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 00
유비와 무너미를 지난다.
뒷짐을 지고 초승달을 끌고 가던 유비가 갑자기 멈춰 선다.
- 저기, 놈일세.
유비의 시선이 오솔길 옆 부들밭을 향한다. 부들이 갈라지고 있다.
- 모세의 기적이군요.
- 잠시만 기다려보게.
놈이 만든 부들밭의 3:7 가르마가 옅어지고 있다.
순간, 울컹! 부들밭이 멀미하고, 거대한 물체가 철썩! 수면을 때리고 사라진다.
- 봤는가?
- 잠수함의 뿔인 듯, 상어의 지느러미인 듯합니다.
- 멋지지 않은가?
- 소름이 돋는군요. 경외감이 듭니다.
- 잡고 싶은가?
- 아니요. 지키고 싶어졌습니다.
- 동감일세. 자연은...
- 스스로 그러하다, 입니다.
- 멋지시네!
- 저, 피럽니다.
- 됐고, 가세.
으이씨! 더 할 수 있는데...
장비와 관우가 왔다.
유비를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가 판이하다.
장비는 주절투덜 딴지를 하고, 관우는 예의를 다하면서도 진중함을 잃지 않는다.
하회탈처럼 웃고 있는 유비의 작은 체구가 태산처럼 크다.
물론, 공명 피러는 절로 우러나오는 후광으로 새벽을 밝히는 소임을 다한다.
장비가 리모콘을 누르자 1톤 탑차가 갈매기처럼 날개를 벌린다.
프론트 쪽의 벽면에 낚시장비가 가득하고, 리어 쪽엔 책들이 빼곡하다.
- 어떻수?
장비가 어린애처럼 칭찬을 기대한다.
- 무슨 낚싯대가 장대만 있습니까?
- 아, 그 뭐... 그 정도는 써 줘야...
- 무슨 책들이 죄다 무협집니까?
- 아, 그 뭐... 전생의 회상이랄까...
으쓱하던 장비가, 지랄한다, 는 관우의 한마디에 자라목을 한다.
유비는 여전히 하회탈의 표정으로 잔을 비우고 있다.
- 우리는, 하와이에 갈 거요.
벽에 걸린 사진을 보며 장비가 말한다.
- 우리는, 이런 요트를 만들 거요.
관우가 진중하게 말한다.
- 우리는, 떠날 거네. 떠나서, 돌아오지 않을 거네.
유비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세 남자의 시선이 사진 속 하얀 돛대에 매달려있다.
- 저 햇살 아래서 쌔카맣게 탄 얼굴로, 큰형님은 키를 잡고 관우 형은 돛을 펼치고, 나는 백마를 타고...
관우가 족발로 장비의 입을 막아버린다.
- 나느, 가와이에 가거요.
장비가 입안 가득 족발을 다짐하듯 씹는다.
- 나는, 시를 쓸 거야.
뒷동산 아카시아 그늘에서 열일곱 살 소녀가 종알댄다.
아직 소녀가 쓴 시가 없었기에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오직 저 꾀꼬리, 저 지저귀는 입술에 뽀뽀하고 말겠다는 집념뿐이다.
헤어질 때, 소녀는 소년의 볼에 뽀뽀를 한다.
아카시아 향기가 추억의 길목이 된 날이다.
/ 그녀를 이야기하고 싶다.
시인과 소설가를 꿈꾸었고, 칼럼니스트에서 인터뷰어로,
지금은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있는,
피터를 멘토라고 불러주는 유일한 여자. /
- 나는, 소설가가 될 거야.
입영 전날, 아카시아 그늘이 깊은 교정에서 스무 살 S가 꿈을 꾼다.
아직 그녀가 쓴 소설이 없었지만, 나는 말한다.
- 책을 읽어. 선데이서울에서 톨스토이까지. 뭐든지 다.
- 뭐든 다?
- 그래. 가리지 말고. 선이든 악이든, 숭고든 퇴폐든 다 니 속에 넣어.
- 그다음엔?
- 그다음은, 제대하고 말하자.
입영 전야, 미지의 생활에 대한 두려움을 상쇄하는 S와의 깊은 키스...
S는 군바리에게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다.
군바리도 S에게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제대 말년, S에게 습작노트를 보낸다.
- 이 글들, 전부 니가 쓴 거야?
제대 후, 시월 어느 날, 우울한 얼굴로 S가 내게 묻는다.
- 그래.
- 이해할 수가 없어.
- 뭐가?
- 너는 경영학이야.
- 그런데?
- 쓰기에 대한 공부도 안 했어.
- 니네 과에서 배우는 거?
- 그래. 아니, 그거 말고라도.
- 그래서?
- 동아리 선배들이 너 좀 보제.
- 됐고, 책은 좀 읽었니?
- 그래. 허기진 듯이 닥치는 대로. 과식했나 봐, 구역질이 나.
- 봐라.
- 응?
친구보다 책이 좋았어. 아니, 책이 친구였지.
내 피는, 내가 물려받은 유전자는 꽤 섬세한 것 같아. 질릴 정도로.
나는 글을 천천히 읽어. 달팽이의 속도로.
나는 작가가 선택한 단어의 적절함을 의심해.
나는 그가 만든 문장의 맥을 짚고, 그가 뿌린 복선을 염탐해.
나는 언제나, 그가 만든 문장을 비틀어보곤 해.
설의, 도치, 대구, 반어, 문답, 직유, 은유, 대유, 제유, 환유, 활유, 의인, 중의...
내 수사법(修辭法)의 실험은 아직도 미완성이야. 내 필체가 매일 달라지는 것처럼.
여기까지는 표현의 기교에 대해 말한 거야. 문장미학.
스토리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지?
그래, 중요하긴 하지. 하지만 말이야, 그건 한참 뒤의 일이야.
무슨 말이냐면, 스토리는 각자 지평의 거울이거든.
선험적이든 후험적이든 또는 초월적이든, 스토리는 각자 지평의 놀이터야.
일천한 지식과 사물에 대한 기계적 해석, 빈곤한 상상력만으론 깊고 넓은 스토리를 완성할 수 없지.
책을 엄청 읽었댔지? 머리에서 가슴에서 멀미가 난댔지?
나도 그래. 그건 아마도 우리의 좌표가 아직 설정되지 않아서일 거야. 우리 지평의 표류 말이야.
나는 기다리기로 했어.
의심하고 대체하고 충돌하고 해체하고 짚어보고 염탐하고...
존재의 모든 측면을 끌어안고 이해하고 사랑하다 보면 언젠가는 정말 언젠가는,
내 머리와 가슴에 담았던 모든 것들의 정화가 거대한 댐의 둑이 터지듯 터져 나와
내 손가락에 쥐가 나도록 일필휘지할 순간을.
그때까지는 예습일 뿐, 습작일 뿐이야.
나는 가짜가 되지 않을 거야. 사기는 치지 않겠다는 말이야.
씨바, 존나 말이 많았다...
S의 손등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고개를 숙인 S의 목에 소름이 돋는다.
험! 헛기침을 해봐도 침묵의 순간이 가렵다.
- 너...
- 응?
- 너 참 무섭다?
S가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든다.
- 너, 잔인하도록 무서워.
- 뭐가?
- 방금 니가 한 말, 니 표정과 말투. 내가 아는 니가 아니야.
- 오바했나 봐, 내가.
- 넌 늘 도치법으로 말을 해.
- 그랬냐, 내가?
마주 본다.
S의 젖은 눈에서 많은 것들을 읽는다.
S가 집요하게 내 눈길을 잡는다.
- 나도 넓고 깊은 소설을 쓸 수 있을까?
- 각자의 스토리는 그 자체로 위대해. 다만, 독백으로서만.
- 독백으로서만?
- 그래. 보석이 되려면, 다시 말해 문학이 되려면 세공을 해야 해.
어떤 스토리든 문학을 담보하려면 문장의 형식을 빌려야 하고,
그 문장은 절대 조악해선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야.
단어의 선택은 적확한가, 비문인가 악문인가, 맞춤법은 맞는가, 리듬을 타는가, 강약을 조절했는가...
담백한가 화려한가는 글의 목적에 따른 거니까 별개로 하고.
- 너는 꿈이 뭐야?
S가 소녀의 문법으로 묻는다.
- 언젠가는, 가슴을 찔러 감동의 피를 솟구치게 하는 글 한 편.
- 너도 소설가를 꿈꾸니?
- 전혀. 나는 제도권 밖에서 놀 거야. 조롱하고 풍자할 거야.
- 누구를, 무엇을?
- 쓰레기 같은 글을 배설하는, 제도권의 숱한 가짜들과 그들의 구역질 나는 행태.
진주 근교의 소류지에 가을이 팔랑팔랑 떨어진다.
석양이 서쪽 하늘과 S의 볼을 빨갛게 물들인다.
- 너 때문에 기가 죽었지만, 그래도 나는 소설가가 될 거야.
- 그래, 니 팬이 되었으면 좋겠다.
- 나는 아마도, 글을 쓸 때면 언제나 너를 의식하게 될 것 같아.
석양이 가고 밤이 왔다.
텐트 주위를 가을이 서성대고 있다.
산울림에게 노래를 부탁하고, 술을 마신다.
조그만액자에에화병을그리이고해바라기를담아놨구나검붉은탁자의은은한비잋은언제까아지나남아있게엤지...
속삭이듯 노래하며 서로의 눈을 본다.
시선이 얽혀버린다.
시곗소릴멈추고커텐을내려요화병속에에밤을넣어새장엔봄날을 ...
- 우리는 뭘까? 우리 관계 말이야.
- 어... 사랑과 우정 사이.
그런슬프은눈으로나아를보지말아요가버어린날드을이지만잊혀지진않을거예에요...
취한다.
꾸벅, 조는 S에게 칫솔을 물려주고 밖으로 나온다.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자책이 우수수, 나뭇잎처럼 떨어진다.
- 추워. 같이 자자.
촛불을 끄자, 침낭 속에서 S가 병아리처럼 말한다.
- 알몸으로 들어와.
어둠 속에서 S가 뱀처럼 속삭인다.
뒤에서 안는다. S가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옹알이를 한다.
S의 부드러운 엉덩이 사이에서 내 욕망이 발기하고 있다.
민망하고 창피해서 숨을 멈춘다.
- 바보!
- 응?
- 넌 똑똑한 바보야.
- 인정해.
- 알아들었어?
- 내가 준 노트에 있어.
- 알 듯해. 니가 직접 말해 봐.
- 예습하지 않아도 쾌락과 욕망에 익숙하고, 그러면서 역설적이게도 절대선을 갈망하지.
S가 뒷 문장을 잇는다.
- 나는 나의 이런 모순과 역설에 절망해... 맞지?
- 그래.
- 넌 욕망에 충실하면 수치스러워?
- 어...
S의 손이 발기한 내 욕망을 희롱한다.
- 봐. 니 욕망은 벌써 젖었는데 넌 왜 안간힘을 써?
S가 내 손을 잡고 자기의 가슴에 얹는다.
- 느낌을 말해봐.
- 말랑해. 한없이 부드러워.
- 꼭지를 만져봐. 어때?
- 딱딱해.
- 나도 발기했다는 증거야. 나는 내 욕망이 부끄럽지 않아.
S가 내 손을 잡고 아래쪽을 향한다.
- 수풀을 헤치고 동굴 입구를 찾아봐. 어때?
- 촉촉하게 젖었어. 엉덩이까지.
- 원한다는 증거야. 나는 내 욕망에 충실하거든.
자궁처럼 아늑했던 침낭 속이 뜨거운 불가마로 변한다.
고개를 돌린 S와 깊은 키스를 한다. 혀와 혀가 뱀처럼 감긴다.
- 숨이 막혀. 자궁에서 꺼내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서야 침낭에서 나온다.
텐트를 열자 기웃대던 바람과 달빛이 구르듯 들어온다.
- 달빛이 환하네. 눈을 감고 누워봐.
S의 목소리가 부탁과 명령의 중간쯤이다.
S의 성적 판타지에 몸을 맡기며 언뜻,
예습하지 않아도 쾌락과 욕망에 익숙하고
그러면서 역설적이게도 절대선을 갈망해요
나는 나의 이런 모순과 역설에 절망해요
씨바, 이 순간에도...
/ 혹시라도 기다리신 분들께 미안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월척 한 마리를 낚아보고자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비바람 부는 소류지에서 잠깐 5편을 써 봅니다.
담배 심부름도 할 수 있습니다.
연애편지도 대필할 수 있습니다.
윤뺀의 '사랑 2'도 불러 드릴 수 있습니다.
붕어 얼굴 좀 보게 해 주세요. 흑! ㅠ.ㅜ /
독고다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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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6
수족관 낚시의 대가이신 피러님께서..
자게방 언저리를 맴도는 그 마음이 오죽 하시겠습니까?
한번 뱉으신 그 말씀이 차마 발목을 잡으시겠지만
우짭니꺼...운맹인것을..
하지만 가늘게 떨며 내민 손을 매정하게 뿌리칠 수 없는 바
조회수 5천회와 추천 100개를 받으시면
제 개인적으로 "월척"으로 인정 하겠음을 약속 드리며
오늘 추천 한방을 과감하게 희사 하오니
앞으로의 글빨에 영광 있어라!!
오랫만에 들어왔는데 처음 열어본 글이 피터님의 아름다운 글이라 기분이 좋습니다.
피터님 글을 읽고, 내 글과 문장들이 피터님 눈에 어떻게 비쳐졌을지 챙피한 생각이 드네요.
좋은 글 읽었으니 글값은 드리고 가야 될것 같네요.
비가와야 될낀데요
피러성님 날잡아요 낚수나 가시게요^^
빛강이 성님도 보고싶고 피러성님형수님도 보고싶은데
피러성님은 별로 ㅋㅋ
월척은 제가먼저 잡을게유~~~~
붕어향님이 말하던 결말이 아닌데,,,,
유언비어 였었나?
잘보고 가지만 할말은 해야겠기에 ======
다~~~~~~~~~~~~~~~~~~~~~
~~~~~~~~~~~~~~~~~~~~~~~~
꽝 드세요.
^^;
절망속에 놓지않은 끈이 보였고 자기많의 작은세상속에서 큰 성을 쌓고 있는 .....
역시 피터님 진심으로 대단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