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은 언제나 양분된 저울을 가져야 한다. 일방적으로
흐르는 것은 늘 독소를 내 뿜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극좌와 극우 모두를 경멸한다.
그건 상대에 대한 최소의 배려심조차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니, 안하무인의 인간은 처음부터 제외 하고라도 말이다.
(밸런스)
낚시는 결국 꾼들에게 균형을 가르쳐 준다.
찌 하나를 띄우기 위해서 물의 표면장력을 이겨내는 자중이 필요하듯 물의 성질을 재고 봉돌을 가감하면서 결국
대상어가 바늘 흡입시 수면 위로 상승하는 그 폭마저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힘의 균형에 의해 꾼들은 시각적
포만감과 함께 붕어의 얼굴을 만난다.
(배려)
낚시꾼도 사람이다. 삶이 있고 각자의 터전이 있고 가족이 있다. 질서와 예의는 배려에서 시작된다.
나와 다른 상대, 안면조차 없는 사람이지만 같은 취미를
가졌으므로 자연스러운 동질감을 느낀다.
(욕심)
욕심은 늘 화를 부른다. 조과에 대한 과도한 욕심은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준다.
열정은 타인에게 탄복을 불러오지만 지나친 욕심은
타인의 손가락질을 불러온다.
어느 누구에게도 저수지의 자리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설령 선점한 사람의 몫이라 해도
그 몫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을 자격은
우리 모두에게 없고 그것이 자연지의 덕목이자 규율이다.
(희노애락)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운 일이 어디 삶 뿐일까!
그 피안의 세계 속 몰입을 통해
삶의 고충, 아픔, 그리고 원망마저 지운다.
낚시는 그래서 철저히 아웃사이더적인 취미이다.
(여백)
비우지 않으면 채울 수 없다고 했다.
세상의 소란스러움에서 벗어나고 뇌리에 가득찬 상념을
내려 놓는 순간은 수면 위에 세워둔 찌를 바라볼 때이다.
마음 속 득달같은 잡념은 흔적없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공백이 된다.
그 여백의 도화지에 채워 넣는 것은 급박하게 도는 세상에 대한 관조와 여유이다.
(성찰)
꼬여 있는 매듭을 푸는 실마리는 결국 하나씩 풀어야 한다.
설령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번민에 휩싸일지라도
천천히 자신과 주변을 되돌아 보게 되는 ,
낚시는 치유의 능력이 있다.
특히 마음을 다친 이들에겐,
설령 그것이 세상으로부터 도피라할지라도 말이다.
(견제)
낚시터에서 만난 다른 이들을 경계하라는 뜻이 아니다.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 저울의 수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와 다른 반대편 조사를 인정하고 낚시에 방해되는
불편한 요소들은 나와 타인 모두에게 유발하지 않는
견제이다.
저수지의 룰을 깨뜨리는 사람들
누구나 우리는 욕해 본 기억이 있다.
더불어 함께 공유하는 취미
낚시는 그런 것이 아닐까!
세상에 절대적인 것이라곤 없다.
그리고 세상이 생각보다 근사하고 깨끗하며 살맛나고
정의로운 것 역시 아니라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돈을 따라 권력을 따라 유사 이래 인간은 철저히 이기적인 본성과 욕망에 의해 과거도 현재도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은 미래에도 결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에서
다만 우리가 개개의 나 자신을 허용하고 어울려 살아가며
조금은 좋은 사람, 아름다운 사람, 나 이외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견제와 균형을 통해 상호 신뢰하며 믿을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을 꿈꾸어 본다.
그것이 인류가 앞으로 나아갈 세계일거라고,
변화는 진통이 따르고 반발이 따르고 희생이 따른다.
그래도 분명 달라져야 한다.
견제와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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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하기가 어렵네요.ㅜㅜ
꾼들의낙원님 글 참 좋습니다.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쥬
좋은글 보고 갑니다
그나저나 언제 우리에게
꿈같은 세상 낙원이 올런지 ^^
하나 더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