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향어(香魚)를 맨 처음 만난 건
고향을 떠나 서울살이 하던 시절 파로호(破虜湖) 출조 에서였다.
붕어 낚시 중에 걸려 나온 이놈의 첫 인상은
그리 산뜻하지만은 않았던 걸로 기억된다.
당찬 손맛까지는 괜찮았는데,
거무튀튀한 몸뚱이에 듬성듬성 돋아 있는 비늘,
거기에다 내가 ‘잉어입네’ 하고 입가에 난 수염은
뭔가 좀 징그럽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 후 주말이면 낚시회 버스를 타고 찾아갔던 충주호(忠州湖).
여덟 치를 전후한 붕어가 5미터가 넘는 깊은 수심에서
두자가 넘는 찌를 끝도 없이 밀어 올리며 꾼들을 열광케 하고
긴대, 긴찌 시대를 열어
우리나라 낚시계의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그 충주호 전성시대,
가끔씩 손님고기로 올라오는 향어를 만나 얼굴을 익힌 적이 있었다.
독일 잉어와 이스라엘 토종잉어의 교잡종이라고 알려져
이스라엘 잉어라고도 불렸던 이 물고기는
향어(香魚)라는 제법 고운 이름으로 국내에 안착했지만
살에서 풍기는 흙냄새 비슷한 체취를 향이라고 표현한 발상도 재미있고
투박한 생김새와 아둔한 행동도 좀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드는 녀석이다.
‘신토불이라(身土不二)는 말이 맞다’ 면 이 물고기의 국적 특성상
제법 영리하고 검소 할 것이라 사료되지만
미안하게도 이놈은 물 돼지라는 별명에 걸맞게
탐식성과 게걸스러움이 물고기 중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왕성한 것도 사실이다.
내 친구 중에서 향어낚시에 가장 능했던 꾼 하나는
향어의 탐식성과 미련함을 비웃으며
‘세상에서 가장 욕심 많은 고기’라고 말하곤 했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낚시로 잡아 살림망에 넣어둔 향어에게
짜개(펠릿)를 주어 봤더니 그 와중에서도 그걸 받아먹더라.’고,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은 적이 있다.
블루길, 배스로 대표되는 실패한 수입 어종들,
생태계를 파괴하고 전통 낚시인들에게 질시의 대상이 되어버린 이들에 비해
향어는 그 나름대로 성공한 수입 어종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개인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수질오염의 근원이라는 비판을 받아 가두리가 철수되는
시행착오(試行錯誤)를 겪기도 했으나
‘그것은 고기 자체에서 발생하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고
사료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이차적인 문제가 아니었던가?’ 생각되며
향어에게서 제공받던 회와 매운탕은 그 맛이 그럴 듯해서
어려운 시기 우리의 음식문화의 다양화에 일조(一助) 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내가 서울생활을 털어 버리고 귀향했던 80년대 후반 쯤 부터
이곳에서는 나주호(羅州湖)를 중심으로 향어낚시가 피크를 이루던 시기였다.
향어도, 그를 쫒는 꾼들도, 지금은 흔적조차도 찾아 볼 수 없지만,
그때는 가두리 언저리인 ‘막창’, ‘녹야리’, ‘중장터’. 나 ‘대초리’ 권으로 대표되는
주요 포인트들이 있어 매일 꾼들이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있었으며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자리다툼도 꽤 심했던 걸로 기억된다.
한국동란을 전후한 어려운 시기에 태어난 나와 내 친구들은
자라나는 과정에서 언제나 부족했던 먹(을)거리에 대한 후유증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부분 뱃고래가 큰 대식가들이다.
밥 먹었냐? 많이 먹어라! 가 최상의 인사였고,
‘금강산(金剛山)도 식후경(食後景)’을 생활방식으로 삼고 살았던 우리들은
다이어트 열풍시대인 지금에 와서도 중국음식을 먹어도 곱빼기로 먹고
어느 식당엘 가나 공기 밥 몇 개 정도는 추가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더구나 물 맑던 시절,
영산강(榮山江)가에 살면서 회와 매운탕이라는 문화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졌으며
가물치회를 필두로 웅어회, 붕어회, 등 민물 회에 맛 들여진 입맛은
지금도 회라면 눈을 부릅뜨고 달려들어 그것을 안주 삼아
두주불사(斗酒不辭)하는 행태를 보이곤 한다.
오죽하면 가끔씩 찾아가는 완도의 한 횟집주인은
활어회 6키로그램을 네 명이서 간단히 해치우는 우리를 보고
‘회낄라’들 이라는 별명을 붙여 줬을까!
그 시절 향어는 우리 친구들에게는 최상의 낚시 대상어이자 먹거리였다.
우직하게 잡아끄는 손맛과 더불어
회로 먹는 살이나, 남은 뼈로 끓이는 매운탕은 순식간에 소주 몇 병쯤은
쉽게 비우게 하는 별미였던 것이다.
낚시꾼인 나와 친구 한명이 늦은 오후에 나주호로 출발하면
친구 몇 명이서 밤늦게 됫병 막 소주 몇 개와
초고추장에 깻잎, 마늘, 고추, 같은 푸성귀를 준비해서 뒤쫓아 온다.
그리고 우리가 잡아놓은 향어로 요리를 해 낚시터에서 술판이 벌어지는 것이다.
요즘 같은 세태의 붕어낚시라면 시비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으나
다행이 향어는 소음에 그다지 영향 받지 않고 물어주었고
주위의 꾼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불러 모아 한잔씩 어우르는
낚시터 파티가 벌어지곤 했었다.
나주호의 많은 포인트 중에서도 막창은 내가 즐겨 찾는 포인트였다.
포인트에 가기까지 십 여리에 걸쳐 험한 고개 길을 세 개나 넘고,
낚시 짐 짊어지고 걸어서 긴 고개를 하나 더 넘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었으나
가두리를 앞에 두고 있고, 떼 고기 조황이 가능하다, 는 등의 장점이 있어
힘든 진입을 상쇄(相殺)하고도 남는 이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차가 흔치 않은 시절이라 오토바이 출조가 많았고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늦여름 어느 날이었다고 기억된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고
무슨 이유에서 이었는지 한동안 낚시를 못했던 나는
낚시 가방을 오토바이에 싣고 막창을 향해 출발했다.
누가 지어낸 이름인지 모르지만
막창은 높은 바위절벽 밑에 있는 두 개의 골로 이루어진 막다른 포인트였다.
앞으로는 가두리가 자리하고 있었고
절벽 아래로 난 길을 따라 100여 미터쯤 포인트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절벽 아랫길 끝부분에는 너럭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그 언저리는 언제나 조황이 보장되는 일급 포인트로
항상 꾼들의 자리다툼이 심한 곳이어서
시즌 중에는 여간해서 그 자리에 앉아보기는 힘든 곳 이었다.
평일 오후였고, 내리는 비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놀랍게도 막창의 노른자위 너럭바위 포인트는 비어 있었다.
몇몇 꾼들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초입 골에 집중적으로 앉아 있었고
항상 만원이던 둘째 골은 한명의 낚시꾼만 자리하고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다.
그날 그곳을 찾았던 사람들은 막창 사정에 어두웠거나
향어낚시 초보꾼들임이 분명 했다.
낚시꾼이 원하던 포인트가 비어 있을 때 느끼는 희열 또한 대단한 것 아니던가!
정말 웬 떡이냐? 였다. 이미 조과는 보장 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부지런히 대를 폈다. 한 칸 반대 두 대에, 두 칸 대 하나.
노란색깔의 용성 그라스 로드 대였다.
그 시절 나주호의 향어낚시는 칸 반 대 위주의 짧은 대가 대세였다.
미끼는 짜개라고 불리던 노란 기저귀 고무 잘라 끼워놓은
펠릿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원줄은 5호, 목줄은 4합사 이상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바늘도 이두13호 이상을 쓰는 무식할 정도로 튼튼한 채비 였다
향어의 씨알이 잔챙이부터 60 센티 급까지 다양했고
가끔씩 물고 늘어지는 대형잉어에게 낚싯대를 뺏기는 일도 허다했기 때문에
채비는 강해야 한다는 생각이 주류를 이루었다.
예상대로 입질이 오기 시작 했다.
첫 투척 후 십 여 분이 지나면서 부터였다.
본래 향어라는 놈은 덩치에 비해 흡입력이 약해
찌톱의 반 마디나 한 마디 쯤을 올리는 아주 소극적인 찌 올림을 보인다.
아가미의 세판수가 조밀해서라는데 그래도 활성도가 좋은날이면
일단 집어가 된 후에는 미끼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받아먹는
엘리웁 덩크(?) 현상이 일어나곤 한다.
미끼 투척 후 찌를 보지도 않고
하나, 둘, 셋 하고 대를 채 올리면 고기가 달려 올 정도로,
그날의 입질이 바로 그것이었다.
가금씩 오락가락 하는 빗줄기 속에서 굳은살이 잡혀 버린 손바닥이
다시 화끈거릴 정도의 손맛이 오래 도록 이어지고 있었다.
잦은 입질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던 향어낚시,
잠시 입질이 주춤하던 어느 순간
나는 문득 너무 조용해져버린 주위의 고요를 깨달았다.
시계를 보니 밤 열시를 조금 넘어선 시각,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낚시하던 꾼은 철수 해버린 지 오래였지만
초저녁까지 만 해도 첫 번째 골에는 제법 여럿이 앉아있었고
그리고 항시 꾼들로 붐비던 막창이었기에,
몇 사람쯤은 낚시하고 있으리란 생각을 의심하지 않았는데
너무 조용한 사위에 부쩍 의심이 들어,
하던 낚시를 멈추고 부지런히 첫째 골로 넘어가 본 나는 질겁하고 말았다.
찌불도, 사람도, 하나 없이 어둠만 사려있는 공간,
그래도 누군가가 있으리라는 믿음이 주었던 든든함은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문득 아연해 지면서 다급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누가 코 베가도 모를 어둠과
휴대폰이 없던 시절 전혀 소통이 불가능한 인적 없는 외떨어짐,
거기다 결정적으로 겁 많은 나.
이건 낚시가 문제가 아니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했던가!
낚시에 열중해 있을 때는 들리지도 않던 절벽을 휘돌아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갑자기 귀곡성(鬼哭聲)으로 들리기 시작했고
절벽 위쪽에서 가끔씩 떨어지는 나무 열매나 돌 부스러기에서는
누군가의 의도적 행동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절벽아래서 낮에 보았던 손가락크기의 지네도
옛날이야기와 섞이어 무섬증으로 다가온다.
잔 빗줄기는 여전히 뿌리고 있었고 칠흑 같은 어둠속 이었다.
불이 나게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비에 젖어 축축한 장비들은 대충 거둬 낚시가방에 집어넣고...
헌데 웬걸,
잡아 놓은 향어가 문제였다.
얼마나 많이 잡았는지 망을 들어 올릴 수가 없다.
대충 쏟아 버리고 그 와중에도 씨알 좋은 놈으로만 골라 방수망에 넣고
낚시터를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방은 등에 메고 한손에는 의자와 랜턴을,
다른 손에는 향어담은 방수망을 들고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머피의 법칙’이 여기서도 적용되는 걸까?
그날따라 랜턴도 약이 다했는지 붉은색 섞인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무섬증과 함께 오르는 비탈길,
온 몸은 이미 비와 땀이 섞여 범벅이 되어있었고,
몇 마리나 담겼는지 오른손에 든 방수망은 그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기를 쓰고 산등성이를 중간쯤 올라왔을 때 긴장감 때문인지
그 와중에도 소변이 마려웠다.
잠깐 아픈 팔도 쉴 겸 방수망과 의자만 내려놓고 가방은 짊어진 채
두려움에 그 희미한 랜턴으로 비춰가며 소변을 보는데
자세히 보니 하필이면 오줌을 누는 곳이 오래된 무덤이 아닌가!
허~걱,
쭈삣서는 머리와 얼큰해지는 이마부분의 감각,
뒤통수부터 꼬리뼈까지 오그라드는 느낌,
소스라쳐 오줌줄기가 뚝 끊어지며 바지를 대충 단속하고
화들짝 다시 다급한 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하나 넘고 났을 때는 무서움과 긴장감으로 거의 탈진해 있었고
방수망에 담긴 향어의 무게로 팔은 감각이 얼얼했다.
더 이상 고기를 들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물가에 이르렀을 때 죽을힘을 다해 가지고 온 향어를 쏟았다.
정말이지 내가 그 무거운 향어를 낑낑대며 가지고 올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마누라는 물고기만 보면 비린내 난다고 손사래를 쳤고
매운탕도 친구들과 함께 일 때가 맛있었을 뿐 혼자서 먹어 본 기억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집 뒤란에 대형 고무통을 하나 놓고 거기에다 잡아온 물고기를
기포기(氣泡器)와 함께 넣어두면
동네 사람들이 구경도 하고 더러는 가져다 먹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나는 왜 그 무거운 걸 가지고 오느라 몸살을 했을까?
쓸데없는 욕심이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헛 욕심이 공포에다 무거움으로 인한 괴로움까지 더해 주었다.
몸이 가벼워지니 무섬증도 좀 덜 하는 듯 했다.
덜 했을 뿐이지 아주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도 오토바이까지 갈려면
무덤 많은 어둔 산길을 몇 백 여 미터는 족히 가야하고
오토바이에 타고 나서도 험한 산길 몇 키로 미터를 더 가야했다.
마지막 언덕을 오르기 시작 했다.
그 미끄럽고 험한 길을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왔다는 게 용했다.
오토바이에 도착해서 짐을 싣고 키를 넣고 돌렸을 때 걸리던 시동음이
그렇게 반가운 적은 없었다.
전조등 불빛은 공포를 누르는 진통제였다.
앞을 밝혀주는 빛의 확산은,
거머쥐는 듯 한 등 쪽의 공포까지 다 털어내지는 못했지만
앞쪽의 무서움만이라도 덜어 주는 안도의 표시였다.
극한의 공포는 사람을 용감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는지
제법 발달한 운동신경이 있으면서도
유독 속도에 대해 공포증을 가지고 있었던 나지만
그날 나는 미끄럽고 험한 언덕길을 마치 오프로드의 오토레이서처럼 질주하고 있었다.
몸서리 쳐지는 공포를 뒤에 달고 달리면서 나는 자책하고 있었다.
누가 누구를 비웃을 수 있는가?
과연 내가 향어를 욕심 많고 미련한 고기라고 비웃을 수가 있는가?
향어는 살기위해 먹이를 탐했지만,
작은 즐거움을 위해 끝없이 향어를 탐한, 그러다 죽을 욕을 본 나는 무엇인가?
아, 미물(微物) 향어 잡으려다가 영장(靈長) 사람을 잡을 뻔 했구나!
거무튀튀하고,
비늘은 엉성하게 돋고,
우스꽝스런 카이젤 수염을 가진 향어.
욕심 많고 미련한 물고기.
그러나
‘사람은 손을 오므려 무엇인가를 모아야 될 때가 있고
쥐었던 손을 펴서 버려야 할 때가 있음을,
그리고 욕심 많던 나에게 버려야 할 것이 어떤 것인지를
오지게 무서운 경험으로 가르쳐 준 향어,
나이 들어 자꾸 쓸쓸해져 가는 이 가을에는
이젠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나주호의 옛 향어가 그리워진다!
친구들과 섞이어 어우러지던 그 향어낚시도...
경인년 10월 마지막날, 옛 낚시 이야기 하나를
어유당(魚有堂)올림.
향어낚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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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완결된 문장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감사합니다.
그당시는 고무줄달린팰렛이 시중에 판매하기전이라 모나미볼펜을 앞뒤다빼고 몸통에 팰렛을넣고 껍대기에 기저귀고무줄을 가위로 잘라서 한20여개를 끼우고 펠렛하나하나 밀어내며 고부줄끼우면서 내일의 향어와전투를 설레이는 마음으로기다리던 추억에 젖는군요.
늘 즐낚하시고 건강하시기를.....
요즘 회집에서나 맛을보려니 영 아닙니다
지금은 욕심을 부려 잡으려해도 잡히질않고...
옛날의 고행담이 지금에 와서 좋은글이 되신걸 축하?드림니다
추억이 아련합니다만,,, 노지에서는 우째 한바리도 못잡은듯...
정말 먹성하나는 좋았다는 거 아닙니까,,,
잘 일고 갑니다...
향어회 먹으러 가려했는데 아직입니다.
어유당님!
오랜만에 뵙네요. 끈끈한 글솜씨에 반해서 다음편이
올라오길 간절히 바라는 독자입니다.ㅎㅎ
좋은 추억 잘 읽고 갑니다^ ^
추억이 깃든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자주 뵈면 좋겠습니다~~~꾸우벅!!!!
초창기 가두리양식장에 수달이들어와서는 가두리의 그물을 끊어놓았을때에는
정말이지 정신없이 향어를 그냥 건저 올린다는 표현이 맞을정도로 잡아냈던 기억이나는군요,
님의 추억이 담긴글 읽고 잠시 옜추억을 더듬어 봤습니다,
환절기에 건강하시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시기를 빕니다.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십시요
항상 건강하세요
추억을 회상하며..글 한마디 한마디 읽으면서..많은 생각이 교차하네요..
다음에 또 올려 주십시요..^^
저또한 예전 잉어와 향어낚시에 푹빠졌던 기억이...
좋은 글 참~~ 잘 읽었습니다..
잘읽고 갑니다..
뒤통수부터 꼬리뼈까지 오그라드는 느낌, "
재밌게읽었씁니다.. ^ ^
재미 있고 스릴있게 잘보았습니다.
다음에도 아련한 추억이 있는 낚시체험기 기대해 봅니다.
새록새록 옛생각도 나고 예전에는 많이 흔했던 향어인데 요즘은 잘 뵈지 않는군요..
문장하나하나 가슴에 새겨놓았습니다.
내나이도 언 60을향해 달려가고있으니 그르나 꿈을향해 달려가야지
수필집 내셔도 돼겠어요
제 목 : 향어와 나
지은이 : 어유당
출판사 : 월척
ㅎㅎㅎ
월척에 몇년동안 다니면서 조행기에 댓글 달아보는것도 처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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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글 올려주세요..
조사님 마음에 담긴 아련한 추억들이 너무 감동적 입니다.
낚시의 즐거움과 극한의 공포 속에서 느끼신 깨달음....
조사님 인격에 베여져 많은 분들께 감동을 주십니다.
더욱 더 건강하게 낚시 즐기시고 행복하시길....
("월척"이 이런 님들 만날 수 있어서 넘 좋내요^^)
그 욕심 과하면 언젠가 화근이 되어 되어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한편의 드라마와 소설같은 님의 조행기속에 뜻깊은 교훈이 있음에 감사 드립니다.
추억의 조행기 잘 보고 갑니다.^^
향어...
벌써 이십년이 훌쩍 지나버렸네요..
머릿속에 흐릿하게 있던 그때의 기억을 새삼 느끼게한 조행기였습니다..
이번주에는 고모부님의 산소에나 다녀와야겠습니다...
나의 낚시 스승이자, 고모부이자, 낚시친구였던 그 분...
조행기 정말 잘 보고 갑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스물 초,중반에 자주 가던 곳인데..
글로써 접하지만 반가움에 글 남깁니다
20년도 훨씬 전 대학 시절에 친구들끼리 돈을 모아 만원짜리 향어회를 시키면 정말 엄청 많이 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정확히 무슨 맛인지도 잘 모르면서 그저 친구들과 소주 마시는 맛에 허겁지겁 먹던 그 향어회가 문득 떠오르는군요.
아~ 그리운 옛날이여! ㅎㅎ
제가 어유당님의 입장이 되어있으니 머리결이 쭈뼛거립니다.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한줄한줄 주옥같은 어귀의 매력에 푹 빠져 끝까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순간이나마 옛추억에 젖을수 있게 해 주심을...
전 장성댐 향어에 몇년동안 미쳐본 적이 있습니다.
혼자 거제도 바람의언덕 넘어 산길로해서 풀밭을 건너 아래
무너진갯바위에서 낚시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깜짝 놀란 저의 모습이 생각나는군요...
키큰풀숲을 건너는중 친구의 전화가 어찌그리 반가웠던지...
땀뻘뻘 흘리며 왜이리 고생하며 낚시를 해야만하는지 생각 해 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것들이 오늘날 민물낚시로 바꾸며 가까운 유료터에 다니게 되었지 않았나...싶습니다.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십니다...잘 보고 갑니다...꾸벅
안동댐에서 50센티 향어손맛 잊을 수가 없네요.
글솜씨는 소설가 수준이십니다.
감사 합니다.
흑백필름이 돌아가는듯 싶습니다.
추억에 글 잘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세요.
전 광주사람이라 향어 잡으로 다도댐, 장성댐으로 많이 갔었는데...
심지어는 진도 소포수로 까지...ㅎㅎ 다 옛날 일지만,
요즘 가끔 낚시다니면서 그때 생각을 하곤 하는데...
간만에 추억의향기를 느끼는 글이었습니다.
낚시가 아니라 ..향어와의 전투...
언제나 건강하시고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쥐었던 손을 펴서 버려야 할 때가 있음을,
그리고 욕심 많던 나에게 버려야 할 것이 어떤 것인지를
오지게 무서운 경험으로 가르쳐 준 향어,
.
.
귀중하고 소중한 가르침 .느끼고 배우고 갑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빌겠습니다
향어 낚시 그립습니다..
아주 긴장하며 읽었습니다~~~소설책 읽는것처럼~~~
향어낚시 찾다가
꼭 내가 당한것 같은 느낌의 이야길 읽고가네요!
ㅎㅎㅎ
언제든지 안출하세요!!!
생생하고 아름다움에 취해서 흔적 남기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