 바라며,,
환절기라 조석으로 일교차가 심합니다..
건강 유의 하시길 바랍니다...(_._)
건강 하시길 빌겠습니다.
친구분과 우정 변함 없으시길...
하지만 지금은 그럴경쟁하며 밀고 당기는 친구를 자주 볼수 없음을 한탄하며..
만나면 다투고 하더라도 자주 만날수만이라도 있었음 하는 바램으로 댓글 남겨 봅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허물없이 속내를 이야기함에 거리낌이 없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부럽습니다.
한편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님의 짧은 글에서 많은 것을 공감하고
많은 것을 생각하고 갑니다.
구수하고 감칠맛이 느껴지는 글
잘 읽었네요.
항상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여러분들 말마따나...
글이 많이 이쁩니다
잘보고 갑니다 꾸벅
음악 한곡 남깁니다
올해도 월을 마니마니 만나시기를.......
처음엔 웃다가 마직막엔 가슴찡한내용이
눈가에 이슬이 맺히게하네요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그동안잊고살앗던 추억과 나자신을되돌아볼수있게하여주심
다시감사드립니다.
내내무탈하시고 정겨운친구분과도 더많은추억 만드십시요.
최고로 잼있게 봤습니다. 좋은 글 다시한번 감사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