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에서의 도피
그 후 하나의 고민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것은 영한의 결혼식 참석이었다. 영한의 결혼식 날이
다가올수록 내 고민은 깊어져 갔다. 영한과 강노인과의 인연으로는 당연히 참석해야할 결혼식이었지만,
이미 강 노인에게 참석하겠노라고 약속까지 해 놓았지만, 영한의 결혼식 참석은 나에게 많은 고민을 불러 일으켰다.
그곳엔 다시 만나지 말아야할 한사람이 있었다. 다시 만나게 되면 내 삶을 온통 흔들어 놓을 한사람이
있었다. 머릿속으론 숫한 이별을 하고, 다 정리된 것처럼 내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지만 가슴속엔
아직도 뜨거운 불덩어리로 존재하는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우리는 설핏 스치는 감정의 교감으로 서로에게 이별을 이야기 했지만 그것이 진정한
이별이 될 수 없음을 서로 알고 있었다. 자석의 엔극과 에스극이 서로를 알 수 없는 강한 힘으로 끌어
당기듯 그녀와 나는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끌어당기는 강한 힘이 느껴지고는 했다.
장례식이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의 만남과 아무것도 꺼릴 것이 없는 서울이라는 공간에서의 만남은
다른 것이었다. 더구나 장소가 그녀의 숙소가 있었던 워커힐이라는 것과 그녀와 내가 그곳에서 하룻밤
을 보냈다는 것이 더 큰 위기감으로 다가왔다.
그곳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면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자문해 보았다. 하지만 확실한 답은 언제나
없었다. 자석의 엔극과 에스극이 벗어날 수 없는 힘이 부여되어 있듯이 그녀와 나 또한 운명적인 끌림의
힘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 힘을 이성으로 버텨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힘은 운명처럼 우리 둘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아무리 미약하게 남겨
질 지라도 내 삶이 끝나는 그때까지 존재하게 될 것이다.
낯선 서울에서의 그녀와의 만남, 나이든 이들과 섞이지 못하는 중년의 두 남녀는 자연스레 둘만의
만남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럼 또 우리는 유쾌한 대화를 나누고 함께 있는 즐거움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본능처럼 부여된 끌림의 힘에 맞서 힘겨운 이성의 싸움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그걸 이겨낼 수 있을까? 지금까지처럼 그렇게 이겨낼 수 있을까? 예전의 그날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이별을 고할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었다. 4개월이 넘는 헤어짐 속에서 가슴속에 더 깊어진 그 욕망이 나를 지배해 버릴
것만 같았다. 우리는 충분히 절제했고, 충분히 고통스러웠고, 충분히 참아냈다. 그것이 우리에게
더 이상 참지 못함에 대한 명분을 부여해 줄 것이다.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에 대항해 우리도 할 만큼 했다는 명분이 겨우 우리를 지탱해주는 도덕적 굴레와
이성의 벽을 넘어서는 충분한 변명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다. 너무나 강한 결합이 이루 워 져 버릴 것만
같았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강한 결합이…….
그녀와 내가 정신적인 사랑을 넘어선 육체적 결합까지 가야했다면, 그날 그 워커힐에서 이루 워 졌어야
다. 그렇게 서로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욕망을 모두 분출시켜버리고, 한동안 그 욕구들을 충족시켜 버리
고 후회 속에 관계를 정리하던, 아니면 좋은 감정은 그대로 남겨둔 체 주변여건들을 생각해서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주변여건들로 인해 이별했던 두 남녀가 헤어짐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만나게 됐을 때의 결합력
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나는 주변사람들의 모습에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되면 주변
여건들은 더 이상 장애가 되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너무 두려웠다. 가지 말아야 한다고 숫하게 마음먹었다. 그녀를 그렇게 다시 만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숫하게 했다. 하지만 결혼식 날이 다가올수록 내 결심들은 자꾸만 약해지고 ‘가지 않고
버틸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선행 되고 있었다. 아무리 가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더라도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결혼식장 앞에 있을 것만 같았다.
결혼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일요일 나는 아내와 여느 때처럼 산에 올랐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강진 주작산 등산로였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바위능선들이 길게 이어지며 만만치 않은 산행 코스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한참 강진 사초호로 낚시를 다니던 시절, 철수 길에 하얗게 빛나는 바위 능선을
보며 아름다운 산이라고 생각했던 곳이기에 그곳을 오르는 산행이 다른 때 보다 더 많은 즐거움을 가져
다 주었다. 능선을 따라 걷는 동안 좌측으로 강진만의 파란 바다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풍광에 젖어들던 즐거움도 잠시, 나는 다음 주면 찾아오는 영한의 결혼식 참석 문제가 계속
머리를 어지럽혔다. 내 고민은 능선을 타고 가며 더 깊어져 갔다. 마음이 한없이 불안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내 자신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가지 말아야 할 길, 가서는 안 되는 그 길, 가지 말아야 한다고 이미 결정해버린 그 길에 왜 이렇게 자꾸
만 이끌리고 있는지 내 자신에 대해 분노가 일었다. 하지만 그 분노의 한켠에서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고
있었다. 그 불안감은 결국 그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이런 고민에 깊이 몰입되었던 탓
인지 아내의 페이스를 읽지 못하고 계속 속도를 내어 걸었던 모양이다.
“잠시만 쉬었다 가요.”
내 속도를 따라잡기 힘들었던지 아내가 힘에 겨운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웠다.
“아, 미안. 다른 것 좀 생각하느라 너무 빨리 걸었어.”
“산에 왔으면 산을 생각해야지 뭔 딴생각을 그리 깊이 해요.”
“산에 왔으면 산을 생각해야 한다. 멋진데. 무슨 스님 화두 같다.”
아내는 내 말에 미소를 지었다.
아내와 나는 잠시 근처 나무 그늘에 앉아 물과 간식을 먹었다.
“산에 왔으면 산을 생각해야 한다. 벌써 산행 철학까지 생기고 전문 등산 인이 다 된 것 같아.”
나는 웃으며 아내를 놀렸다. 아내는 내 이런 놀림이 싫지 않은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처음엔 산에 오르는 게 너무 힘들던데, 이젠 주말에 산에 오지 못하면 몸이 찌뿌둥해요.”
“이젠 산도 제법 잘 타는 거 같아. 이렇게 둘이 같이 산에 다니니 좋지.”
“그럼요. 저기 바다 좀 봐 봐요. 얼마나 이뻐요.”
아내의 말에 나는 우두커니 파란 강진만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은빛 햇살이 부서지는 바다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던 아내가 다시 말을 꺼냈다.
“바다가 이렇게 이쁜 줄 산에 올라서야 알았네요.”
“캬아, 멋지다. 오늘 당신 멋진 말만 골라서 하네. 바다가 아름다운 줄 산에 올라서야 알았다. 이러다
당신 시인되겠어. 아님 해탈해 버릴라나. “
아내는 내 놀림에 눈을 흘겼다.
“진짜에요. 나는 바다가 무서웠어요. 너무 깊은 파란 물을 보면 그 속이 보이질 않아요.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뭔가 무서운 것이 들어 있을 것만 같아요. 사람도…….”
“진짜 여기서 보니 이쁘긴 이쁘다.”
나는 다른 말로 아내의 말을 잘랐다. 아내의 말에는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사람도 매한가지라는 말로 느껴졌다. 나도 속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늘 두렵게 느껴졌다.
아내와 나는 아무 말도 없이 한참동안 바다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능선마다 드러난 바위들을 바라보았다. 세월과 그 세월속의 풍파를 견뎌내고 깍여
지고 부드러워진 그 선들이 고고하게 느껴졌다.
“저 바위들도 봐봐, 오랜 세월이 느껴지지 않아?”
그 바위들을 바라보던 아내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내손을 잡았다.
“흔들림 없이 그렇게 우리들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요.”
아내의 이 말이 남은 산행동안 계속해서 머리를 떠나질 않았다. 두 가지 가정이 모두 가능했다.
내가 아내의 무엇인가를 알고도 그렇게 흔들림 없이 있어줘서 고맙다는 뜻이 될 수도 있었고,
지금 내 상황을 아내가 알고 있기에 뱉어낸 말일수도 있었다.
두 가지 상황 중 어느 것이 더 비극적일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려졌다. 그 모든 것이 비극이
되느냐 마느냐는 현재와 미래가 결정하는 것이지 과거가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나의 사랑이 식어 있지 않는 한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 한건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일 뿐이었다.
산을 내려와 차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불렀다. 택시를 타고 다시 산 건너편 차로 돌아가는 길에
택시 안에서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쥐었다. 아내가 나를 사랑스런 눈길로 바라보았다.
“나 다음 주에 낚시 좀 갔다 올게.”
“다음 주에 서울 결혼식에 가야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응, 근데 축의금만 보내고 안 갈려고.”
“그래요. 저는 가까운데 무등산이나 갔다 올 테니깐, 신경 쓰지 말고 차분히 갔다 와요. 저하고 산에
다니느라 낚시 간지도 너무 오랜 된 것 같아서 미안한 생각도 들었어요.”
아내는 내가 결혼식 참석을 포기하고 낚시를 가는 것으로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결정이었는지
모른 체 밝게 웃어주었다. 나는 그렇게 그녀와의 만남을 피하기로 결정했다.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는
격정에 서울로 향하게 될까봐 미리 아내에게 낚시를 간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 놓아야만 내 자신의 갑작
스런 충동을 억누를 수가 있을 것 같았다.
‘토요일 밤낚시를 하고 그 지저분한 몰골로 서울로 향할 수는 없을 것이다’ 는 생각이 나를 홀가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흔들림 없이 그렇게 우리들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던 아내의 말이 내 마음을 결정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 말 중에 ‘우리’라는 단어가 가장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그 말에서 나는 내 삶이 나와 아내만
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이 일어났다. ‘우리’라는 단어 속에 가장 강하게 떠올려지는
얼굴은 애들의 얼굴이었다. 늘 의젓한 아들의 모습과 너무나 쾌활한 딸애의 얼굴과 목소리와 웃음
소리가 머릿속에 아프게 퍼져 나갔다.
남편이라는 존재는 흔들릴 수도 있는 존재 였지만, 아니 필연적으로 흔들림의 과정 속에 놓인 존재
였지만. 아빠라는 존재는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되는 존재, 생이 다하는 날까지 흔들릴 수 없는 존재였다.
저수지를 떠난 지 4개월도 더 지난 가을날 나는 저수지를 오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가는 낚시라 그런지 전날 밤 설렘에 잠조차 설쳤다. 토요일 새벽부터 베란다 창고에 넣어
두었던 채비들을 꺼내 낚시를 시작한 이후 가장 오랫동안 휴식을 가졌을 낚싯대들을 하나씩 꺼내 정검 했다.
오랫동안 낚시를 가지 못할 것 같아서 꼼꼼히 닦아 넣어둔 탓인지 낚싯대들은 비장의 칼날처럼 반들반들 윤기가 났다.
낚싯대를 한대씩 펼쳐서 원줄이며 매듭들을 다시 살피고, 낚시 바늘은 혹시나 날이 무뎌졌을까 싶어
모두 새 바늘로 교체했다. 그리고 비어 있던 찌맞춤 통에 물을 새로 채우고 혹시나 달라졌을지 모를
찌들의 영점을 세세히 다시 맞춰 나갔다.
아내는 이런 내 모습을 거실을 지나칠 때마다 기분 좋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마치 전장에
나가는 무사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무기들을 철저히 정검 했고, 아내는 내 도시락을 준비하느라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였다.
마음이 급해져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열두시 반쯤 집을 나섰다.
낚시 짐들을 다시 넣을 공간을 마련하려 트렁크를 열었을 때, 익숙하지 않은 쇼핑백 하나가 트렁크
한구석에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띠였다. 그것은 영한과의 첫 만남 때 그가 내게 선물했던 양주였다.
그걸 보자 영한의 얼굴과 갑자기 나를 찾아왔던 그의 신부의 얼굴이 떠올려 졌다.
그들의 굴곡진 인생의 끝에서 맞이하는 행복을 함께 축복해주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들의 사랑이 많은 시련을 넘어 완성된 만큼 많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베란다로 옮겨 놓았던 낚시 짐들을 다시 차에 실으려니 그 짐이 만만치 않았다. 나는 엘리베이터
를 두 번이나 오르내리며 겨우 낚시 짐들을 다 차에다 실을 수 있었다. 짐들과 어젯밤에 미리 사두었던
부식들을 차에다 다 싣고 나서야 바쁜 마음이 안정감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경쾌한 기분으로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 나왔다. 가을 녘의 맑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토요일
오후의 느낌이 기분 좋게 다가 왔다. 가로수의 나뭇잎들이 그 푸르던 생명력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고,
다음 주 추석 때문인지 상가 진열대마다 과일이며 선물세트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도로는 장을 보거나 선물을 돌리기 위해 나온 차량들로 혼잡했다. 갑갑한 시내를 지나 자동차 전용도로
까지 진입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가 되었지만 여느 때처럼 조바심이 일지 않았다.
설렘과 좋은 느낌으로 시작된 출조 였지만, 나는 저수지에 가까이 다가 갈수록 왠지 모르게 기분이
우울해 졌다.
저수지 아래 마을에 도착 했을 때 마을은 적막했다. 이미 다들 영한의 결혼식 상경 버스에 오른 탓인지
마을은 인적 없는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가을의 나른한 오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인적 없는
마을은 마치 시간이 정지해버린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소류지에 오르는 시멘트 농로 길에 접어들며 잠시 차를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는 멀리 보이는
저수지 제방을 바라보았다. 들판은 노란 황금물결이 출렁이고 산비탈의 점령하던 신록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차창을 열어보니 산뜻한 가을바람이 가벼이 내 뺨에 부딪쳤다. 나는 먼 시간을 건너뛰어 고향에
다시 돌아온 노년의 신사처럼 가슴속에 왠지 모를 그리움과 설렘이 느껴졌다.
그곳에서 나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엿보고, 그들의 삶속에 빠져들었었다.
그곳은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의 삶이 아닌 또 다른 하나의 삶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곳을 통해 나는
또 하나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가슴속에 내가 아닌 다른 나를 가져보았다. 그리고 아내가 아닌 다른
여인을 가슴에 품어보았다.
그곳은 내가 가질 수 없는 삶과 사랑을 대리만족할 수 있는 스크린과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영화 속에서나 봄직한 사랑스런 여인을 만났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사랑을 느꼈고,
그것이 가져 다 주는 희열과 번민을 함께 느꼈다. 그것은 나에게 큰 축복이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지 못해 겪는 그 고통 또한 감미로웠다. 그녀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조차 향기로운
아픔이었다.
나는 가을이 빚어내는 아름다움들을 한껏 느끼며 서서히 그 길을 따라 올라 갔다. 그녀를 처음 발견하던
그 구비를 돌아 설 때 그녀가 그렇게 그곳을 걷고 있을 것만 같아 가슴이 심하게 일렁거렸다.
그 구비를 지나는 동안 차안에 그녀의 향기가 가득 차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오랜 시간동안 갑자기 찾아오는 그녀의 갈증에 목마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쉽게 그녀를 떠나보냈다고, 떠나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단순한 생각일
뿐이었다. 나는 순간순간 이는 제어할 수 없는 간절한 그리움에 끊임없이 고통 받게 될 것이다.
저수지 제방을 막 올라 섰을 때 저수지위의 풍광은 또 다른 느낌으로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정막이었다. 아무도 없는, 내 뺨을 가벼이 스치던 가을바람마저 숨을 죽인 듯 소류지는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갑자기 내 삶의 우울함과 지루함이 지속되리라는 슬픔이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치밀어 올랐다. 나는 애써 내 안에 이는 감정을 지우려 했다. 저수지 제방에 올라서면 잠시 멈춰
즐겨보던 주위풍광들을 볼 사이도 없이 나는 급히 차를 미루나무 아래로 몰고 갔다. 미루나무 아래
그늘에 차를 대자 일렁거리던 마음이 조금 안정이 되며 차분해 졌다.
차를 주차해 놓고 한참동안 그렇게 차안에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불과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결혼식을 참석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그 순간 그녀에 대한 느낌이 다르게 다가왔다.
그 전의 느낌이 언제든 다시 시작될 수 있는 현재 진행형의 느낌이었다면 지금의 느낌은 완전한 이별을
해버린 과거완료형의 느낌이었다. 이제 그녀는 과거의 여인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마치 이십대 초에 알았던 첫사랑의 여인처럼 아주 오래전 일처럼 아련한 그리움으로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일주일후에 만나볼 수 있는 현실속의 여인이었지만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순간 그녀는 현실속의 여인이 아니라 수십 년 전에 존재했을 듯한, 추억속의 여인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물속에도 가을이 찾아오고 있었다. 지난여름 수면에 가득했을 수초들도 듬성듬성한 흉터들을 간직한
채 그 존재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 빈자리마다 낚싯대를 한 대씩 꽃아 넣으며 그곳을 누비고
다닐 놈들과의 만남을 준비해 나갔다.
낚싯대 세팅을 끝내고 의자에 몸을 기대고 찌들을 바라보았지만 아직 시간이 이른 탓인지 찌에선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질 않았다. 내게 몇 번의 패배를 안겨주던 놈이 떠올려 졌다. 내 낚시인생에서
가장 큰 힘을 보여주던 녀석이었다.
나는 놈을 잡고자 하는 욕망에 들끓어 올랐었다. 하지만 ‘놈이 내게 잡히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는
생각이 들었다. 놈이 내손에 잡혔다면 놈은 지금과 같은 환상으로 존재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놈이 아무리 크다 해도 내 손안에 잡혀 있는 모습은 결국 작은 물고기 한 마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놈은 내게 잡히지 않았기에 내 마음속에 꿈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잡히지 않는 무엇, 잡을 수 없는 무엇으로 가득 찬 삶이기에 우리는 설렘과 희망으로 지루한 삶을 이끌
어 갈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또한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끝나지는 것이 아름다울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그녀와 만들어 내는 결과에 목말라 했지만, 그 결과라는 것은 결국 과정의 아름다움
을 모두 훼손시켜버릴 아픔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는 시선을 들어 수면과 제방을 넘어 넓게 펼쳐진 하늘과 산들을 바라보았다. 가을의 파란하늘이
청명했다. 그때 갑자기 뒷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 보는 순간 나는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그녀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추억 속으로 사라졌던 이가 현실속의 여인이 되어 내게 문자를 보낸 것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문자를 열어보려는 내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문자를 열기 전에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워커힐에서 그녀의 방문을 열려하던 그 순간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한번 열어버리고 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 같은 것이었다.
‘무슨 문자일까?’
나는 문자를 열어 보기 전에 그녀가 내게 보냈을 문자가 어떤 문자일까 미리 생각해 보았다.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문득 그녀가 만나고 싶다고 오늘 올라와 달라는 문자를 보낸 것이라면 어떡해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문자를 보게 되면 내가 가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일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잠시뿐, 그녀는 절대로 내게 그런 문자를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절대로 내 삶을 온통 흔들어 버릴 그런 문자를 보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낼 만나게 되더라도 서로 그렇게
지나치자는 문자일거라는 생각이 확신처럼 떠올려 졌다. 그것이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문자 같았다.
‘오늘 세시 비행기로 미국으로 떠납니다. 당신은 너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안녕히. ‘
문자를 열어보는 순간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 졌다. 그 문자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문자였지만 가장 그녀다운 문자였다.
내가 그녀와의 재회를 피해 이곳 소류지에 앉아 있듯이, 그녀 또한 나와의 재회를 피해 영한의 결혼식 하루전날 미국행을 택했던 것이다.
언제가 내가 그녀와 영한이 닮았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지만, 그녀와 나는 놀랄 만큼 닮아 있었다.
내가 느끼는 그 힘을 그녀 또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가까이 있으면 서로를 거부할 수 없게 끌어당기는 그 힘을…….
그녀 또한 그 힘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나와 그녀가 영한의 결혼식에서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서로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리게 될 것이란 걸 그녀 또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와 영원한 이별이 왔다는 걸 알면서도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머금어 졌다. 그녀는 내가 알고 있던,
내가 사랑을 느꼈던 그 느낌을 온전히 가진 사람이었다. 마지막까지 실망감을 남기지 않고 이렇게 고고하고 깔끔한 마무리를 짓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회신을 하기위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당신은 내게 축복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안녕히.’
그녀에게 보낼 나다운 한 줄에 어울리지 않는 문구 같아서 입력했던 글을 지웠다.
‘당신은 정말 빛나는 여인입니다. 행복한 미래가 있기를.’
‘내겐 그리움으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겁니다. 안녕히.’
‘영원히 아름다움으로 남을 겁니다. 안녕히.’
‘우리는.’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
‘너무나 사랑.’
‘너무 그리울 것 같아서.’
‘제발 행복해 지기를.’
‘당신에게도 내가 아름답게 기억되.’
‘…….’
숫한 한 줄을 썼다 지웠지만 끝내 나다운 한 줄을 찾지 못했다. 한 줄을 쓰려 할 때 마다 그 한 줄이
가져 다 주는 감정의 격랑이 나를 휘감고 돌았다.
‘당신은 너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안녕히.’
이 한 줄을 쓰기 위해 그녀 또한 얼마나 많은 글들을 썼다 지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녀
답게 단번에 이글을 써버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무리 많은 한 줄의 인사말을 썼다 지워도
내가 그녀에게 전해야할 한 줄을 도저히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내 마음속에 있는 복잡한 감정들을
한줄로 명쾌히 그녀에게 전달해 주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한 줄을 쓰려 할 때 마다 그녀의 모습이 떠올려 졌다. 환하게 웃던 그녀의 얼굴과 이별을 아쉬워하던
그 얼굴이 교차되어 나를 아프게 했다.
그녀에게 한 줄의 인사말을 쓰기위해 근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허비했지만 결국 나는 문자를 보내지
못했다. 그녀가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에 내 답신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일었지만, 나는
작별인사를 보내지 못했다.
이미 시간은 세시 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공항 대합실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내 답신을 기다리고
있을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는 답신을 보내는 걸 포기한 체 핸드폰 덮개를 덮었
다. 이렇게 작별인사도 건네지 못하고 그녀와의 영원한 이별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긴 숨을 뱉
어 냈다.
잠시 아무 생각 없이 수면을 바라보았다. 바람 한 줄이 수면위에 많은 파장을 일으키며 스치고 지나
갔다. 기하학적 문양들이 수면위에 가득 생겨났다 사라 졌다. 그녀가 내 마음에 아무리 많은 파장들을
만들어 냈다고 하더라도 저 바람처럼 흔적 없이 다시 평온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나는 다시 핸드폰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작별인사를 전송했다.
‘미 투. 안녕히.’
그녀와 나는 너무나 닮아 있었고, 동일한 감정 선상에 함께 놓여 있었다. 그녀가 느끼는 감정들이
모두다 그대로 내가 느끼는 감정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답신을 보낸 후 나는 의자에 한껏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알싸한 취기가 도는 것처럼 나른하고 몽롱한 기운에 빠져 들었다. 나는 아무
생각도 없었고 그저 멍하니 수면을 배경으로 펼쳐진 산자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시간이 건너뛰었다. 잠들지 않은 채 시간이 건너뛰는 상태가 되었던 것 같았다. 내가 시간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이 하늘은 벌써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서 붉게 빛나는 그 석양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웠다. 내 가슴속에 남은 감정처럼 너무나 선명한 빛깔의 아름다움이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심장의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평온하던 그 소리가 점점 빨라
졌다. 그리고 더 힘차게 박동을 하고 있었다. 심장의 박동이 터질듯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나는 눈을
떴다. 눈에 제방을 올라오는 길이 들어왔다. 요동치는 심장은 금방이라고 그녀가 그 길로 올라올 것이
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다시 보고픈 내 소망이 이렇게 간절했던가?’
나는 애써 요동치는 감정을 추스르려고 애를 썼다. 지금 이시간이면 이곳에서 수 천 킬로 떨어진 태평양
상공을 지나고 있을 그녀가 바로 내 곁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아무리 애를 써도 심장의 두근
거림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p.s 몬테를 갑자기 중단한 것이 죄송스러워서 저수지의 그녀 뒷부분 미연재 글을 올려드립니다.
안써지는 글을 억지로 쓸수는 없고, 써놓았던 글을 대신해서 올려 드립니다. 앞으로 한 여덟편 올라갈 것 같습니다.
저수지의 그녀 38. (운명에서의 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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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미연재 글이 있을줄은 몰랐네요.
기다려집니다.
중간에 닭살이 돕더군요.
직접느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멋진 몬테를 기다려 봅니다.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빠져들면 안되는데~^^
화이팅! 하세요~
마음을 줄수밖에 없는 좋은 친구일텐데 아까워!!!!~~
몬테가 끝나가고 있었는뎅........하여간 뭐라도 올려주시면 감사감사 ㅎㅎ
내심 저수지의 그녀를 많이 기다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월척에 접속하면 추억의 조행기를 제일 먼저 확인 하는것이 버릇이 되었네요.
힘내시기 바랍니다.
어떤 내용이 있을지```
잘계시죠!
자주 들려 좋은글 부탁합니다
2편보는것같이 반갑네여~~^^
기대됍니다~~
안녕히 얼른오시오^^
감사합니다.
마지막편 일프로 아쉬웟는데
작가님 복귀하셔서 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