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채 내게 물었다.
“선배님은 인생에 있어 꼭 지워버리고 싶은 하루가 있으세요.?”
잠시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의 등은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꼭 지워버리고 싶은 하루라....’
짧은 시간이지만 살아온 세월의 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살아오면서 겪었던 많은 위기들.....
하지만 꼭 찝어 단 하루만을 지워버리고 싶은 날을 명확히 규정지을
수는 없었다.
모든 일들이 지속되어진 연결선상에서 발생된 일들이었고,
그 결과물로 도출된 그 하루를 지워버린다 해도 삶이 변화될 일은
없어 보였다.
“생각해보지 않아서 딱히 떠오르는 날이 없네요. 그런 날이 있는 건가요?”
나는 내심 그 하루가 이십여년 전 있었을 일과 연관되었으리라는 생각으로 그에게 되물었다.
그의 입을 통해 가슴가득 쌓인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 싶었다.
그는 한동안 아무 대답도 없이 그렇게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세월을 거슬러 과거를 다시 회상하고 있는듯 했다.
그가 독백을 하듯 나지막한 어투로 말을 했다.
“그날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의 말에 신경을 집중했지만,
그는 같은 이야기만 중얼중얼 되풀이 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더 이상의 이야기를 이끌어 내는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에 꺼내물고 길게 빨아 드렸다.
담배냄새를 맡은 건지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에게 담배 한가치를 주고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었다.
라이터 불빛이 켜지자 그의 붉게 충열된 눈이 보였다.
오랜만에 피우는 담배인지 그는 유난히 깊게 담배를 빨아드리고,
길게 뱃어냈다.
그렇게 담배를 몇모금 피운후에 그가 차분해진 음성으로 다시 말을 꺼냈다.
“처음보는 사람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아니요. 뭔지모를 상처가 있는 모양인데, 가슴속에 쌓아 두는거 보단
기회 있을 때마다 뱉어 버리는게 나을 거여요.”
“삼일째에요. 삼일동안 말한마디 나눌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더 말이 많았나 봐요.”
그는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마을사람들 눈을 피해가며 삼일동안 이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이렇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축처진 어께가 한없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직장은 어떻하고....?,”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기세로 보아 그녀를 만날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을거 같았다.
그녀의 귀향에 보였던 강노인의 태도가 무엇때문이었는지 알것 같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예요. 아버님이 알면 걱정이 크실건데요.”
하고 말하자, 그가 놀란듯 고래를 쳐들었다.
내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란듯 했다.
그는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나를 살펴보는고 있는듯 했다.
그의 걱정을 해소시켜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일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삼일씩이나 직장을 비운걸 알면....”
그는 내말에 안심이 됐는지 긴장을 푸는게 느껴졌다.
나는 일부러 화재를 다른쪽으로 돌렸다.
“결혼 때문에 아버님의 걱정이 크시데요....,
진짜 결혼을 안하실 건가요?“
“...........”
“저도 세상에 두 개의 사랑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지나고 나니 하나뿐인 사랑이란건 없더군요.
사랑이란 왔다가 가고 다시 오고 그렇게 물처럼 흐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돌려보고 싶었다.
그로 인해 강노인이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걸 알기에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해 나갔다.
“한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누굴 기다리는지는 알겠는데,
그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면 그 사람 앞에 나설 자신은 있는 거예요?”
그가 무슨말인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대학 다닐때 헤어진 첫사랑 아가씨를 기다린 적이 있었어요.
지독하게 기다렸죠. 서울로 가버린 그애의 집앞에서....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술만 한잔 마시면 대책없이 그녀 집앞에서 버스가 끊길때까지 기다리곤 했어요.
.....
하얀 목련이 피던 다음해 봄.... 거짓말처럼 그녀가 걸어오는게 보이더군요.
그 순간 골목귀퉁이로 몸을 숨겼어요.
그렇게 간절히 기다렸는데 그녀를 보는 순간 그렇게 숨을 수밖에 없었어요.“
오늘 오전 아파트 단지 담벼락을 따라 핀 목련을 보며,
문득 잊혀져가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던 터라,
그에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막연한 그리움처럼 그때의 가슴앓이가 떠올려 졌다.
“내말이 틀리나요.
만약 당신이 기다리는 사람이 지금 저길을 따라 올라온다면
당신은 그 사람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을까요?
아님 내가 그랬듯이 몸을 숨긴채 혹시라도 들킬까봐 가슴 두근거리며 숨어 있지 않을까요?”
그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나타난다해도 그는 그 앞에 나서지 못할거라는걸....
내가 말했듯이 그렇게 어딘가에 몸을 숨길채 혹시 그녀에게 들킬까봐 두려워하며
그렇게 지켜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가 내 말에 동조되는 것이 느껴지면서 나는 더 적극적이 되었다.
그동안 쌓아온 강노인과의 대화속에서 언젠가 한번 만나게 된다면
꼭 그를 설득해 보겠노라고 다짐하고 있었던 터였다.
“내 생각이 맞다면.....당신이 기다리는 그 여인을 만났어요.”
그가 활맞은 범처럼 놀라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몸이 놀라 부들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 어떻게요....,”
그는 눈을 동그랗게 치켜뜬고 나를 바라보며 다그쳤다.
“지난주 토요일에 이곳을 오르고 있던 여인을 차로 태워서 저위에 아주머니댁까지 태워다 드렸어요.....”
그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온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녀의 이야기를 꺼내노라니 갑자기 그날 밤에 있엇던 아찔한 영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유난히 자극적이던 그녀의 체취가 아직도 코 끝에 남아 있는듯 생생했다.
“그래서요....”
조바심이 인 그가 나를 독촉했다.
“다 말해줄게요.
당신이 숨어서 지켜볼 수 있는거 보다 더 자세히....
짐이 가방하나로 단촐한 걸 보니 오래 머물 사람 같지는 않았어요.
.......
상당한 미인이더군요. 보기 드물게 이뻣어요.
그리고 어디 아픈데 없이 건강해 보이더군요.
얼굴에 귀티가 흐르고 옷차림이 고급스러운 것을 보니
험한 삶이나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 같지는 않았어요.
....
아니, 오히려 부티나고 고급스러운 삶을 사는 느낌이 들었어요.“
내 말을 들으며 그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오히려 내가 그런 그를 다그쳐 나갔다.
“더 궁금한 것이 있나요?
그 여인은 아주 잘 살고 있는거 같았어요.
단 하나 당신의 마음속에 남은 질문이 있겠지요?
혹시 당신을 그리워 하거나 외로워 보이지는 않았는지....?
그건 알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그게 지금 중요할까요.
지금 서로의 삶에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이 필요할까요?“
그는 그를 몰아붙이는 내 공격적인 말에도 아무런 반발도 없이 그대로
듣고 있었다.
다시 한가치의 담배를 서로 피워 물었다.
라이타불을 켜주며 그의 얼굴빛을 살펴보았다.
내말의 그의 내면에 다가간 것인지 슬픔에서 벗어나 많이 온화해진 표정이었다.
담배를 길게 내품으며 좀전과는 다른 차분한 어투로 그에게 말을 이어갔다.
“만약 그 여인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오늘처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면,
무어라고 말해야 할까요.
‘오직 당신만을 기억하며 살고 있다고....,
당신 때문에 그의 삶은 한없이 불행해 보이더라고....‘ 그렇게 대답할까요?.“
그는 말없이 담배를 깊이 빨아드렸다.
그리고 긴 한숨처럼 담배연기를 품어냈다.
“좀전에 나에게 던졌던 질문 그건 의미가 없는 질문이예요.
무슨일이 있었던 그 하루를 지운다고 해서 인생이 달라질까요.
그 하루는 지나온 많은 날들에서 연관돼서 온것일 뿐이예요.
그날을 지운다면 그 다음 다음날 언제고 그날과 같은 날은 다시 오게
되어있을 거예요....
과거에 머물지 마시고 그만 다시 현실의 삶속으로 돌아가세요.
하루하루 현실이 삶이 쌓이다보면 단 하루, 절대로 지울고 싶지 않은
행복한 날도 오겠지요.“
그는 아무말없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뱉어낸 말들이었지만, 과연 저말을 뱉어낼 자격이 나에게 있는가?
하는 후회가 들었다.
말은 유려하게 했지만 현실의 삶속에서 나는 얼마나 떳떳한가?
하는 자괴감이 밀려 들었다.
그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에게 이야기 듣고 상상했던 그 느낌 그대로네요.
일단 돌아가겠습니다.
돌아가서 많은 생각들을 해보게 될거 같습니다.
그리고 그애 소식을 들려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선배님 말씀이 맞는거 같습니다.
.....
그애가 지금 여기에 나타난다구 해도 나는 그애앞에 나설 수가 없을 거여요.“
그는 내게 인사를 하고 뒤돌아 차로 돌아갔다.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축쳐져 있었지만, 무거운 짐은 일부 벗어버린듯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그는 차에 시동을 걸었지만 출발하지 않은채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환한 실내등이 밝혀진 차안에서 그는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는거 같았다.
나도 마음속에 무거운 짐 하나를 내려 놓은듯 홀가분 함이 느껴졌다.
그날밤 너무도 갑작스레 찾아온 그 희열은 이렇게 막이 내려지는듯 했다.
이제는 머릿속에 하나의 은밀한 추억으로 간직해야 할 이야기라는 생각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다시 평정심을 찾았다.
그와의 대화속에서 오히려 내자신이 많은 것을 정리할수 있었던거 같았다.
잠시 잊고 있었던 주위의 풍광들이 밝은 달빛에 빛나고 있었다.
화려함도 약간의 흠집들도 어스름 달빛속에 묻어버린 한색의 것들이
수줍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나는 빈바늘로 던져 놓았던 채비들에 새우를 끼우고 정성껏 낚시대를 한 대한대 투척해 나갔다.
채비를 투척할때마다 수면에 떨어진 찌가 벌떡 일어서더니 비장한 노림수를 품은듯
서서히 수면으로 내려앉았다.
잠시 잊고 있었던 승부욕이 가슴속에 차오름이 느껴졌다.
그때 차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가 내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딱지처럼 접어진 편지가 들려져 있었다.
“저 이제 올라가렵니다.
혹시라도.... 혹시라도 다시 그애를 만나게 된다면 이걸 좀....
부탁드립니다.“
나는 그가 건네준 편지를 받아 들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버지 일부터...., 저한테 해주신꺼 까지 모두다요.
조만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나는 대답대신 가벼운 미소와 목례로 그의 인사에 화답했다.
그는 그렇게 떠나고
소류지엔 쏫아지는 달빛과 나만 덩그라니 남겨졌다.
p.s 이리 애독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막연히 기다리시는거 같아 죄송합니다.
전편 조회수 3000명 근처에서 올리구 있습니다.
저수지의 그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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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영광~~!!!!
잘읽고 있습니다~~~
저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날들을 지운다해도
똑같이 지우고 싶은 날들은 다시 생길 것 같네요.
그것이 살아 온 추억이며 인생이지요.
글 쓰시는게 힘드시겠지만 많은 애독자님들이 기다리고있네요 ..
다음편도 빨리 부탁 드리겠습니다.
재미나게 잘 보고 있습니다...고맙습니다.
다음편엔 그녀가 등장....하겠죠? ㅎㅎㅎ
기대 합니다.
낚시꾼은 낚시만 생각을 해야하는데....
이런 재기랄 왜 다음편이 자꾸 기달려지나...
다음은 어떻게 전개 될 지 궁금하내요..
힘주어 꾸욱 누릅니더
감사합니다
후속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추천이 없어요
추천하는거 어디로 이전했나요?
언제 이런 추억을 만드나요..
차에 탓으면 좋겠습니다.ㅠㅠ
감사합니다.
이미 중독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