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이 멍해졌다.
이곳을 지나 위로 올라가는 차량은 오직 아주머니댁을 방문하는
차량 뿐이었고, 꼭두새벽 아주머니를 방문할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멍하니 선체 차 후미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예상처럼 그차는 아주머니 집앞에 멈춰섯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탓에 차에서 누가 내리는지는 볼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왔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자리에 앉았지만 눈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많은 생각들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헤집고 다닐 뿐이었다.
모두가 미국으로 돌아간줄 알았던 그녀가 차까지 가지고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의 출현으로 과거로 묻히고 끝나야할 모든 일들이
다시 현재 진행형이 되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 그녀를 기다리던 강영한과 그녀의 만남은 어떤 상황을
만들어 내게 될지,
강노인과 김노인의 그녀와의 재회는 어떤 상황을 연출하게 될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와 나의 재회는 어떤 상황으로 전개될지.....
모든 것이 뿌연 안개에 쌓인듯 가름해 볼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내 심장은 심하게 뛰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누구보다도 더 그녀와의 재회를 간절히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중년에 삶에 찾아온 일탈,
나는 그 달콤한 마력에 이미 중독되어 버린 것이었다.
모든 것이 익숙해져버린, 변화나 변수가 존재하지 않는 궤도화된 삶속에서
우연히 찾아온 일탈은 너무 큰 자극과 설레임으로 다가 왔다.
그녀를 통해 아직도 내가 남자라는 사실과 아직도 내 안에 꿈틀거리는 젊음의 욕정이
남아 있음을 발견했다.
그녀는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중성화 되어버렸던
나에게 아직 숫컷의 야성이 살아 있음을 깨닫게 했다.
머릿속에 그녀와 실현 가능해 보이는 모든 영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함께 웃고, 떠들고, 즐기고....
내 앞에서 행복해하고 황홀해하는 그녀의 모습들이....
나는 행복감에 젖어 새로운 사랑을 꿈꾸고 있었다.
이런 생각들로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멀리서 차 리모컨키를 조착하는 음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차의 헤드라이트가 켜지고 있었다.
온지 삼십분도 채되지 않았는데, 벌써 떠나려 하는 것이었다.
차가 움직이는걸 보며 미루나무 아래로 걸어 나갔다.
길 가에 서서 그차가 다가오는걸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차는 멈출거 같지 않은 속도로 다가 왔다.
손을 들어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속도를 줄인 차가 나를 조금 지나쳐서 섯다.
차 운전석 쪽으로 걸어가자 운전석 윈도우가 아래로 10센티 정도
내려가더니 멈췄다.
차안을 보기도 전부터 그녀의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그녀였다.
혹시나 그녀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사라지자 얼굴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윈도우의 열려진 틈으로 조금 어두운 차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싸늘했다.
그녀의 표정은 냉냉했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싸늘했다.
내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굳어지며 심한 모멸감이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지난번일로 추근거리거나 얽히려 하지 말라는 경고
같이 느껴졌다.
나는 낯선이에게 꼬리를 흔들며 다가가다 발에 채인 강아지 같았다.
그런 내자신이 너무 수치스럽고 모멸감이 느껴져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될지 생각이 떠오를질 않았다.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왜 차를 세웠는지 말할 수도 없었고,
머뭇거리며 뒤돌아 서기엔 더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아무말 없이 내게 싸늘한 시선으로 왜 차를 세웠는지
묻는 것처럼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짧은 순간 이었지만 그 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때 지난밤 그가 내게 주었던 편지가 떠올랐다.
나는 당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게 차를 세운 이유가 생긴 것이다.
쪽지를 꺼내 그녀에게 아무말 없이 내밀었다.
그녀는 고개를 앞으로 돌리며 피식 실망스럽다는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당신 이정도 밖에 않돼는 사람이었어?’ 하고 말하는거 같았다.
그녀는 그 편지가 내가 쓴 편지라고 오해하고 있는거 같았다.
나도 그런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났다.
“누가 꼭 전해 달랍니다.” 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윈도우를 더 내리거나 편지를 받기 위해 손을 뻣지 않았다.
나는 열려진 윈도우 사이로 딱지처럼 접어진 편지를 집어 넣고는
등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자리에 돌아오자 그녀의 차가 막 제방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쪽지도 펴보지 않은채 그렇게 그곳을 떠난 것이었다.
심한 모멸감이 밀려왔다.
한심한 내 자신과 망상들이 나를 너무 수치스럽게 했다.
가슴속에는 내 자신에 대한 분이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둬야 했던 것을....
이제 아름다운 추억은 사라지고 모멸감과 수치심만 남았다.
아름답게 추억될 그녀의 모습이 싸늘하게 변한 지금의 모습으로
황홀했던 지난밤의 추억이 오늘의 모멸감으로 변해 기억될 것이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을 혐오스러운 만남으로 애써 오늘 일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 애쓰게 될 것이다.
이곳 또한 영원히 다시는 오지 않을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처음 내 자신에 대한 비웃음과 힐란으로 시작된 생각들이
점점 그녀에게로 옮겨지며 그녀에 대해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오늘 태도는 내가 그날 밤 혼자서 강압적으로 그런 일들을
만들어 낸것 같은 태도였다.
‘과연 그랬었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분명 그녀 또한 나를 자연스럽게 받아드렸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렇게 모멸감을 주는 그녀에 대한 분노가 일었다.
한참 내 안에 이는 열을 식히며 그렇게 앉아 있다보니
주위가 완전히 밝아져 있었다.
마음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언제 입질이 있었는지 부들 경계에 던져두었던 2.8칸대가 부슬속으로
깊이 박혀 있었다.
낚시대를 잡고 쭉 땡겨보니 제대로 걸린듯 했다.
목줄이 끊어지라고 뒤로 몇 번 챘지만 목줄이 끊어지질 않았다.
아직도 분이 다 삭지 않았는지 나도 모르게 성질껏 확 잡아 챘다.
낚시대 삼번대가 뚝 부러져 버렸다.
“에이 쓰~벌....”
나두 모르게 욕이 튀어나오며 낚시대를 땅에 내동댕이 쳤다.
밀려오는 짜증에 의자에 털석 주저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길게 담배연기를 내품었다.
내 자신이 한심하고 처량하게만 느껴졌다.
담배 필터까지 타들어갈 때 까지 아무 생각도 없이 그렇게 멍하니
저수지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담배를 잡은 손가락에 뜨거움이 느껴졌다.
놀라 담배꽁초를 땅에 떨어뜨리고 혹시 데었나 손가락을 보고 있을때
다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의 차가 둑방을 넘어 올라오고 있었다.
일부러 고개를 돌려 반대편 산자락으로 시선을 옮겼다.
조금 있으니 차가 멈추는 소리와 차문여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히 위로 올라갈거라 생각했던 차가 멈추고 그녀가 내리는 것이
이상했지만 고개를 돌린체 그대로 있었다.
그녀가 내게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다.
가까이 다가온 기척이 느껴질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고, 눈빛은 두려움이 가득한 듯 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가 왔었나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편지 언제 받으신 거예요?”
“어제 밤에요.”
아직 좀전의 감정이 남아있는 탓에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제 밤이요?”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밤에 펼쳐 놓았던 보조의자에 털석 주저 앉았다.
처음 만날때부터 나를 자극시키던 그녀의 향기가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 향기는 나를 저항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내 심장은 이유없이 뛰기 시작했고, 그녀에 대해 들끓던 분노는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안쓰러워 보였다.
“걱정 마세요. 삼일동안 당신을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데
어제밤 이편지를 제게 주고 이곳을 떠났어요.
혹시라도 만나게 돼면 꼭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나는 따뜻한 어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잠시 생각을 정리 하는듯 그녀는 말이 없었다.
눈을 내리깔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환한 곳에서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도도하면서도 세련되고 지적으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가 잠시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상념에 잠긴 사이 나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며 한 장의 사진처럼 각인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때 제방 아래쪽에서 희미하게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김노인이 온 것이다.
김노인은 아마 이곳으로 들어오는 차를 보고 궁금증이 일어
올라온 것일거다.
김노인과 그녀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만나게 돼는 장면이 그려졌다.
어젯밤 그리 그녀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짓던 김노인이
이제라도 그녀를 만나 그 그리움의 한을 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김노인의 스쿠터는 제방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엔진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제방 길옆 산속을 바라보았다.
잡목이 우거져 아무것도 찾을수 없었다.
저 숲속 어디가에 김노인은 몸을 감춘 채 그가 그리도 그리워 하던
그의 딸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렇게 오열을 토해내며 그 투박한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을 것이다.
왜 그리도 그리운 사람을 당당히 만나 그 한을 해소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죄인처럼 저리 도둑처럼 숨어 딸의 모습을 훔쳐보는 것일까?
이유는 알수 없었지만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는 그이 마음은 얼마나 타들어 갈까?
하는 생각이 들자 그가 너무 안쓰러웠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서 그녀 뒤쪽으로 돌아갔다.
“의자가 불편한거 같으니 이쪽에 앉으세요.”
하며 괜챤다는 듯한 표정을 짖는 그녀를 밀다시피 낚시의자에 앉게 하고
내가 보조의자에 앉았다.
김노인은 이제 딸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나에게 그의 편지를 내밀었다.
“저에게 이 편지를 전하지 못했다고 해주세요.
아니, 저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고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내민 편지를 받아들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따뜻했다.
나에 대한 신뢰와 고마움이 묻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아무 말없이 천천히 주변 경관을 둘러보았다.
나고 자란 곳이기에 얼마나 그리웠을까?
그녀의 회상에 잠긴 표정에는 그림움과 회한과 미소가 함께
번져 있었다.
나는 그녀의 상념들을 방해하지 않으려 아무말 없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고 있었다.
“다 그대로구나....‘
한참을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잠시후 그녀가 회상에서 깨어난듯 정신을 차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그럼 가볼게요.”
“예, 아주 가시는 건가요.”
따라 일어서며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누군가 올지 안올지 모르는 사람을 기약없이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피 말리는 일인가를 알기에....
그녀는 대답없이 고개만 가로저었다.
마음속에 안도감이 들었다.
그녀가 당분간 미국으로 돌아갈 일은 없는 거 같았다.
“명함 하나만 주시겠어요.”
그녀가 갑자기 생각난 듯 내게 명함을 달라고 말했다.
순간 그녀가 왜 내게 전화번호를 달라고 하는지 머릿속이 복잡해 졌다.
나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내 이런 복잡한 머릿속을 읽은 듯이 그녀가 말을 꺼냈다.
“토요일 오후에 늘 오시죠. 혹시 오빠가 기다리고 있을까봐....”
그녀는 혹시 그가 기다리고 있을까봐 내게 전화를 해보고 이곳에
올 생각인거 같았다.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 실망감이 일기도 했지만 그렇게 그녀와 나의
연결고리가 만들어 진 것에 대해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내게 목례를 하고 나를 지나쳐 갔다.
내게서 몇 걸음 멀어지던 그녀가 뒤돌아 서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일일까 싶어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녀는 무슨 말인가 해야할 말을 망설이고 있었다.
“왜요?”
계속 망설이는 그녀를 재촉했다.
몇 번 말을 꺼내려다 못꺼내던 그녀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때 일은....”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얼굴이 붉어졌다.
싸늘하던 그녀의 표정에서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이미 느끼고 있는 터였기에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제가 술이 과했던가 봅니다. 제 실수였다고 생각해 주세요.”
그녀는 마음이 놓였는지 말대신 환한 미소로 응대해 주었다.
처음으로 보게된 그녀의 미소띈 얼굴에 눈이 부셨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가 차로 돌아간 후에도 그 모습은 한동안 머릿속에 가득차 있었다.
눈부신 햇살이 비추는 소류지 수면 가득 그녀의 얼굴이 비춰지고 있었다.
그때 문자메세지를 알리는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낯선번호의 문자 하나가 와 있었다.
“정말 따뜻한 분인신거 같아요. 여러모로 고맙습니다.”
그녀가 보낸 문자 메시지였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내게 남긴 것이다.
가슴속에 환희가 밀려들었다.
p.s 이러다 한소리 들을거 같아요. 추억의 조행기 글들 좀 올려주세요.
제글만 도배되는 느낌이 들어서....
저수지의 그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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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39
오랬많에 추억의 조행기에 글을 다 읽어 왔네요..
처음으로 댓글이,,1빠 입니다..
너무 기다리지 않게 해주세요,,,ㅎㅎㅎ
진짜 즐거운 글 입니다.
왠지 모르게 완전히 빠집니다.
어부인의 쓴소리가 ,,날까 걱정인데요,,ㅎㅎ
어떤 사연이 있을까
다음편도 기대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신춘문예 한번 응모해보시죠? 기성작가 못지 않으십니다
기다린다는 것만큼 행복한 생각은 없을겁니다.
아름다움이여......영원히....
기쁨이 넘쳐나네요.
감사합니다..ㅎㅎㅎ
느낌,,몰입,,,긴장감,,,,
감사하게 잘보고 있읍니다
다음편에 어떤사연인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김노인은 어쪄죠
다음편 기대됩니다
추천 꾹...
내용이 진짜 실감 납니다..ㅋㅋㅋㅋㅋ
긍금함이~~~만땅입니당
그녀좀 맨날 등장시켜주세요 ㅋㅋㅋㅋ
조행기 보다도 더 잼있어요.
조행기는 걱정하시지 마시고
계속해서 쭈~~~~~~~~~~~~~~욱 연결 해주세요....
핑크빛 러브스토리가 펼쳐지는건가!
아 이러면 불륜인데
매회차 말미마다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붕어우리님
소설책 몇권내신 진짜 작가님 아니신가요?
붕어우리3님은 더궁금하구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