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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3)

갈대와 수수깡이 가장 오랜 재료 찌에 관한 우리의 기록은 조선조(朝鮮朝) 후기에 이르러 자주 나타난다. 조선 현종·숙종 때의 남인(南人)학자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1629∼1711)의 개인문집인 약천집(藥泉集) 제 28권 가운데 낚시수필 ‘조설(釣說 1670년 작)’에는 ‘무릇 낚싯줄에 짚고갱이를 (찌로) 달아 쓰는 이유는 그것이 뜨고 가라앉는 것을 정해 물고기가 먹이를 삼키거나 뱉는 것을 알고자 하는 까닭이다’라는 귀절이 있다. 이것이 찌와 찌낚시에 대한 국내 최고(最古)의 기록이다. 찌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가장 짤막하면서도 정확하게 내려놓은 정의(定義)다(표준낚시백과사전, 자연과학刊. 찌편 참고). 그 후에 쓰여진 서유구의 전어지(佃漁志)는 찌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범자(泛子 찌)로는 갈대나 기장의 줄기를 1∼2치(寸) 길이로 잘라 낚싯줄에 달아 사용한다. 이를 물에 띄워 무릇물고기의 움직임을 살핀다. 물고기가 먹이를 먹으면 찌가 살짝 움직이게 되는데, 먹이를 삼키면 즉시 낚싯대를 들어 챈다. 만약 늦으면 미끼를 잃는다. (찌는) 범자(泛子)라는 말 대신에 부자(浮子)라고도 한다. 낚싯줄에 갈대줄기를 달아 쓰기도 하는데, 이것을 범자라 한다. 그것이 움직이는 것을 살펴 물고기가 바늘을 삼킨 것을 안다.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인 한퇴지(韓退之:한유)의 시에 ‘깃털이 가라앉으면 물고기가 미끼를 먹은 것이다. 당나라 시절에는 찌의 재료로서 모두 새의 깃털을 썼다’고 했다.” 중국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찌를 범자(泛子) 또는 부자(浮子)라 했으며, 당나라 때에는 1∼2치 길이의 짧은 갈대를 찌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1천여년 전 당(唐)나라에서는 닭이나 새의 깃털을 갈대나 수수깡에 꽂아 사용했던 모양이다. 1960년대까지 찌의 소재로는 전통적으로 갈대나 수수깡이 가장 널리 사용됐다. 수수깡을 15∼20cm 길이로 자른 다음, 양끝을 불로 살짝 지져서 사용하기도 했다. 갈대도 전국 어디에나 널리 분포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쉽게 구해 쓰는 찌의 재료였다. 그러나 갈대찌가 상품화돼 시중에 나타난 것은 197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이전에는 일부 낚시인들 사이에서 오동나무를 깎아서 몸통을 만들고, 여기에 가늘게 깎고 곱게 다듬은 대나무를 찌톱으로 달아 썼다. 1930년대 이전에 이미 오동나무 소재의 이와 같은 고추형 찌를 만들어 사용한 낚시인들이 제법 많았다. 1950년대 중반 무렵까지는 일본이나 국내에서 만든 찌에는 찌날라리가 없었다. 찌에 찌날라리를 달게 된 것은 일본의 영향이었다고 한다. 찌날라리가 부착된 찌가 수입돼 선보인 것은 1957∼1958년 무렵. 1950년대에는 한작(韓作)·주작(朱作)·용작(龍作)·조작(趙作) 등의 대나무낚싯대가 생산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찌도 나무몸통에 가는 셀룰로이드톱을 단 것이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톱은 공기가 든 튜블라 형태였으나 이 무렵에도 별도의 톱을 단 찌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1960년대로 들어서면서 국내에서 생산되는 모든 찌에 찌날라리가 부착되기 시작했다. 주로 오동이나 갈대·수수깡찌가 가장 흔하게 사용됐으며 이 외에 나무 소재의 찌로서 발사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절은 오동찌와 수수깡찌가 대종을 이루었던 때로 기록된다. 또한 찌의 길이는 1자(尺) 이하로 짧았으며 대체로 부력은 작고 몸통은 가늘었다. 당시엔 3칸대만 해도 긴대로 취급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길고 큰 찌는 불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몸통이 크고 길며 부력이 큰 찌는 만들지도, 사용하지도 않았다. 1965년 무렵을 전후해서 국내에서 글라스로드(glass rod)가 생산되면서 찌 수요가 늘어나고 ‘날라리가 달린 찌’가 빠른 속도로 보급됐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 드디어 오동나무 소재의 찌가 경기도 용인에서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했다. 공작찌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생산된 것은 1970년. 당시 주작(朱作)이란 대나무낚싯대를 생산하던 윤덕기씨(尹德基)가 생산한 것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윤덕기씨는 일본에서 공작찌 샘플을 들여다가 이를 보고 생산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맨 처음 상품화한 것은 세 조각을 잘게 쪼개어 붙인 3합(合)찌였다고 한다. 공작에 찌날라리를 붙인 신상품이 이 때부터 크게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1950년대에 공작찌를 사용하기 시작, 1960년대에 크게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러나 얼음낚시가 시작된 1971년 무렵에도 공작찌는 널리 보급되지 않았으며 1972∼1973년경에도 얼음낚시용 찌로는 플라스틱 톱이 별도로 부착되지 않은 고추형의 통찌가 주로 사용되고 있었다. 오동나무 및 공작찌의 생산과 더불어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는 찌톱의 소재로 튜블라와 솔리드의 수요가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고 재질도 한층 고급화됐다. [이 게시물은 운영자님에 의해 2009-09-24 08:46:44 대물낚시에서 이동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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