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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쩍새 따라 우는 사연

오랜 세월 전에 광탄면 용미리로 이전되었지만 1960년대 후반까지도 한수 이남에 있었던 천주교 묘원(墓園)을 가려면, 한남동 나루터의 쪽배로 건너서 논밭과 포도원을 번갈아 끼고 곧게 난 햇살 쏟아지는 비포장 길을 타박타박 걷거나, 동작동 국립묘지 앞을 지나면 곧 종점에 이르는 시내버스에서 내려, 억새풀 사이사이로 코스모스 한들거리는 머나먼 길을, 나지막한 구릉을 향해 걷다보면 그곳에 이르렀습니다, 가을비 추적이던 어느 날 이래 돌아오시지 않는 아버지를 못 잊어 애태우던 아들이, 진정 그립고 서러웠노라고 그곳에서 애틋한 사연을 새록새록 전해드리고, 이제는 아무리 기다려 봐도 오실 수가 없다는 기막힌 사실을 또 받아들여야만 하는 안타까움에 그 앞에서 너부러져 후련하게 울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의 아버지, 어머니들께 제가 엎드려 간절히 빌겠습니다. 어린 자식(子息) 두고서는 그렇게 서둘러 가지 마시라고요. 그것이 진정 꿈이었기를 바라는 어린 마음은 슬픔을 견디어내기가 너무나 벅차답니다. 잔 기척에도 귀를 세워보고, 열릴 리 없는 문을 하염없이 지켜보는 젖은 눈망울이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아이가... 죽음이 숙명(宿命)임을 깨우치기 전에는 떠나지 마십시오. 묘소(墓所) 앞에 앉아 빨개진 눈으로 서편의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보게 되면, 이번은 노을 때문에 서글픈 감정이 또 북받쳐서 한 번 더 울었던 그곳이, 제대할 무렵에는 황무지로 변해서 예비군 훈련장이 되어 있더니, 이제는 몇 십 년이 지나서 변한 정도가 아니라 송두리째 흔적조차 없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즈음의 십년은 강산이 변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렇게 깡그리 없어져버리기도 하는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빠르게 달라지는 세상이라서, 형제들이 모여 사는 강남에 이르면, 그곳의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80년 무렵에 서울을 떠난 저는 물론이고, 수송동 토박이 아내마저도 남산이 보여야만 방향이라도 가늠하는 ‘촌뜨기’가 되어 웃습니다. 아침이면 길 하나 사이로 관사(官舍)에 잇닿아 있던 학교를 졸졸 따라가, 교단 위에서 훈시(訓示)하시는 아버지 뒤편에 그림자처럼 뒷짐 지고 서서 뭇 선생님들과 학생들을 잔잔하게 웃게 했던 저를 아버지는 크게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안아서 내려놓으면 큰일이나 난 것처럼 부리나케 다시 기어 올라가 아버지 등 뒤에서 고개를 내밀어 기웃거렸다던 꼬마는 소사(小使)아저씨의 난감한 골칫거리였을 겁니다. 당시의 기억은 수 십 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생전의 마지막 모습이 정지된 채 그리움으로 깊숙하게 새겨져서 마치 어제의 일처럼 매 순간순간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출장에서 돌아오실 때면 시발택시 얻어 타는 재미로 그 먼 길을 걸어 역에 가서, 연착을 밥 먹듯 하던 기차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가, 기적소리 울릴 때마다 마음 설레던 어린 시절, 줄지어 개찰구를 빠져나오는 승객들 틈에서 아버지를 찾아보는 흥분과 이어져 오는 기쁨. 매달려 어리광을 부릴 생각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언제나 근엄하셨다고 기억되지만, 관대하시고 정도 많으셔서, 저녁이면 팔지 못한 장작을 진 나무꾼이나 떡장수 아주머니가 수시로 드나들어, 덕분에 떡도 많이 먹었고 감나무 밑에는 항상 장작이 수북했었습니다. 오동나무에 정확히 박힐 정도로 잘 만든 활과 화살을 보시자더니 대번에 꺾어버리시고 걱정스런 눈빛이시던 아버지가 놀랍고 서운해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기도 했었습니다. ‘얘야, 이리 가져 온, 정말 잘 만들었구나!’ ‘꿩도 잡겠다.’ 칭찬을 기대하며 우쭐해서 가져다 드렸었거든요.^^ 60년 즈음에는 장난감을 손수 만들기도 했었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정도껏 아셨겠지만, 전쟁 후 도처에 흔했던 탄피를 주워서 권총까지 만들었던 제가 좀 심하긴 했었습니다. 하염없는 세월은 흘러, 아버지가 그리웠던 저도 한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 아들이 아파트의 구조상 숨어서 무엇을 만들 수는 없었겠지만 딸처럼 순하게 자라더니, 강원도의 혹독한 눈보라도 의연하게 이겨내고, 오늘 공복(公僕)으로 첫 출근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들과의 무언(無言)의 약속을 지킨 셈이 되었습니다. 산중 낚시터의 밤하늘은 유난히 맑아서 별들의 깜박거림도 그 찬란함에 눈이 부십니다. 눈을 감으면, 그곳에 아버지와 단발머리 앳된 시절로 돌아간 큰 누님이 함께 떠오릅니다. 까마득한 세월을 거슬러서, 자전거 뒷좌석의 수줍은 다섯 살배기 누님과 옆에 서 계신 밀짚모자 쓰신 아버지의 모습이, 예전에 그러셨던 것처럼 아마 낚시를 가실 것 같습니다. 이제 소쩍새가 구슬피 울면, 그 소쩍새 때문이라고 하고서 저도 따라 울어보겠습니다. ‘부친’ 난(欄)...빈칸...그 공백이 너무나 크고 허전해보여서도 아들은 서러웠습니다. 아버지를 기억하는데, 몽매에도 잊지 않았는데도 그 칸을... 채울 수가 없어서요.

선배님에 가슴으로 쓰신글 잘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저도 아버지에 아들 아들넘에 아버지로써 목이 메이는 글입니다 ...
철없는붕어 선배님 소쩍새가 구슬피게 우는
조용한곳에 하루밤 다녀오세요 아들과 함께요
철없는 붕어님 반가버요.

아련한 아버지의 동경이 그려집니다. 전 아직 두분다 살아계십니다. 행복이죠

소쩍새 구슬픈 산속에 앉아 있어면 더욱더 옛날 생각이 떠오르죠.

자식놈은 자꾸 커 갑니다.

이제 자기길 가겠죠. 그무렵 허망하지는 않을런지요

건강하세요
실향민이신 부모님은 다 돌아가시고
혹여 고향이라도 가실세라 북쪽의 강화도가 바라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계십니다...

제가 태어난곳은 중구 충무로.
가끔 남산에 오르면 예전 팔각정 짓는 목수아저씨들의 연장소리가 들리는듯 아련합니다.
수송동. 시발택시 .그리고 전차. 서울역 염촌교 다리밑의 시커먼 석탄열차.
국군의날엔 한강변에서 펼처지던 에어쑈 유년시절 생각에 잠깁니다

철없는붕어님 감사합니다^______^*
철없는 붕어님

오랜만에 글로 대하니 더없이 반갑습니다

저는 재작년 어머님 작년에 아버님께서 영원히 저의 곁을 떠났셨습니다

이런저런 추억이 많이 생각 나고 살아 계실때의 불효에 가슴이 미어지지만

애써 감상에 젖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건 제가 부모님께 기쁨을 준건 얼마 없고 항상 염려와 걱정만 끼쳐드린

불효자이기에 더욱더 합니다


철없는 붕어님!

항상 건강하시고 행운과 행복이 가득 하시길 빕니다
돌아가신 아버님 기일이 이때쯤이신가봐요 선배님 그리움이 사무치신것 같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아직 건강하십니다 오늘 어머님께서 백내장 수술을 하시고 오셨습니다

눈에 안대만 쓰셨는데 거참 확~ 늙어보이시더군요 이번 연휴엔 어머님 머리를 감겨드려야 하겠습니다

주말엔 비가온다네요 다행이다 ㅎㅎㅎ 에구 역시 난 효자는 못되나봐요 가슴한구석엔 아쉬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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