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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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로 연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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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오늘 낮에 잉어를 걸어 파이팅 하던 모습을 억지로 생각하였다. 그건 금방 머릿속에서 휘발유처럼 증발되어버렸다. 컴퓨터의 메일 창을 내렸다. 서재에서 거실로 나오니 식구모두가 TV에 몰입하고 있었다. “늦은 시간에 왜 단체로 안자고 있지?” 딸아이가 말을 받았다. “내일 모두 출동하지 않아요. 아빠 뭐 좀 드려요?” “응. 녹차 있으며 좀 줄래?” 딸아이가 냉장고에서 시원한 녹차를 꺼내 주었다. 식탁을 잡고 선채로 녹차 한 모금을 마셨다. 소파에 앉아 TV에 몰입해 있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사실을 아내에게 이야기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부부생활에 상처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두 아이의 엄마, 그리고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걸어온 나의 아내. 아이를 중심으로 부부가 밖에서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 원밖에 또 다른 원이 있다면 아내이기 이전에 여자는 이해를 할 수 있을까? 현실과 지난 추억이 다시 현실로 다가오는 이 시점에 명확한 판단을 못해 몸부림치는 내 자신이 갑자기 한 마리의 부나방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부나방이면 좋을 것 같았다. 오늘 잠자리에 들어도 잠을 이루지는 못할 것 같았다. 다시 서재로 들어갔다. 주변 여건과 장래진로를 고민하다가 결국 휴학을 했다. 군 입대를 결정했다. 입대전날 그녀와 같이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1차를 하고 2차로 자리를 옮겼다. 술에 곯아떨어진 친구들은 중간에 소리 소문 없이 퇴장을 했다. 그녀는 나와 같이 남은 친구들과 2차로 옮기면서, 빨간색 지갑을 내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데이트를 하면서도 동석한 사람들 몰래 지갑을 건네주곤 했다. 처음에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나중에는 얼굴이 두꺼워졌다. 데이트를 하다가 그녀가 지갑을 주지 않으면, 먼저 농담 삼아 말을 꺼내곤 했다. “뭐 잊은 게 없어?” 오히려 그녀가 당황해 하면서 지갑을 건네주었다. 그녀에게 막무가내로 큰소리를 쳤다. “윤 혜림! 너의 인생을 내가 멋지게 책임진다. 평생 먹여 살리는데 지금 부지런히 보험을 넣어야 한다. 이제 만기도 몇 년 남지 않았어.” 내 이야기가 황당해도 그녀는 항상 웃음을 보여 주었다. 혜림은 주위를 살피더니 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지갑에 돈 좀 꺼내주세요.” “왜?” “친구 분들 많이 취하신 것 같아요. 약 좀 준비해 올게요.” 그녀가 자리를 잠시 이석하자 짓궂은 친구들의 농담이 이어졌다. 앞에 앉은 녀석이 손가락을 들고는 “야 장정! 인감도장을 찍었어?” 모두가 나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집중되는 걸 느끼면서 빙그레 웃었다. “뭐야? 찍었다는 거야? 못 찍었다는 거야. 대답을 해라.” “그게 그렇게 궁금해? 못 찍었다. 시원해?” “저런 바보 자식을 보았나. 요즘 임자 있어도 낚아채는 세상에 저리 순진하긴........” 다른 녀석이 또 거들었다. “요즘 어느 여자가 독수공방 하노? 일등병 안 달아서 고무신 거꾸로 신고........졸병들 탈영하는 제일 큰 원인이 애인의 변심이다. 너도 미리 단도리 잘하고 가라.” 그녀가 약봉지를 들고 입장하자 화제는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개인별로 알약과 드링크 병을 나눠 주는 그녀에게 친구가 말을 걸었다. “혜림씨! 저 친구가 군에 입대하기 전에 부동산 좋은 것을 장만한 것 같은데, 아직 등기를 안했대요.” “그래요? 돈이 많았나 봐요.” “그러니까 오늘 혜림 씨가 등기하도록 도와주세요.” “인감 도장만 주시면 제가 대신 해드리지요.” 좌석 전체가 웃음 도가니 이었지만 그녀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친구들과 파하고 동성로 밤거리를 팔짱을 끼고 걸었다. 술 취한 상태로 그녀와 같이 있는 시간이 아까울 것 같아 초저녁부터 술을 절제했었다. 10월의 밤바람은 싸늘했다. 내일 이면 헤어져야 한다는 아쉬움에 아무 말 없이 포도를 따라 걸었다. 멈춘 곳은 불이 켜진 여관 앞이었다. 옷을 입은 채 둘이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무 말이 없었다. 군 생활이 한정된 시간이지만, 이별에 대한 벽이 이렇게 두껍게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에 머리를 흔들었다. 주머니에 깊숙이 간직하고 있던 조그만 플라스틱 사각 통을 꺼냈다. 그녀는 나의 동작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과외 아르바이트로 번 석 달 치 금액을 주고 준비한 선물이었다. 반지 속에는 두 사람의 이니셜을 넣고 한정된 시간동안 헤어지는 입대날짜를 적었다.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고,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반지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더니, 그녀는 와락 내 품에 안겨 왔다. 품에 안긴 그녀는 어깨를 들먹이며 울고 있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어깨를 감싸 안은 채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어깨를 떼며 그녀의 젖은 눈을 바라보고 입을 뗐다. “기다려 줄 수 있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샤워를 하고 나란히 누웠다. 진한 키스와 애무가 이어졌다. 통통한 젖가슴과 잘록한 허리는 피가 통하는 따뜻한 조각품이었다. 연분홍 유두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터치했다. 완전 나신으로 팔을 베고 누워있는 혜림을 쳐다보며 “등기이전을 해준다면서........” 의아한 얼굴로 처다 보다가 팔을 꼬집었다. “그날이 오면 드릴 수 있어요.” 막연하지만 그날을 생각하면서 젊음의 감정을 자제하고 둘이는 같이 인내 할 수 있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우리는 택시를 타고 대구에서 경산으로 향했다. 경산 중앙국민학교. 운동장에는 입대 장정들과 가족들, 연인들로 가득했다. 보내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의 이별에 대한 애틋한 감정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나무도장을 새기는 사람들과 군데군데 만들어진 간이 이용소에서 머리를 깎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이제는 필요 없는 머리카락을 자르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데, 혜림은 나무 막도장을 새겨왔다. 손잡이 부분에 철사를 불에 달궈 구멍을 뚫은 곳에는 검은 고무줄이 끼워져 있었다. 머리카락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내 청춘을 유보하기 위한 의식으로 느껴졌다. 핼쑥한 얼굴의 그녀는 안타까움으로 가득 찬 눈길을 보내며,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입대 장정들은 운동장 중앙으로 모이고 있었다. 혜림은 팔짱을 끼고 있다가 내 두 손을 쥐고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번 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또박 또박 끊어서 말 했다. “당신을 정말 사랑해요. 나는 당신의 여자가 틀림없어요. 내 목숨만큼 자기가 소중해요. 기다릴게요. 건강하게 다녀오세요.” “그래. 나도 사랑해. 갖다 올게.” 손을 놓고 대열로 향했다. 운동장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주의사항을 듣고 4열종대로 좌우측 4명씩 어깨동무를 했다. 대열을 맞추어 ‘열차 몇 소대’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경산역으로 향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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