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야생 상태로는 만나기 힘들다는 흰진달래를 금요일 출조갔다 우연히 보았습니다.
전국 어디에서나 자라는 낙엽활엽수 관목으로 높이2∼3m정도이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긴 피침형이며 양면에 털이 드문드문 있고 약간 광택이 난다. 꽃은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고 3∼6개로 꼭대기에 나며 새하얀 빛으로 4월에 잎보다 먼저 핀다. 열매는 삭과로서 10월에 익는다.
꽃의 색깔 이외에는 진달래와 전혀 구분이 안된다. 한때 여러 곳에서 가끔 관찰 할 수 있었으나 흰 빛이라는 진귀함 때문에 수난을 당하고 지금은 산에서 바로 만나기는 어렵다.
치명적 상처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고와 동작과 말투와 표정과 느낌등
이런 모든것은 수십년 살아오며 자연스럽게 자기것이 되버린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되기까지는 유전적인 요소와 그때의 교육과 부모의 가르침, 친구들과의 유대, 상황과 변화등
많은것들의 복합적인 것들이 섞여 자신의 가치관을 만들고 인생관을 만들며 그사람의 모든것들이 형성되어 졌을것이다.
특히 성인이된 상태의 그사람의 모든 행동들은 그사람의 사고에따라 움직이게 되는데
이런 사고 또한 일정하게 결정되기까지는 많은 미묘하고도 복잡한 과정이 있었을 것이고
그러한 과정은 언제나 진행형으로 있는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똑같은 사물을 보고도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기 마련이고 이러한 것을 철학적인 학문에서는 현상학 [現象學] 이라 말하는데
경험과 감각에서 나오는 의식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현상학에서도 사고의 다양성이 인간의 특질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각자 다르게 느끼면서 조화를 이우며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이것 또한 인간의 하나의 특징이다.
이 사회속에서 도덕적이며 양심적인 절대적 공감에 대체로 순응하며 하나의 톱니바퀴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사람은 하나하나가 특이하고 별나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형성된 자아 [自我]의 50%는 조화에 가치를 두지만 나마지 50%는 오로지 개인적인 감정에 충실하며
자신의 만족을 위해 끝없이 투쟁한다고도 볼수 있을 것이다.
부모와 자식, 아내와 남편, 친구, 직업과 사회의 일원으로 자신은 존재하지만
그 모든것 또한 자신의 존재로부터 비롯 되어지고 자신의 중심에서 벗어날수가 없기에
인간은 끝없이 자기 중심적이 되어 가는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와 변명과 체념과 투쟁등으로 자기 중심으로 돌아오는 기계이다.
가령 사람과의 관계에서 법을 어긴것은 아니지만 심각한 잘못을 한경우에 한편으로는 반성을 하면서도 마음속에는
"나는 어쩔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크게 잘못 하지는 않은것 같다. 이 정도는 얼마든지 이해할수 있지 않는냐" 하는 식으로
자기 중심의 사고를 하는것 같다.
지난달 개봉된 영화 '허트 로커 (The Hurt Locker)' 는 이런 인간의 전형을 너무나도 잘 표현한 수작이었다.
나는 그영화를 보며 내안에 숨겨진 50%의 자아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무기력한 나를 느꼈다.
생각해 보면 분명 심각한 문제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미 이렇게 형성된 나머지 50%의 자아를 끊임없이 합리화 시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런것 까지 다시 변명하는데 급급한 나를 다시한번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미 이렇게 졸작으로 완성되어가는 나라는 조각품을 이제 다 없애버리고 다시 조각을 할수도 없거니와
그 어떤것으로도 겉만을 화려하게 포장할수도 없는것이니 어찌하랴
지금이라도 조금만더 나아지기를 기대하며 최선을 다 할수 밖에 없는 일이니...
인간은 자신만의 세계에빠져
그 세계의 도덕적,양심적 가치판단의 매너리즘에 빠져버렸다.
인간의 대부분은 그 매너리즘을 깨버리고 파괴시킬 용기와 지혜가 부족하다.
그러니 어쩔수 없이 그것을 인정하자.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더 뻔뻔해지던가 아니면 겸손해 지던가 하는것은 성인이된 그대들의 몫이다.
흰진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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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구경하네요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