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 많이 보았던 목화꽃을 요즈음 매우 보기가 어렵습니다
열매가 익기전에 목화밭에서 달콤한 열매를 따먹고 변비에 고생했던
어릴때 추억도 떠올려 봅니다
꽃말은 순결 포근함 이랍니다
목화꽃 이야기
고려 말 공민왕때 삼우당 문익점 선생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그가 중국의 남쪽 지방을 여행하게 되었을때었다.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는 넓은 들판이 온통 흰색으로 덮여있는것을 보았다.겨울도 아니고 따뜻한 남쪽 지방이니 그것이 눈 일리 없었다.
삼우당은 이 흰 들판이야말로 그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무명을 만드는 재료인 목화 원산지라는것을 알아차렸다.안내자는 덧붙이기를 하얀 솜뭉치를 거두어 씨를 빼면 실을 만들수 있는데 그것으로 부드러운 옷감을 짠다고 했다.이제 곧 추수절이라고 했다.
삼우당은 흥분된 마음을 누를수가 없었다.탐스럽게 피어있는 목화 솜뭉치들이 그의 심장박동을 빠르게 뛰게 하고 있었다.
당시 원나라에서는 목화 씨앗의 수출을 금할뿐더러 밀반출 역시 엄격하게 단속하고 있었다.그러나 문익점은 어떻게 하든지 간에 고려로 목화씨앗을 가져가고 싶었다.
결국 어렵사리 목화 씨앗을 구했고 이제 조국 고려로 잘 숨겨 무사히 가져가는 일만 남았다.고려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꾸리던 중 붓을 챙길때였다.
"바로 이거다!"
삼우당은 이곳 지인들로부터 선물로 받은 붓을 버리고 붓대속에 목화씨 대여섯개를 몰래 감추었다.그렇게 하여 몇달이 걸려 고려로 돌아온 삼우당은 긴 여행의 피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산청 지리산 아래에 있는 처가로 갔다.그곳에는 장인 정천익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장인을 찾아간 삼우당은 붓뚜껑 속의 목화씨를 조심스레 꺼냈다.때는 봄이라 목화를 심기에 아주 좋은 날씨였다.목화는 기후가 온난한 지역에서 재배되는 작물이었고 한번도 재배의 경험이 없었기때문에 씨앗을 뿌려놓고도 매우 조심스러웠다.그렇게 심은 대여섯개의 씨앗중 첫해에는 겨우 한그루만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어떻게 가져온 목화씨인가.삼우당은 장인과 함께 밤낮으로 목화 재배에 힘을 쏟았다.그 정성에 감복한것인지 이듬해는 목화들이 제법 싹이 돋았고 노란 꽃이 피었다.어떤 것은 흰색 또는 약간의 붉은 색을 띠는것도 있었다.
문익점과 장천익은 해마다 경작면적을 늘려 나갔고,우리 풍토에 맞는 재배 기술들을 개선해나갔다.이렇게 붓대속의 목화씨앗은 해를 거듭하면서 점점 이웃마을로 퍼져나갔다.그리고 오래지 않아 남부 지방 곳곳에서 목화를 재배하게 되었다.
또 다른 숙제는 목화솜으로부터 어떻게 실을 뽑아내는가였다.문익점의 조카 '문래'는 실을 잣는 기계인 물레를 만들었다.지금의 물레라는 말은 문래의 이름에서 따온 말이다.
그렇게 목화가 들어온후 우리 나라에서도 의생활의 혁명이 일어났다.
**목화의 씨를 금화자(錦花子)라 하는데 그 기름을 짜서 썼고
그것을 흑유(黑油)라고 불렀다.페인트의 원료나 등유 등으로도 흔히 쓰였다.
뿌리는 흑피포(黑皮포)라 하여 염색의 원료 및 약으로 사용했다.
특히 악창의 치료제로 쓰이기도 했다.
목화꽃은 대개 아침에 황백색의 꽃이 피었다가 오후가 되면 자주색이
돌면서 시든다.그리고 다음날이면 떨어져 버리는 하루살이꽃이다.
출처-의(衣)생활의 혁명/오병훈님
목화꽃의 태동
꽃망울이 맺힌 모습
만개전 모습
목화꽃의 만개
목화꽃이 흰색만 있는줄 알았는데 아침과 저녁에 색상이 바뀌는 것이 신기 했습니다
꽃이 지고난후 결실
얼마 지나면 목화열매 껍질은 단단해지고 익으면 터져서 하얀 목화가 생성되겠죠?
목화꽃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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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